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 탓"이라고요? 국민연금은 4년간 234조를 더 투자했습니다
2025년 하반기,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기며 고공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외환당국과 한국은행은 이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서학개미"를 지목했습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외국인이 국내로 들여오는 돈의 4배 수준이 해외로 나가고 있다"며 해외증권투자가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고 말했죠.
그런데 정말 개인투자자만의 문제일까요?
숫자를 들여다보면 다른 이야기가 보입니다. 2025년 1~3분기 기준, 국민연금을 포함한 '일반정부'의 해외 주식 투자는 245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92% 증가했습니다. 반면 개인투자자를 포함한 '비금융기업등'의 투자는 166억 달러로 74% 증가에 그쳤습니다.
국민연금이 개인투자자보다 더 공격적으로 해외 투자를 늘린 겁니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은 지난 몇 년간 해외에서 어떤 주식을 사 모았을까요? 국민연금공단이 공시한 2020년부터 2024년까지 5년간의 해외주식 투자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먼저 전체 규모를 살펴보겠습니다.
2020년 말, 국민연금의 해외주식 투자 총액은 189.5조원이었습니다. 당시 투자 종목 수는 3,463개였죠. 그런데 2024년 말이 되자 이 숫자가 424조원으로 불어났습니다. 4년 만에 234조원이 늘어난 것입니다.
2022년은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해입니다. 미국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글로벌 증시가 폭락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민연금은 이 시기에도 포지션을 유지했고, 2023년부터 본격화된 AI 랠리의 수혜를 온전히 누렸습니다.
더 눈에 띄는 건 Top10 집중도입니다. 2020년 14.2%였던 상위 10개 종목의 비중이 2024년에는 23.8%로 치솔았습니다. 국민연금이 점점 더 소수의 빅테크에 베팅을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국민연금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단연 NVIDIA입니다.
2020년 말, NVIDIA는 국민연금 해외주식 포트폴리오에서 19위에 불과했습니다. 투자액은 약 1조원, 전체 비중은 0.54%였죠. 그 당시만 해도 NVIDIA는 "게임용 그래픽카드 회사" 정도로 인식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2024년 말, NVIDIA는 2위로 뛰어올랐습니다.
4년간 성장률은 +1,638%. 투자 증가액으로 따지면 약 16.9조원입니다.
2022년 순위가 8위에서 15위로 떨어진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 해에 NVIDIA 주가는 연초 대비 50% 이상 폭락했거든요. 그러나 국민연금은 이 시기에도 NVIDIA를 팔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2023년 ChatGPT 출시 이후 AI 인프라 수요가 폭발하면서, 국민연금은 엄청난 수익을 거뒌습니다.
이것이 장기 투자자의 힘입니다. 단기 변동성에 흔들리지 않고 포지션을 유지했기에 AI 붐의 최대 수혜를 누릴 수 있었던 거죠.
2024년 Top 10 종목을 2020년과 비교하면, 국민연금의 투자 철학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2020년 Top 10에는 있었지만 2024년에 사라진 종목들:
Tencent (8위 → Top 30 밖)
Alibaba (10위 → Top 30 밖)
4년 전만 해도 Tencent와 Alibaba는 각각 1.8조원, 1.6조원 규모로 Top 10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2024년, 이 두 중국 빅테크는 상위권에서 완전히 밀려났습니다.
왜일까요?
첫째, 미중 갈등입니다. 중국 기업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강화되면서 투자 리스크가 커졌습니다.
둘째, 중국 정부의 빅테크 규제입니다. 2020년 말 앤트그룹 IPO 무산을 시작으로 중국 당국은 자국 테크 기업들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를 시행했고, 주가는 고점 대비 반토막이 났습니다.
국민연금은 이런 지정학적 리스크를 빠르게 반영해 포트폴리오를 조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새롭게 Top 10에 진입한 종목도 있습니다. Broadcom은 2020년에는 상위 100위권에도 들지 못했지만, AI 서버용 네트워킹 칩 수요 폭발로 2024년 9위까지 치고 올라왔습니다. 4년간 성장률 +1,260%, NVIDIA 못지않은 성과입니다.
국민연금 해외주식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한 가지 우려가 생깁니다.
전체의 91%가 미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미국 주식이 글로벌 시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빅테크 기업 대부분이 미국에 있으니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환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는 대부분 환헤지 없이 이뤄집니다. 매년 수십조 원의 달러 매수가 발생하면 원화 가치는 하락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서학개미 탓"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현상을 국민연금이 훨씬 큰 규모로 만들어내고 있는 셈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국민연금은 지난 4년간 해외주식 투자를 189조원에서 424조원으로 늘렸습니다. 연평균 22% 이상의 성장률입니다. 특히 NVIDIA, Broadcom 등 AI 관련 종목에 대한 과감한 베팅은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424조원의 91%인 385조원이 미국 주식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우려됩니다. 이는 단순히 포트폴리오 리스크 문제를 넘어, 원화 환율에 지속적인 하방 압력을 주는 구조적 요인이 됩니다.
환율 상승을 "서학개미 탓"으로 돌리기 전에, 우리는 이 숫자를 기억해야 합니다.
2025년 1~3분기 해외주식 투자 증가액:
국민연금 등 일반정부: 245억 달러 (+92%)
개인투자자: 166억 달러 (+74%)
누가 더 많은 달러를 사들이고 있는지는 명확합니다.
국민연금공단 해외주식 종목별 투자 현황 공시 (2020~2024년 말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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