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직원들 모두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날은제가 당직을 서는 날이라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문을 닫고 회사를 순찰하고 있던 중이었죠. 그런데 셔터 넘어 한 남자가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에 회사 밖에서 안을 살펴보면서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이 일상적이지는 않죠. 그런데 그 남자가 절 보더니 이야기를 걸어왔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부탁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예? 무슨 일이시죠?”
“제가 내일 이 회사에 입사 면접을 보거든요. 그래서 그 전에 회사를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사무실을 들어가서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속으로 잠시 망설였지만 전 그의 요청을 들어 주기로 했습니다.
“회사 안이 이렇게 생겼군요.” 그는 잠시 둘러 보면서 혼자 감탄을 했습니다. 그리곤 감사하다고 90도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돌아서는 그에게 내일 면접에 행운이 있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깍듯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합격해서 회사에 들어왔음을 알았습니다. 시간을 두고 그를 알아가다 보니 그는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업의 경영자를 향한 충성심이 너무나 대단해서 단기간 내에 그분의 수족처럼 움직이며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저는 리더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사람이 결국에는 위험한 존재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구요? 사람은 이유 없이 충성하지 않습니다. 크고 대단한 충성일수록 크고 대단한 권력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상단의 리더 주변에서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대부분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는 경우가 흔하며 그들 중에 또 대부분은 그렇게 얻은 절대적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신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위에서 리더가 보는 사람과 아래에서 직원들이 보는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지만 그 차이가 큰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 차이가 크다면 직원들의 마음과 관점을 리더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최상단의 리더는 그 아래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조직과 직원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즉, 그들이 필터로서 작동하는 것이죠. 그 필터가 투명하지 않다면 리더가 보는 것들이 정확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이유로 모든 면에서 내 입맛에 딱 맞게 움직여 주는 충성파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로 인해 당신의 눈은 실상을 실상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충성은 결국 그들의 사심의 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당신이 보는 것이 결국 일부 사람의 사심 가득한 시각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다시 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한 부서의 책임자로 올라갔고 그후로도 잘 나갔습니다. 하지만,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가 너무 갑질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CEO와 CEO가 인정하는 리더들에게 하는 그의 행동은 비굴할 정도로 깍듯했지만 다른 직원들에게는 너무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죠. CEO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결국 알아채고 그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중요(重要)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리더십이란 리더 스스로도 조직에 헌신을 하며 그런 사람을 키우는 것이지 리더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키우는 리더를 우리는 리더십의 사심이라 불러야 할 것이며 사심 가득한 리더십은 결국 조직을 망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