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괴발개발

종-속-과-목-강-문-계

<괴발개발> 4

by 박성봉
고양이 세 마리,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
'괴발'의 말랑함과 '개발'의 꼬순내를 사랑하는 나.
두 동물의 거리를 탐색하고, 사람과 동물의 닮음과 다름을 사유하는, 매우 사적인 에세이.


<동물의 왕국>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의외로 <동물의 왕국> 팬이 많다.

K본부는 1970년도부터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지금까지 방영하고 있다.

자체 제작이 힘들었던 시절엔 해외 동물 다큐를 수입해 해설은 더빙을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치타와 톰슨가젤의 숨 막히는 추격 장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영어 제목도 <Animal Kingdom>, '왜 하필 왕국일까?'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kingdom은 생물 분류 체계에서 '계(界)'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동물계'를 그대로 옮긴 직역이었다.

하지만 의도했든 아니든 그 오역이 오히려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동물의 왕국 (출처 KBS), <가을의 전설> 영화 포스터 (소니영화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표지 (민음사).


이런 '오역의 행운'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가을의 전설>의 원제는 Legends of the Fall이다.

여기서 정관사가 붙은 'the fall'은 가을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 뜻한다.

정확히 옮기면 '몰락의 전설'이지만,

한 가족의 쇠락이 '가을'의 스산함과 겹쳐진 덕분에

한국어 제목이 오히려 더 서정적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그렇다.

영어 제목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을 직역하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하지만 한국어판은 어순을 바꿔 '참을 수 없음'을 먼저 두며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철학적 무게를 더했다.


이 글은 '동물의 왕국 백성'인 고양이, 개, 인간의 '진화적 관계'와

언어를 통한 '인식의 한계', '어울려 삶'에 대한 개인적 성찰을 담고 있다.


나뉨 (分類)


'종-속-과-목-강-문-계'.

중학교 교과서에서 한 번 배우면 평생 잊히지 않는 구절이다.

'태-정-태-세-문-단-세'와 함께 가장 리듬감 있는 4·3조이다.

진화에 의한 종의 분화 과정을 따라가려면

'계-문-강-목-과-속-종'처럼 거꾸로 외우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런 분류 체계를 한자와 영어로 정리하면,

계 界 (Kingdom)
문 門 (Phylum)
강 綱 (Class)
목 目 (Order)
과 科 (Family)
속 屬 (Genus)
종 種 (Species)

고양이, 개 그리고 인간은

'동물계 (Animalia)-척삭동물문 (Chordata)-포유강 (Mammalia)' 까지는 같다.

하지만 '목(目)'에서 갈린다.

고양이와 개는 '식육목(Carnivora)',

인간은 '영장목(Primates)'에 속한다.

육식을 좋아하는 나는 '식육목'일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일반적인 생물 분류 따라 '영장목'이라고 가정(?)하겠다.


에른스트 헤켈의 생명의 나무 (1866년), 고양이, 개, 인간의 분류 계통.


고양이는 '고양이과 (Felidae)-고양이속 (Felis)-집고양이 (Felis catus)',

개는 '개과 (Canidae)-개속 (Canis)-늑대 (Canis lupus)'

인간은 '사람과 (Hominidae)-사람속 (Homo)-사람 (Homo sapiens)'이다.

그렇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호모 사피엔스'이다.


흥미롭게도 개는 독립된 종이 아니라 늑대의 아종(subspecies)이다.

'가축화된 늑대'라는 뜻의 Canis lupus familiaris.

즉, 늑대와 개는 '번식 가능한'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같은 종이다.**


공룡이 멸종한 뒤, 포유류가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작고 야행성이던 포유류들이 비어 있던 생태계를 채워갔다.

한쪽은 나무 위로 올라가 손과 시야, 색각을 발달시켜 영장류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땅에 남아 후각과 청각을 발달한 사냥꾼으로 고양이와 개이 조상이 되었다.


진화는 멀리서 보면 단순한 가지치기지만,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우연과 선택이 겹쳐진 결과다.


만남 (遭遇)


그러면 '괴발개발이들'은 어떻게 인류의 삶에 들어왔을까?


고양이는 스스로 인간에게 다가왔다.

약 1만 년 전, 중동의 곡식 창고 주변에서

설치류를 잡던 들고양이들이 인간과 동거를 시작했다.

‘선택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다가온 손님’이었다.


개는 더 오래되었다.

약 3만 년 전, 북유라시아의 혹독한 겨울.

늑대가 사냥꾼의 불가로 다가와 남은 고기를 얻어먹었다.

인간은 그 후각과 경계심을 이용했고,

늑대는 인간의 온기를 얻었다.


고양이는 '자유'를 선택했고, 개는 '관계'를 선택했다.

한쪽은 '거리 두기'로, 다른 한쪽은 '헌신'으로 인간 곁에 남았다.


기네스북에 오른 현존하는 가장 큰 개와 가장 작은 개, 각각 그레이트 데인(great dane)종과 치와와종. (출처 AP)


인간은 인종 간 99.9%의 유전자를 공유한다.

하지만 개 품종 간 유전적 차이는 약 27%,

고양이는 약 16%로 보고된다.

인간의 경우 수십만 년에 걸쳐 지구 곳곳으로 퍼져 나가면서 다양한 인구가 섞였고,

개체 간 교류가 많아 유전자풀(pool)이 비교적 균질화됐다.

반면 개는 가축화 이후 인간이 품종을 폭넓게 인위적으로 선택하고 교배하면서,

같은 종 안에서도 매우 다른 형태(크기, 색, 체형, 성격)를 가진 품종들이 급격히 생겨났다.

