마음의 산책로 2 – 일상 속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는 시간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애니메이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공식 포스터. 흰 깃털과 푸른 눈, 긴 부리를 가진 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그림. - © Studio Ghibli / © 2023 Hayao Miyazaki / © TOHO Co., Ltd.]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등.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따뜻한 듯 어딘가 기묘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좋아해 왔다.
하지만 2023년 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제목부터가 묵직했다. 그 거대한 질문의 무게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어제 그 답을 찾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왜 사람들의 평이 나뉘었는지, 그리고 친구에게 감상평을 물었을 때 왜 쉽게 규정되지 않는 ‘괜찮았어’라는 표현만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부정적이지는 않은 여운을 느꼈다.
이제 그 흐릿한 느낌을 선명하게 만들어 보려 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전쟁 중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도쿄에서 새어머니가 있는 시골의 오래된 저택으로 이사를 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마히토는 그곳에서 기묘한 왜가리를 만나게 되고, 임신한 새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은유는 친절하지 않았다. 이사 간 시골집에서 왜가리가 수시로 나타나 불길하고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고,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들어간 미지의 세계에서는 거대한 펠리컨과 앵무새들이 소년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 새들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물음표를 달고 시선을 쫓던 중, 죽어가는 펠리컨의 대사를 통해 어렴풋이 감독의 은유가 눈에 들어왔다. 펠리컨은 물고기들이 부족한 저주받은 바다로 끌려왔다고. 굶주림 속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인간 아이로 태어나는 영혼, 와라와라를 잡아먹게 되었다고.
펠리컨은 악당인가 싶었지만 악이 아니라 절망에 내몰린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폭력성은 결핍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었다. 굶주림의 세계에서 도덕과 질서는 가장 먼저 사라진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환상 세계 속 앵무새 왕과 앵무새들은 소수였지만, 개별적 사고 없는 맹목적 집단주의와 무분별한 추종으로 거대 집단화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줬다.
이들은 결국 스스로의 세계를 망하게 만드는데, 이는 전쟁당시의 군국주의와 주체성 없는 대중을 지칭하는 듯했고, 생각을 멈춘 인간이 만들어내는 위험성을 드러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안내자이자 조력자인 왜가리는 처음엔 음침하고 교활한 악당 같았지만, 종국엔 마히토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와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왜가리는 마히토의 다른 내면 자아이거나, 인간의 복잡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존재 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의 세계는 증조부가 만든 곳으로, 마히토가 이‘완전한 세계’를 이어받아 꾸려나가길 제안받는다.
그러나 소년은 불안정할지라도 자신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의지를 보이며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펠리컨과 앵무새들이 상징하는 구세대의 구습과 악습을 답습하기보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나니 얼마 전 읽었던 손턴 와일더의 『산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떠올랐다. 이 책 또한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다섯 사람이 다리 위에서 뜻밖의 사고로 죽고, 사제가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들의 삶을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은 신의 의도를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유일한 가치는 사랑이라는 메시지로 수렴되긴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의문이 들었다.
책의 결론이 모아지기 이전부터 ‘설명될 수 없는 사고였지만, 삶이 그런 것이지 않은가.라는 생각만 맴돌았는데, 이 영화를 보니 그 의문이 서서히 한자리에 모였다.
『산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신의 관점에서 죽음을 해석하려 했다면, 미야자키의 영화는 인간의 관점에서 죽음을 통과한다.
하나는 신의 뜻을 찾아 나서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후자 쪽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갔다.
마히토는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환상의 세계를 겪으며 죽음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이는 내 개인의 경험 때문인 듯하다.
어린 시절, 나는 죽음을 너무 일찍 가까이에서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병으로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났고, 나는 마히토처럼 ‘남겨진 사람’이었다.
남겨진다는 것은 그들의 부재를 매일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었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빈자리’의 재확인이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드는 그리움은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삶이란 이 그리움을 껴안고 걸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긴 세월 속 굳은살이 박이듯, 스며들듯 배웠다.
처음엔 그리움이 나를 삼켜버렸지만, 이제는 그 무게를 품은 채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듯하다.
언제부터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이제 죽음을 진심으로 하나의 순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 1인분의 역할이 끝나면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쥐어주고, 흙으로 거름으로 돌아가겠거니 싶다.
그래서 요즘 나는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시선을 두고 피하지 않고 살아가자 생각한다.
내가 속한 사회, 내 일, 내 친구와 동료들.
그 관계들 속에서 내가 나눌 수 있는 만큼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것.
세상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지켜내는 일. 그것이 나의 삶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세상은 그 속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그 불안 속에서조차 누군가를 이해하려 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세상이 아닐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완전한 해답은 없지만, 끝까지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일만은 내 몫으로 가져가고 싶다.
오늘도 나는 이 결함투성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영화가 저에게 물었던 것처럼, 저 또한 여러분께 조심스레 묻고 싶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은, 오늘이라는 하루와 앞으로의 나날들을
어떤 마음으로 채워가고 싶으신가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예년보다 비가 자주 내려 아쉬웠는데, 다음 주부터는 청명한 가을 하늘을 자주 볼 수 있겠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듯, 대신 기온이 뚝 떨어져 초겨울 기온을 보인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따뜻한 겉옷을 챙기시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마음과 몸을 데우시길 바랍니다.
일요일이지만 미리 인사드립니다. 무난하고 안온한 한 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