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자음, 사람의 소리
4학년 같은 반에 민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이 에웨싸고 놀려댔다.
"민이는 만날 누나랑 같이 목욕한대요~ 목욕한대요."
그때 나는 '누나랑 같이'라는 대목보다
'매일' 목욕한다는 게 더 놀라웠다.
시골에 살던 우리에게 목욕은
설날에나 한 번 할까 말까였으니까.
하윤이가 아기일 때 목욕은 내가 많이 시켰다.
그때부터 물을 좋아하더니 지금도 수영엔 진심이다.
지금은 사진 몇 장만 남았지만
그 시간들은 내게 공감각으로 남아있다.
향긋한 비누 냄새,
꺄르르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복숭아처럼 매끌거리는 피부 촉감.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그 순간이 그립다.
망막 수술을 받은 눈은 괜찮아졌는데,
다른 한쪽은 오히려 비문증이 심해졌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나에게만 보이는 날파리들.
"시력에는 문제없으니 적응될 때까지 기다려보시죠."
괜히 비문증을 잡겠다고 수술하다 후유증이 생기면
모기보고 칼을 뽑는 견문발검(見蚊拔劍)이 될 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움직일 때마다 눈 안에 먹구름이 소용돌이 치는 걸.
"선생님, 도와주세요. 정말 너무 힘들어요."
고민 끝에 허락하신 선생님.
왼쪽 눈도 수술을 받았다.
더운 여름, 씻지 못한 일주일.
시야를 가리던 날파리들이 사라졌다.
눈앞이 맑게 개이니 새 세상이 열렸다.
* 비문증: 노화로 유리체가 변해 눈앞에 점이 떠다니며,
대부분 자연 적응하나 망막열공 등 병적 원인이라면 레이저 치료가 필요함.
하늘 높은 가을날,
하추리 도리깨 축제
키 큰 아버지가 농기(農旗)를 잡고
풍물패를 이끈다.
메기고 받고 구성진 소리와 함께
어머니도 도리깨를 짊어지고 뒤따른다.
도리깨질, 키질, 절구질, 떡매질이
차례차례 이어지고 고소한 인절미가 나눠진다.
늙수룩한 아들은 더 늙은 부모의 재롱을 놓칠세라,
두 눈 반짝이며 카메라에 담는다.
42년 전 가을 운동회 전날.
어머니는 파란 깨끼 배자에
정성껏 동정을 달아주셨다.
그리고 짝꿍과의 꼭두각시 놀음에 함박 웃음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그날 모래 자루를 번쩍 들어올리며 힘자랑을 하셨다.
아들은 웃고 있는데 속절없이 슬프다.
* 13회 하추리 마을 도리깨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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