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사람아』 & 『프라하의 소녀시대』

1부 역인과 - 다섯번째 이야기

by 박성봉
· 과거는 고정된 화석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해석되는 살아있는 이야기.
· 문혁과 냉전을 다룬 두 작품에서 역인과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함.
· 독서 노트의 비워둔 여백에 시간이 흐르며 쌓인 생각의 지층과 나이테.
· 우리는 미완성된 책, 의미는 언제나 뒤에서 온다는 역인과의 자유.


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역(逆)한 나의 인생> 연재는 역인과(逆因果)라는 주제로 시작했다.

첫 글 「부모를 키운 것은 첫째」에서는 역행하는 시간에 대한

인지적 착각이 현재를 추동하는 힘을 준다는 것을 강조했다.

「Been there, done that」에서는 카자흐스탄에서의

경험이 현재에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을,

「'던지'하면 '든지'한다」에서는 반추하며 얻는

미래완료형 행복을 다뤘다.

「Hindsight와 Upfront」에서는 과거에 얽매이기 쉬운 역인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리좀'과 '융합입체시' 개념을 제안했다.

이 모든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시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유한하고 삶을 살며 끊임없이 의미를 해석한다.

그런데 시간의 굴레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때,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누군가 물어보아 설명하려 하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시간은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느끼면서도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현재의 깨달음이 과거의 의미를 뒤바꾸고, 미래의 모습이 현재를 견인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을 겪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겪는 순간에는 알지 못한다.

먼 훗날 어떤 결과에 도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과거는 새롭게 해석된다.



나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삶에 작용하는 역인과를 탐색하려 한다.

다이허우잉(戴厚英)의 『사람아 아, 사람아!』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의 『프라하의 소녀시대』다.

두 작품 모두 과거를 되짚는 행위가 전체 서사를 이끈다.

전자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피어난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후자는 동구 사회주의 체제 아래 이방인 소녀들의 정체성 혼란을 다룬다.

나는 일본어를 오래 배워 일본 문학을 읽어왔고,

작년부터 중국어를 공부하며 위화(余华), 모옌(莫言), 옌렌커(阎连科)를 탐독했다.

두 나라 여성 작가의 목소리를 하나는 소설로, 하나는 에세이로 만났다.

그들의 언어를 떠올리며 읽는 맛이 있었다.

러시아어 통역가로 살았던 요네하라 마리의 삶은

카자흐스탄과 일본을 거쳐온 나의 궤적과 겹친다.

돌이켜보면 이 두 작품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이미 내 삶 속 역인과의 작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아...』, 돌고도는 우리 삶


다이허우잉의 소설은 1960~70년대 중국을 휩쓴

문화대혁명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11명의 등장인물이 각자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하나의 진실을 조각난 거울로 비추듯, 각자의 기억은 엇갈리고 충돌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기묘한 먹이사슬 놀이를 이야기한다.


"호랑이가 닭을 잡아먹고,

닭이 벌레를 잡아먹고,

벌레가 몽둥이를 갉아먹고,

몽둥이가 호랑이를 때려잡는 것이다."



가위바위보처럼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 인과의 고리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어제의 혁명가가 오늘의 반동분자가 되고,

오늘의 심판자가 내일의 죄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쑨웨와 허징푸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으나,

허징푸가 '우파'로 낙인찍히며 강제로 이별했다.

그 사이 쑨웨는 열성적인 당 간부 자오전환과 결혼하여 딸 한한을 낳았으나,

이념과 성격의 차이로 결국 파경에 이른다.


20년 후, 세 사람은 다시 만난다.

자오전환(前남편)이 허징푸(前애인)의 집에

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쑨웨는 독백한다.


"나의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방에 있다.

역사와 현실은 영원히 하나의 배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에게 과거는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를 제약하는 힘이었다.

쑨웨의 딸 한한은 부모 세대의 고난을 물려받은 운명에 대해 묻는다.


"역사란 무엇이지?

본 적도 없고 사귀어 본 일도 없어.

그런데도 갑자기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거야."


그녀는 기하학 연습장에 삼각형을 그리며 생각한다.


"점 하나는 단순 그 자체. 점이 두 개면 선이 생기고, 나와 엄마 같아.

하지만 점이 한 개만 더 늘어나도 선은 두 개나 늘어나서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 만일 이 점 하나를 지운다면? 하지만 아버지를 지울 수는 없지."


