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과 영원을 너에게

by 성화

담비에게


사람들은 내리기 시작한 눈을 동시에 바라봐. 바깥에서 본다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수많은 한 쌍의 눈들이겠지. 우리는 그 순간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껴. 지구상의 모두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무의식의 그 감각은, 흐물꾸물하고 포근하고 차가운 종류의 것이야. 나는 그것을 영원이고 순간이라 불러.


눈은 시간을 멈춰. 아주 또렷하게 보게 하지. 이를테면 눈앞의 네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해.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 순간에 나는 가족과 함께 있다, 강아지 발이 춥진 않을까, 조심 운전해야 할 텐데, 아주 차갑고 축축해질 저걸 너에게 던지고 싶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후순위인 많은 것을 다시 빛나게 하지.


모든 감정은 시간의 축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또 사라졌다 새로워졌다 해. 시간이 사라지고 나면 같이 사라져버리는 그것이 어찌나 덧없는지, 어찌나 한순간인지. 그런데 요 며칠 눈이 왔잖아. 눈에는 정말로 시간의 축을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니까? 그 순간을, 액자 틀 속에 가둬버리는 그런 성질 말야. 프레임 안에 들어간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천박한 모든 것들과 정반대의 것이 돼. 눈이란 세상을 그렇게 보게 해.


여기까지 쓰고 나니 조금 웃긴다. 시간은 원래 누구의 것도 아니잖아. 오직 그 시간만의 것이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지, 그것이 본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임을. 그리고 시간과 함께 이 시간의 우리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너도 알아.


점점 더 어려워져. 그 시간을 함께 해달라는 부탁이 점점 더. 당신의 이게 싫어, 이것의 네가 좋아, 다이빙대에 서고, 뛰어내리고, 받아주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관계들을 너무 많이 지나쳐왔나 봐. 이제 나는 시절인연, 기간제 베스트 프렌드 따위의 말들을 배웠어. 30대의 나는 운명의 수레가 데려다 준 곳의 이들을 받아들이고 또 보내주면서 너덜너덜해지고 있어. 존재의 반경 아주 가까운 곳에 반복적으로 생채기가 나왔기 때문에, 같이 있어 달라는 뛰어내림의 고백은 고사하고 있지.


담비야, 나는 바보같이 너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너의 우물쭈물함은 나를 곁에 둘 마음이 없어서라고만 생각했어. 나는 늘 뛰어내리는 쪽이고, 이 영원을 순간으로, 저 액자 안으로 새겨넣을 순간을 오퍼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뛰어내리는 이에게 용기를 주고 용감함을 받아낼 역할도 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어제 무섭게 내리는 눈을 보며,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차 속에서 나는 아득한 찰나를 느꼈어. 그리고 뛰어내릴 용기가 너에게도 매우 비싼 값이겠구나 했지. 지금 이 시간도 낭비해선 안 될 리즈시절인 걸. 조금의 용기를 내서 절벽과도 같은 다이빙대에 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아져. 내가 아래에서 허튼짓하지 않고 너를 꼭 안아내보겠다는, 안일하지 않은 다짐을 했어. 너도 같은 마음이라면 좋겠다.


이 편지가 옷장 속에서 나오는 날을 기다리며,

성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