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로 2 – 일상 속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걷는 시간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영화 〈세계의 주인〉 공식 포스터. 배우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배경에는 장미와 가시, 과일이 섞인 화려한 일러스트가 펼쳐져 있다. 포스터 상단에는 영화 제목 ‘세계의 주인’이, 하단에는 출연 배우와 개봉 시기 ‘2025년 10월’이 표시되어 있다. - © 윤가은 감독, 제작사 필름다빈, 배급사 왓챠
※ 이 글은 영화 〈세계의 주인〉의 주요 장면과 인물의 서사에 대한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감상 이후에 읽어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우리들〉, 〈우리 집〉을 통해 아이들의 관계와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그려온 윤가은 감독이 세 번째 장편 영화 〈세계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이번 작품에서 감독은 ‘피해자다움’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자, 여기 여러분 앞에 서명지가 놓여있다. 문구는 이렇다.
“우리 동네에 성폭력 가해자의 재 입주를 반대합니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그런 가해자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피해자와 주민 모두에게 또 다른 폭력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피해자의 안전과 존엄을 우선으로 하는 마을을 지향합니다.
가해자의 우리 동네 재 입주를 반대하는 서명에 함께 해주세요. “
범죄를 저지르기 전 동네에 거주했던 성폭력 가해자가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다. 한 주민이 이에 분개해 ‘안전한 우리 동네’를 지키자며, 서명을 받고 있다. 당신만 서명하면 동네 주민 모두가 서명에 참여하게 된다. 마침 당신도 걱정스러웠던 참이었다.
당신은 이 서명지에 서명하시겠는가.
영화는 공부, 태권도, 교우관계, 연애 등 모든 것에 당당하고 적극적인 18세 여고생 이주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가 위 서명지와 비슷한 내용의 서명을 부탁한다. 전교생이 이미 참여한 상황이었지만, 주인이는 내용이 잘못되었다며 서명을 거부한다. 그로 인해 평범한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주인이는 왜 서명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여기서 불편한 감정에 닿는다.
“일부 내용이 잘못되었다 한들, 이건 가해자를 동네에 발붙이게 하지 말자는 선한 의도잖아. 알만한 애가 왜 유난이야”라고.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일리 있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안일함일 수 있다.
주인이는 “영혼을 파괴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에 반발한다.
그 말은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사건에 영구히 종속되어 다시는 주체적 삶을 살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뿔싸, 그런데 주인이는 실제로 피해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대의명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폭력에 맞선 것이다.
그런 주인이를 두고 “까탈스럽다, 유난 떤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불편한 감정이 떠올랐다.
하나는 잘못된 미디어와 정보가 만들어온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
다른 하나는, 대의와 명분 아래에서 집단적 동조와 심리적 부담에 이끌려 비판적 사고가 ‘공동체의 조화’를 이유로 억눌리는 현실이다.
영화는 주인이를 통해 묻는다.
“피해자는 나약하고, 우울하고, 불행해야 한다." 그런 편견을 품고 있지는 않았느냐고, 피해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고 믿지는 않았느냐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피해자다움’은 없다고.
주인이와 함께 태권도장을 다녔던 미도 언니는 친족성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인물이다. 그녀는 자원봉사활동과 식당일을 하며 꿋꿋하게 살아가지만, 친족성폭력의 피해자로 법정에 서게 된다.
재판정은 판결보다 먼저, 편견 어린 질문과 시선으로 그녀를 몰아세운다.
영화는 그 장면을 통해 피해자를 ‘피해자다움’으로 재단하는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계의 주인〉은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극적인 화해나 용서로 매듭짓지 않는다.
주인은 불안정하고 서툴지만, 그 모습 그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단짝 친구 공유라는
주인의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침묵과 거리 두기로 주인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이 주인에게 상처가 될 말들을 함부로 말하는 장면을 보며 자신의 태도를 돌아본다. 이후 공유라는 깨닫는다. 자신의 침묵도 결국 폭력의 한 형태였다는 것을.
그녀의 화해 시도는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에게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는 듯했다.
엄마 강태선이 보여준 지지와 연대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큰 위로처럼 다가왔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딸을 다그치지 않고 기다리는 장면,
차가운 물줄기와 소음이 몰아치는 세차장 안에서 울부짖는 주인이를 담담히 기다린다.
그저 조용히 물과 휴지를 건네며 "한 바퀴 더 돌까?"라는 말은 "네 감정이 정리될 때까지 기꺼이 함께 견디겠다."는 무언의 연대처럼 들렸다.
자신의 고통은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는 불완전한 엄마의 모습을 보이지만, 딸과 함께 고통을 견디며 삶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오래도록 마음의 잔상으로 남았다.
어린 남동생 해인은 누나 몰래 가해자 삼촌이 보낸 편지를 숨기고, '근심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선보인다.
그 순수한 마음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되찾으려는 작은 분투처럼 느껴졌다.
〈세계의 주인〉은 말한다.
상처는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때로는 덧나고, 때로는 흔들릴 수 있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지 말라고.
영화는 피해를 겪은 모든 이들에게 아니,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네 삶의 주인공은 바로 너"라고.
익명의 메시지로 인해 흔들렸던 주인은,
마지막 메시지를 마주한 순간 비로소 웃는다.
그 미소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앞으로도 흔들리겠지만, 자신을 긍정하며 자신의 몸짓과 시선에 용기를 담아
그렇게 세상의 문을 열고 걸어가겠다고.
영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피해자다움’의 틀 안에 저를 가두고는 청소년기를 지나 20대 청년이 되었을 때까지도 제 몸을 부정하며, 그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주인이처럼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주인이에게 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주인이를 대신해 말해주고 싶습니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잘 이겨냈다고.
당신은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금의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우리는 ‘피해자다움’이라는 말 뒤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있지는 않을까요?
선의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의 고통을 다시 규정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처를 품고〈세계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