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대체되지 않는 인간의 조건

AI가 못 하는 일을 정의하기

by 성대리

아마 AI를 업무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분이라면, 비슷한 순간이 올 겁니다. 처음엔 신기하고, 그다음엔 편하고, 그러다 문득 묘한 위기감이 찾아옵니다. 이번 편은 그 위기감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지난 두 달을 돌아봤습니다.

AI가 한 일과 제가 한 일을 나눠보니, 의외로 선명하게 갈렸습니다.


투자 봇에게 "이 종목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면 뉴스를 긁어와서 정리는 기가 막히게 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사야 해, 말아야 해?"라고 물으면 양쪽 의견을 병렬로 늘어놓기만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답을 하긴 합니다. 다만 그 답을 믿고 돈을 넣을 수 있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매번 최종 판단은 제가 내렸고, 그 판단의 책임도 제가 졌습니다. 솔직히 그게 무겁긴 했지만, 동시에 "이건 AI가 못 하는 일이구나"라는 안도감도 있었습니다.


1111.jpg 수집과 실행은 AI, 판단과 설계는 사람이

정리하고 나니 뚜렷했습니다.

AI는 "어떻게"를 잘하고, 저는 "왜"와 "무엇을"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느낌만이 아닙니다.

2025년,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흥미로운 연구가 나왔습니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등록된 19,000개 업무를 전수 분석해서,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 고유 역량을 추려낸 겁니다.


연구진이 붙인 이름은 EPOCH.

공감(Empathy), 현존(Presence), 판단(Opinion), 창의성(Creativity), 희망(Hope)의 앞글자입니다.

다섯 가지 전부 중요하지만, 이 시리즈의 경험과 직접 맞닿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판단: 데이터 너머의 결정

연구진이 든 사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참정권이나 시민권 운동은 당시 데이터로 보면 "비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여론도, 통계도 반대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데이터가 뭐라 하든, 원칙적으로 이게 맞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AI는 이런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확률이 낮으면 낮다고 말할 뿐입니다.

제 투자 봇도 똑같았습니다. 시장 분위기가 부정적일 때 봇은 "부정적 의견이 우세합니다"라고 정리해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보고도 "지금이 오히려 기회 아닌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런 배짱이 들어간 판단 자체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창의성: 질문을 바꾸는 힘

AI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하지만 그건 학습 데이터의 재조합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6편에서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만든다"고 썼는데, 그 질문 자체를 만드는 건 여전히 사람의 영역입니다.


봇에 이름과 역할을 붙여줬을 때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IT 뉴스 봇", "투자 분석 봇"으로 나누자 성능이 확 올라갔습니다. 그 구조를 설계한 건 저였습니다. AI한테 "너 스스로 역할을 나눠봐"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나누긴 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렇게 나누면 효과적이겠다"는 직관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희망: 그래도 해보는 것

EPOCH에서 가장 의외였던 항목입니다.

근거가 부족해도 "될 거라고 믿고 시작하는 것"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역량이라니. 처음엔 좀 추상적으로 느껴졌는데, 돌아보니 이 시리즈 자체가 그랬습니다


처음 AI 에이전트를 세팅했을 때, 솔직히 될지 안 될지 몰랐습니다. 엉뚱한 답이 돌아오고, 설정은 복잡하고, "이거 내가 직접 하는 게 빠르지 않나?"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9편에서 쓴 것처럼 AI가 틀리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쓸 만해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피드백을 줬습니다. AI는 스스로 "좀 더 해볼까"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포기할지 계속할지를 결정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가지, 공감(Empathy)과 현존(Presence)도 짧게 짚겠습니다. AI가 "힘드시겠네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힘든 적이 없는 존재의 위로와 같은 일을 겪어본 사람의 위로는 무게가 다릅니다. 간호사가 환자의 손을 잡아주는 행위, 기자가 현장에서 분위기를 읽는 감각처럼, 그 자리에 물리적으로 있어야만 전해지는 가치도 AI의 영역 밖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조합의 문제입니다

업계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AI가 당신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AI를 쓰는 사람이 당신을 대체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좀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를 쓰면서 뒤집어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한 일을 보면, AI에게 수집을 맡기고, 정리를 맡기고, 감시를 맡겼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판단, 설계, 질문, 피드백에 시간을 쓸 수 있게 됐습니다. AI가 빼앗아간 게 아니라, AI 덕분에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게 된 겁니다. MIT 연구진의 결론도 같았습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한다."


444.jpg 사람과 AI는 경쟁이 아니라 역할 분담을 하는 것


수집과 정리는 AI가 하고, 공감과 판단과 창의는 사람이 한다.

이 조합이 맞을 때 혼자서는 절대 낼 수 없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남는 것


9편에 걸쳐 AI 에이전트를 만들고, 키우고, 실패하고, 다시 고쳤습니다. 돌이켜보면 가장 큰 변화는 AI가 아니라 저 자신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전에는 뉴스 읽고, 데이터 정리하고, 보고서 만드는 데 하루의 대부분을 썼습니다. 지금은 그 시간에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게 뭘까", "다음엔 뭘 해볼까"를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쪽이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더 재밌기도 합니다.


AI는 도구입니다. 아무리 똑똑해져도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게 정말 맞는 방향인가"를 묻는 건 사람의 몫입니다. 질문하는 능력, 맥락을 읽는 감각,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결정을 내리는 용기. 이것들은 AI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귀해집니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의 불안은 이제 없습니다. 대신 한 가지 확신이 생겼습니다. AI를 두려워하는 대신 도구로 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AI가 못 하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 그게 이 시대에 대체되지 않는 조건입니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고, 직접 만들어보신 분이라면 이미 그 길 위에 계신 겁니다.



출처

MIT Sloan, "These human capabilities complement AI's shortcomings" (2025) - https://mitsloan.mit.edu/ideas-made-to-matter/these-human-capabilities-complement-ais-shortcomings

Isabella Loaiza, Roberto Rigobon, "The EPOCH of AI: Human-Machine Complementarities at Work", SSRN (2024) -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5028371

CIO Korea, "2026년,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AI의 현실이 드러나는 해" (2026) - https://www.cio.com/article/4115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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