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질문은
대개 가볍게 시작된다.
안부를 묻는 말처럼,
농담처럼,
혹은 걱정해주는 얼굴로.
너 정도면 괜찮지 않니?
그 말이
내가 괜찮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그 문장 안에는
이미 여러 기준이 들어 있다.
결혼은
사람 하나만 괜찮다고 해서
결정되는 일이 아니다.
타이밍이 있고,
환경이 있고,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방향이 맞아야 한다.
나는 내가
조금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것도 안다.
모든 상황에서
유연함을 미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기준에서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이
쉽지 않았다는 것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이상한 건
그 다음부터다.
나는 출산 정책을 지지한다.
출산휴가를 쓰는 동료의 업무를
대신 맡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조기 퇴근이나
정부·지자체 지원으로
나보다 적게 일해도
생활의 안정성을 보장받는 제도에 대해
손해를 본다고 느껴본 적도 없다.
누군가는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고,
나는 그 공백을
잠시 메우는 쪽에 서 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반응은 늘 비슷하다.
착한 척하는 거 아니야?
억울하지도 않아?
나는 싫던데.
내 생각은
존중받기보다는
의심받는다.
선택이 아니라
태도로 평가된다.
그러다 문득
이야기가 뒤집히는 순간이 온다.
내 자식이 그런 상황이면
당연히 그 혜택 받아야지.
...?
그 말 앞에서
잠시 말이 멎는다.
방금 전까지
불편하다고 했던 제도는
자기 자식 앞에서는
당연한 권리가 된다.
이건 의견 차이라기보다
잣대의 방향 문제처럼 느껴진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결혼의 장점을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결혼은 무조건 해야한다,
안해봐서 니가 모르는 거다라고 하던 사람.
자기 자식이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중요하지.
...?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질문이 생긴다.
왜 나는
해야 하는 쪽에 놓이고,
네 자식은
선택해도 되는 쪽에 놓이는 걸까.
왜 남의 삶에는
의무가 먼저 나오고,
자기 자식의 삶에는
자유가 먼저 오는 걸까.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제대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결혼했고,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고,
아이들과도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 앞에서 나는
아직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
조금은
설명해도 소용없는 사람처럼
자리가 정해진다.
너는 몰라.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대화 속에서는 분명히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점점 말을 줄인다.
설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명해도
결론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거리를 둔다.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내 선택이
계속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자리에
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서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멀어지고 나니
마음은 조금 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혼자다.
이 말이
패배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숨이 트인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 사회를 지지하기로 한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을 존중하고,
돌봄을 책임지는 선택을
당연하게 보호하고,
누군가의 삶이
조금 덜 흔들리도록
조용히 힘을 보태는 쪽을.
결혼하지 않았다고,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이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나는
남의 삶에는 의무를 요구하면서
자기 자식에게만 자유를 허락하는
그 이중적인 기준에는
더 이상 맞추지 않기로 한다.
대신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조금은 시끄럽게,
조금은 단단하게
이 사회를 지지할 생각이다.
이게 지금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