부모의 역사가 자식의 고통이 된다.

결과가 원인이 되어 엄마로부터 딸에게 전가되고 반복되는 비극적 순환.



반도체 엔지니어로 살면서 나는 정답과 오답,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 익숙했다.

실험 결과는 맞거나 틀렸고,

공정은 성공하거나 실패했다.

서양 자연과학의 선형적 사고방식 속에서

세상을 직선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는 변증법적 순환론은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이전에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지금은 틀렸지만 앞으로 다시 맞을 수도 있다.


호랑이와 닭과 벌레와 몽둥이가 끊임없이 순환하듯,

진리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변화한다.

이런 깨달음은 과거에 대한 집착을 놓고 현재에 집중하게 했다.

쑨웨와 한한의 관계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지만, 동시에 자식으로 인해 진짜 부모가 되어간다.

첫째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하윤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배워갔다.

하윤이를 가르쳤다기보다, 하윤이가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갔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를 만들어가는 상승적 인과관계.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순환이 내 삶에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프라하...』, 유머로 꿰맨 기억과 뒤늦은 진실


다이허우잉이 역사의 무게와 인간 심리에 대한 처절한 성찰을 보여준다면,

요네하라 마리의 에세이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문체 뒤에

신선한 반전을 숨겨놓는 방식으로 그녀의 '소녀시대'를 그려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출판된 순서다.

저자는 1996년, NHK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30년 만에 뿔뿔이 흩어진 옛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 영상 기록이라는 '결과'가 먼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마주한 진실들이 2000년대 초반에

출간된 이 책이라는 '원인'을 탄생시켰다.

나 역시 책을 먼저 읽고 감동하여 유튜브에서 2부작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았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더 보려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저작권 문제로 다시 볼 수 없었다.



요네하라는 일본 공산당원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1959~1964년까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다.

소련 외교관과 공산권 자녀들을 위한 학교는

표면적으로 '사회주의 형제국'의 우애를 강조했지만,

그 안의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조국의 사정과

부모 세대의 비밀을 안고 있었다.

책에는 요네하라와 함께 '4인방'으로 불렸던

세 명의 단짝 친구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그저 재미있는

문화적 차이 정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년이 되어 재회했을 때,

요네하라는 그 명랑했던 소녀들이 각자

숨기고 있던 시대의 무게를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스 출신의 리차는 한 번도 그리스 땅을 밟아본 적이 없으면서도

늘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리스 내전 패배 후

소련으로 도망친 공산 빨치산이었다.

리차에게 그리스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자,

디아스포라의 설움이 응축된 단어였다.


루마니아 출신의 아냐는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아래에서 왔다.

그녀는 사소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서 '거짓말쟁이'라 불렸지만,

그것은 감시와 통제가 일상인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방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냐의 가족이 프라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어린 요네하라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것은 아냐의 아버지가 독재자의 눈 밖에 나 숙청당했음을 의미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 야스나는 명랑한 아이였다.

하지만 유고 내전이 휩쓸고 간 뒤 재회한

그녀는 자신이 '보스니아 무슬림'임을 밝혔다.

티토 치하에서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억눌렸던 민족과 종교의 차이가

결국 서로를 향한 총구로 돌아섰다.

평화로웠던 교실 안에는 이미 훗날의 균열이 숨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었다.

그러나 30년 후, 중년이 된 요네하라가

그들을 찾아가 목격한 현재의 모습을 통해,

과거의 침묵과 거짓말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이 책은 과거가 현재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성숙한 시선이 과거를 다시 발굴하여

비로소 '실재'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도 안 되어

90km 떨어진 다른 도시로 떠났다.

당시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1999년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한두 번 더 만나다 자연스럽게 잊혔다.

유년시절을 공유한 친구들과 기억이 단절되는 것은 슬프다.

분명 나도 몰랐던 그들의 반전이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나 혼자 하는 일방적인 추억일지라도

나는 계속 80년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그 시절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요네하라는 30년 만에 친구들을 찾아가 과거를 완성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 그 시절을 계속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나의 폴례(поле), 비워둔 여백이 만든 시간의 지층


요네하라가 기억하기로

당시 러시아어 공책에는 '폴례(поле)'라 불리는

빨간 선으로 구분된 여백이 있었다.

선생님은 "한번 쓴 글은 도끼로도 못 깎아낸단다"라고

쓸 때 잘 생각하라 강조했다.

