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삽질

3월, 올해의 마지막 다짐

by 성화

요 몇 달 몸, 마음, 머리가 조금씩 아프다. 펼친 책은 많고 완독한 책은 별로 없는 시간들. 시작과 다짐은 많지만 마무리를 잘 못하는 모양으로 연초를 다 보낸 것 같다. 시험 기간마다 B4 그리드 공책에 7주, 8주 남은 시험 플랜을 잔뜩 세우고 끝까지 공부를 못하곤 했던 기억이 반복 재생된다.


의사라는 직업이 종종 기이하게 느껴진다. 환자를 고친다는 본질이나 신분 상승 수단으로서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그 삶의 예측 가능도와 계획 수행도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생각했던 그대로 은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의료적 권한에 대해 이토록 많은 사람이 감 놔라 배 놔라 하게 된 데는 전공 따라 직업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의 스트레스까지 집중되어 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혼돈이랄게 있을까, 성공이든 실패든 마침표가 있는 삶이 아닌가? 그러나 계획대로 착착 흘러가고 마무리된 이야기는 어딘가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의 것처럼 들리기도 하므로 전처럼 매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나의 케이스가 아니라는 것. 안개로 가득 찬 내일이 불쑥 내미는 것들의 랜덤함은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오랜 공부나 수련 등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깜냥이 아니라는 걸 경험해 왔다. 그렇기에 파악에의 집착, 완벽한 과정 이행의 꿈은 적어도 나에게는 모래주머니일 뿐이다.


비슷한 글들을 한두 번 썼었다. 팬데믹이 오기 전에는 계획 속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살았지만, 코로나가 노력에 상응하거나 상응하지 않는 행운과 불운을 매일매일 배달해 준다는,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의 에세이였다. 아쉽게도 사춘기 때 싸우던 기쁨이와 불안이가 타협 없이 날뛴다. 어쩌면 내 인생의 주제는 계속 반복 변주되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하는 물음이 끝나지 않는다. 급여, 관계, 열정, 신앙, 모든 면에서 나는 시시각각 불만족을 느낀다. 어떤 슬픔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는 흔들림으로 인해 공부를 하다말다, 운동을 시작했다 포기했다, 그 모든 일을 기록했다 잊었다 한다. 의지력도 기억력도 변수들도 모두 다 문제적이다.


근래 큰 이벤트는 없었다. 말하자면 살만하다. 학생 때부터 공부와, 마음의 아픔과, 사람과, 미래와 치열하게 다퉈왔던 것을 생각하면 심심한 것이다. 오히려 예측하지 못했던 기회로 인해 상상도 못 했던 진로로 나아가고 있다. (연봉은 상상 가능한 수준 안에 있다. 하지만) 감사해야 할 것이 마땅한 지표들을 끌어안고 왜 나는 울상인 것이지. 예측하려 하고, 손에 넣어 개수를 세고 분류하려 하다가 꾸준함이 사르르 무너져가는 일상을 느낀다.


아이고! 성화야! 감사도 자기 인정도 만족도 없구나! 정신 차려라… 99번의 삽질이 쌓이면 그중 몇 개는 1번의 행운을 유지할 명분이 된다. 노력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결과만 있는 것이 내 인생은 아니었으니까. 올해 마지막 다짐의 달 3월에는 무쓸모 혹은 찐 삽질 판정을 받을 수도 있는 노력을 마무리하기까지 끌고 가보는 걸로 하도록 한다. 어영부영한 결과라도 조금씩 쌓아뒀다 갑자기 들이닥친 행운에게 할 변론이 되기를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