그 결과, 같은 종 안에서도 그레이트 데인(~70kg)과 치와와(~2.5kg)처럼

성견 기준 무려 30배나 차이가 나는 몸집의 다양성이 생겼다.

인간은 어쩌면 개에게 '자유 연애' 대신 '중매 결혼'을 강요해 온 것이다.

개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매우 인간 중심적이고 폭압적인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과 야생의 늑대는 온순해졌고, 어떤 개는 지지치 않고 썰매를 끌며,

어떤 개는 사냥을 돕고, 또 어떤 개는 그저 귀여움으로 인간의 마음을 달랜다.


이렇게 인간·개·고양이—세 왕국백성들은

서로의 삶 속에서 길들여지고, 조율되고, 함께 진화(co-evolution)해 왔다.

우리가 그들을 길들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 또한 우리를 바꾸어왔다.


바뀜 (變化)


생물학적 변화뿐 아니라 인식과 언어의 진화도 흥미롭다.


고양이과에는 사자·호랑이·표범이,

개과에는 늑대·코요테·자칼이 속한다.

고양이와 개는 그 안에 한 종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전체를 '고양이과', '개과'라고 부를까?


이는 마치 하위 구성원이 상위 범주를 대표하는

'상표의 보통명사화(genericization)'와 비슷하다.

Genericize는 특허가 풀린 복제약을 뜻하는 제네릭(generic)의 동사형이다.

'봉고', '스카치테이프'처럼 특정 상표명이 '일반 명사'가 된 경우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분류학의 창시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 이후 많은 생물학자들이 계통 분류를 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동물부터 이름을 붙이다 보니,

결국 인간은 자신이 보는 세계에서 가장 익숙한 것부터 이름을 붙였다.

인간의 경로 의존적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봉고차, 스카치테이프, Felix the Cat, 경찰견 K-9 (출처 인터넷)



이런 생물학적 분류명은 우리 일상에도 스며들었다.

디즈니의 <Felix the Cat>를 떠올려보자.

주인공 고양이 캐릭터 'Felix'라는 이름은 고양이속()을 뜻하는 Felis에서 유래됐다.

'Feline'/펠라인/과 'canine'/케이나인/은 각각 '고양이나 개와 관련있다'는 형용사이다.

Canine은 송곳니를 뜻하기도 하는데, 발음을 음차해 'K9'이라고 줄여서 쓴다.

경찰견 부대 K-9이나, 용맹하게 무언가를 지키는 서비스 이름에 자주 쓰인다.


언어도 생명처럼 진화한다.

우리말의 접두사 '개-'는 오랫동안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왔다.

'개떡,' '개살구', '개꿈'이 그 예다.

이렇게 그들의 이름을 폄훼하면서, 우리는 과연 그들의 허락을 얻은 적이 있었던가?

다행히 요즘은 '개이득', '개좋아', '개멋져'처럼 긍정의 강조로도 쓰인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어나면서 생긴 인식의 변화일까,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함께 살기 (同居)


고양이와 개, 그리고 인간은 서로 다른 종이지만 같은 class(강, )이다.

학교 같은 반 친구 같은 존재다.

같은 family(과, )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이전에 키우던 '보리'라는 말티즈를 병으로 너무 빨리 보낸 아픔이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우리집 모든 동물들을 아들·딸이 아닌, '친구'라 생각한다.

높은 확률로 그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지독한 자기보호본능이다.

이젠 아빠, 엄마로 키우다 그들을 먼저 떠나보낼 자신이 없다.

"오 친구여, 그동안 즐거웠네. 먼저 가 있게. 곧 만나세나."라고

인사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태도조차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가.

우리는 모두 같은 '생명의 나무'에 뿌리를 둔 한 왕국의 백성들이다.

나무(木) 위에 선을 그어 '본(本)'과 '말(末)'을 나눈 건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본말의 위계는 없다.

'본말전도(本末顚倒)'란 어쩌면,

자연의 연속 위에 선을 그어 스스로를 중심이라 착각한 인간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런 착각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또 오역을 만든다.

더 깊은 울림을 주기위해 의도된 오역이 아니라면,

모든 오역은 단순 실수를 넘어 무지와 몰이해의 결과물이다.

번역가 황석희는 에세이 『오역하는 말들』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상 모든 번역물에는 오역이 존재한다.
국가 공문서 번역본에도, 심지어 성경 번역본에도 오역이 있다.
(중략)
그런데 이런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오역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번역가가 오역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경우.
바로 원작자와 모든 문장을 같이 논의하는 케이스다.


'동물의 왕국'에서 오역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길도 마찬가지다.

동물이라는 원작자들과 모든 문장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논의가 아니라, 삶의 공존으로 이루는 번역이다.


우리 집의 <동물의 왕국>은 여전히 방영 중이다.

치타와 톰슨가젤의 추격전 대신,

개성 강한 다섯 마리의 '괴발이', '개발이'들과 나는

오늘도 서로를 길들이며 산다.

그것이 진화든, 사랑이든 —




* 밀란 쿤데라(Milan Ku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쓸 때

체코어로 쓴 후, 본인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체코어 원제 : Nesnesitelná lehkost bytí

프랑스어 원제 :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 잭 런던(Jack London)의 소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에서 주인공 개 '벅(Buck)'(세인트버나드종)은 야생으로 돌아가 늑대 무리에 합류하며, 그들의 선두에서 달리는 "유령 개"(Ghost Dog)라는 전설적인 존재가 됩니다. 아마도 늑대와 후손을 낳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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