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우리 10km 신청했냐?"

서울 K-마라톤 대회 2026 (feat. 휴재공지)

by 박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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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K-마라톤 대회


대회 전날 저녁,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 침대 위에 펼쳐놓는다.

이번에 입고 갈 것은 데카트론 타이츠 쇼츠(일명 쫄바지)와 싱글렛(일명 난닝구).

위아래 모두 검은색으로 깔맞춤했다.

싱글렛 앞에는 옷핀으로 배번표를 반듯하게 붙여놓는다.

아디다스 아디제로 프로4,

루디프로젝트 스핀쉴드 변색렌즈 고글,

자외선 방지용 선패치도 빠짐없이 가방에 챙겼다.

MBTI가 J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이런 귀여운 '준비 강박'이 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알람에 맞춰 새벽 5시 반에 눈을 떴다.

광화문행 광역버스 안에는 이미 참가자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코스를 따라 도로 통제가 시작된 상태라, 우리는 명동 근처에 내려 대회장까지 걸어갔다.

세종대왕 동상 근처에는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나도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겼다.

출발 전 화장실에 가려니 남녀 할 것 없이 줄이 너무 길다.

이렇게 큰 대회에 간이 화장실 칸이 몇 개 없는 것은 못내 아쉬웠다.

결국 몸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하프 A그룹이다.

마스터스 참가자들이 먼저 출발하고, 이어 7시 35분쯤 출발선을 지났다.

통과와 동시에 가민 포러너 165의 시작 버튼을 누른다.

오늘의 음악은 마라톤 최적의 케이던스에 맞춘 180bpm.

시청, 숭례문, 청계천을 따라 평소라면 차들에게 내주었을 도심 한가운데를 두 발로 달린다.

서울 이곳저곳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DDP를 따라 한 바퀴 돌 때는 난생처음으로 그 외관을 제대로 감상한 것 같았다.


대회 내내 안정된 심박으로 5분 10초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하지만 10km 구간을 넘어서자 서서히 오른쪽 발바닥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달릴 때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통증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더 큰 부상을 막기 위해 몸이 보내는 경고음이기 때문이다.

통증의 원인을 가늠하며 자세를 미세하게 교정해 보았다.

발바닥 통증이 가라앉는 대신 왼쪽 발목으로, 다시 오른쪽 고관절로 뻐근함이 옮겨갔다.

그 신호를 무시한 채 무작정 달렸다면, 완주가 힘들었거나 대회 뒤 큰 부상으로 고생했을 것이다.

컨디션도, 코스도, 날씨도 좋아 내심 PB(Personal Best)를 기대했지만,

작년 기록보다 1분 늦은 1시간 49분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기록 강박'은 자칫 부상으로 이어진다.

매년 기록이 조금씩 늦어지는 것을 이제는 자연스레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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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이번 대회에서 보고 느낀 몇 가지를 돌아본다.


먼저 훌륭했던 대회 운영을 칭찬하고 싶다.

올해부터 YMCA 서울 마라톤이 '서울 K-마라톤 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 3월 22일 예정이었으나, 전날인 21일 광화문에서 BTS 컴백 공연이 열리는 바람에

한 주 밀려 29일에 개최되었다.

코스, 이동 동선, 중간 급수와 간식 모두 나무랄 데 없었다.

특히 대회 중 플라스틱 용품 사용을 금지하고,

우비나 쓰레기를 무단 투척하면 실격 처리한다는 공지가 인상적이었다.

물품 보관 봉투 역시 생분해성이었다.

환경을 향한 주최 측의 진심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쓴 사람들도 많았다.

광화문 광장에서 깃발을 들고 안내하던 자원봉사자들, 코스 내내 함께 달린 페이스메이커들.

본인은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면서도 참가자들의 페이스를 위해 풍선을 매달고 달리는 이들이다.

의료 지원 풍선을 맨 러너도 있었는데, 우연히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한참을 함께 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에 남은 건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 러너였다.

가이드의 손과 시각장애인 러너의 손목을 이어주는 짧은 끈, 'trust string'.

그 끈이 만들어내는 연대는 뭉클했다.


대회에 나가면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다른 러너들의 장비 구경이다.

옷, 고글, 그리고 가장 눈길이 가는 신발.

3년째 대회에 참가하다 보니 그해 인기 있는 제품의 흐름이 보인다.

올해는 고수들 사이에서 아디다스의 점유율이 눈에 띄게 높았다.

내가 신은 아디제로 프로4도 꽤 많이 보였다.

30만 원대의 카본화로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탄성과 쿠션감이 좋아 대회용으로는 이만한 게 없다.

나도 1년째 만족스럽게 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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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D — Long Slow Distance (천천히 멀리)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선릉 근처 '서울 클럽 K' 찜질방으로 향했다.

여기도 또 'K'다.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에 몸을 불리고 세신을 받았다.

내부에는 널찍한 테이블에서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오후 2시쯤 합류할 아내와 딸을 기다리며, 미뤄뒀던 브런치 연재 글을 썼다.

마라톤 땀을 빼고 목욕까지 마친 뒤라 그런지 유독 글이 잘 써졌다.


지난겨울부터 꾸준히 연재 글을 써왔다.

늘 3주 치 글을 미리 예약해 두는 식으로 여유를 확보했는데, 설날 연휴,

일본 가족 여행, 최근 부쩍 바빠진 회사일로 그 버퍼를 조금씩 갉아먹고 말았다.

독자와의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는 '시간 강박'.

글쓰기에 지쳤다기보다는 강한 책임감 때문이었지만,

평일에도 글감을 고심하느라 정작 가장 소중한 독자들의 댓글에 답글조차 달지 못했다.

한번 놓치니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완벽하지 않을 바엔 시작조차 하지 않는, 전형적인 완벽주의자의 습성이다.

언젠가 도전할 풀코스 마라톤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페이스를 조절해야 할 때다.


준비 강박, 기록 강박, 시간 강박을 모두 내려놓고,

마라톤이 가르쳐준 '천천히, 멀리 가는 지혜'를 되새길 때다.




사실 이번 대회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10.5km 코스와 하프 코스 참가자들이 함께 달리다가

청계천 광교(廣橋) 근처에서 코스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자원봉사자들이 경광봉을 흔들며 외치고 있었다.

"10.5km는 왼쪽입니다!"

그때 내 앞을 달리던 20대 남자 참가자 무리 중 한 명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우리 10km 신청했냐?"


나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달리면서 크게 웃음이 났다.

자기가 무슨 코스를 신청했는지조차 모르고 달리는 그 유쾌함이 부러웠다.

강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저 자유로움이라니.

글쓰기도 즐거워야 한다.

독자들과 나누는 소통의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한 주쯤 쉬면 좀 어때!'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고 쿨하게 한 템포 쉬어가면 그만이다.

나를 조이던 강박에서 한 걸음 벗어나 홀가분해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번 하프 마라톤이 내게 걸어준 가장 값진 완주 메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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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꽃구경하며 여유를 가져보려 합니다.

그동안 밀린 댓글에 답글도 달고요.

이번 주 〈300자면 충분해〉, 〈한자 모아 한글〉, 〈역한 나의 인생〉은 쉬어갑니다.

4월 13일, 다시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봄바람과 함께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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