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자음, 사람의 소리
보고 싶은 선생님께,
88년 6학년 1반 반장 박성봉이에요.
기억하시나요?
그해 처음 부임하셔
우리 반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은
모범생인 저를 무척 아껴주셨죠.
미루나무 끝에 흰 구름 걸린 초여름
가정방문 오신다는 게 얼마나 청천벽력 같던지요.
소똥 냄새 배어 있는 구더기 밑살 같은 살림이
어린 마음에도 창피했죠.
가는 길 굳은 제 표정 보셨는지
"손가락 당겨 봐" 하시더니
'뿡' 터진 방귀에 깔깔 웃으며
어느새 도착한 집
일 나간 어머니가 타 놓은 미숫가루를
냉장고에서 꺼내 드렸죠.
그때 선생님 얼굴엔 이런 마음이 읽혔어요.
'가난한 환경에서도 구김없이 컸구나'
* "구더기 밑살같은 살림"은 박완서作 『도시의 흉년』에 나온 표현.
* 축사겸 가정집 구조는 이전글 참고.
https://brunch.co.kr/@sungbongpark/128
인기 많던 멋쟁이 선생님.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우리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하셨죠.
과학실에 다 같이 모여 숨죽여 본
<스릴러> 뮤비는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7월초 156번 버스 타고 구파발로
또 3호선 전철 갈아타고 간 중앙박물관.
지금,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헐렸지만
추억은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창경궁 옆 국립과학관.
흑백TV 두 대 연결된 화상전화기가 마냥 신기했죠.
지금 선생님과 연결될 전화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월이 지나 딸아이 손잡고 다시 찾았습니다.
선생님이 열어주신 그 넓은 세상을,
이제는 제 딸에게도 선물하려 합니다.
* 1983년 12월 발매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뮤직비디오.
졸업식 날 상장도 받고 사진도 찍었죠.
헤어짐이 아쉬우셨는지 봄방학 때
선생님 본가 전주로 여행을 데려가 주셨습니다.
오락실 게임도 하고
폭력적인 영화도 같이 봤죠.
그러다 봄 햇볕에 눈 녹듯
제 초등학교 기억은 조금씩 잊혀 갔죠.
몇 년 전 생활기록부를 뽑아보고는,
선생님의 코멘트에
그만 눈물이 터졌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총명한 어린이"
35년 만에 열어본 타임캡슐.
선생님과 함께한 1년이
제 인생의 봄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주눅 들지 않게,
단단한 아이로 키워주신 그 마음.
어떻게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만나러 가요. 따스했던 봄날로.
* 돌프 룬드그렌 주연의 <레드 스콜피온>.
* 생활기록부 정부24 홈페이지에서 조회 및 발급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