이는 한번 지나간 삶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은유였다.

요네하라 마리가 말한 '폴례'는 나의 독서 노트에도 존재한다.

나는 책을 읽고 기록할 때 의도적으로 작은 공간을 비워둔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 노트를 펼쳐

스탈린이 자신이 읽던 책 여백에 남긴 메모

'파메트키(пометки)'처럼 주석을 단다.


옛 소련 시절 노트와 빨간선으로 구분된 영역인 폴례(поле), 내 독서 노트의 여백에 계속 덧붙인 파메트키(пометки).


처음 읽었을 때의 감상 옆에 현재의 시선으로 새로운 해석을 덧붙인다.

과거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겹쳐지며 지층이 쌓이고 나무의 나이테가 생긴다.

비워둔 여백이 있었기에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고,

그때는 보이지 않던 문장의 의미를 지금의 언어로 다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방법을 시작한 것은 3년간 1,200권이 넘는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써놓은 노트를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또 봤다.

그러면 나는 변했고, 그래서 내 머릿속에 있는 책의 내용도 변했다.

아니, 책은 그대로인데 나의 폴레가 채워지면서 책이 다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나의 삶 또한 끊임없이 낯선 곳으로 나를 던지는 과정이었다.

2000년대 초반 카자흐스탄 알마티, 미국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그리고 2019년 다시 한국의 회사로 복귀하기까지.

나는 익숙한 환경에 안주할 만하면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마주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방인이 되었고, 당연했던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봐야 했다.

솔직히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뒤돌아보니, 그것은 나의 거대한 '역인과'였다.


그때 나를 지치게 했던 긴장과 피로감은 단순한 소모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근육 운동처럼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시간이었다.

낯선 환경에 노출되었던 그 시간들이 원인이 되어,

지금의 나는 세상을 더 유연하고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근력을 갖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며 느꼈던 언어의 벽,

일본에서 반도체 연구를 하며 체득한 장인정신,

미국에서 다국적 환경 속에 살며 익힌 유연함.

그것들은 당시에는 흩어진 파편이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렌즈가 되어 중국 문학을 읽고

요네하라의 삶에 공감하는 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삶은 앞에서 보면 혼란스럽지만,

뒤에서 보면 필연적인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의미는 언제나 뒤에서 온다


『사람아 아, 사람아!』와 『프라하의 소녀시대』,

그리고 나의 지난 여정은 결국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인간은 살아낸 뒤에야,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알게 된다."

다이허우잉의 인물들은 시대의 광기 속에서도

그 고통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증명해냈다.

자오전환은 편지에 쓴다.


"잘못 든 길은 다시 고쳐 걸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마음은 돌이킬 수가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소녀들은 이념으로 갈라진

지도 위에서 우정과 유머로 국경을 지웠다.

다이허우잉이 과거의 상처를 직시하며 현재를 구원하려 했다면,

요네하라는 과거의 기억을 유머로 감싸며 현재를 풍요롭게 했다.

두 작가 모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역인과적인 행위다.

내가 오늘 이 두 권의 책을 빌려 나의 카자흐스탄과 일본,

미국 생활을 회고하는 것 또한, 흩어져 있던 과거의 점들을

연결하여 현재라는 별자리를 만드는 작업이다.

과거는 고정된 화석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느냐에 따라

과거는 비극이 되기도 하고 희극이 되기도 하며,

상처가 되기도 하고 훈장이 되기도 한다.

쑨웨가 아픔 속에서 인간을 다시 세웠듯,

요네하라가 흩어진 친구들을 찾아 자신의 유년 시절을 증명했듯,

나 또한 나의 경험이라는 잉크로

—도끼로도 깎아낼 수 없는— 나만의 '폴레'를 채워가려 한다.


우리는 모두 미완성된 책이다.

이미 쓰인 장들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장들이 전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아직 쓰이지 않은 다음 장에 달려 있다.

역인과란 결국 과거를 현재의 눈으로 다시 읽어내는 용기이자,

미래를 향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자유다.






『사람아 아, 사람아!』를 번역한 故 신영복 교수의 문체와

당신의 삶이 겹쳐진 내용이 읽는 내내 깊은 울림을 주었다.

신영복 선생의 다른 작품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추천한다.


요네하라는 안타깝게도 2006년 56세에 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에 번역된 그녀의 다른 책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특히 『미식견문록』, 『팬티 인문학』을 추천한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