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작 영화 <매트릭스>는 다양한 철학적 주제와 이슈를 가진 정말 인문학의 종합선물세트같은 영화다. 덕분에 영화를 통한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트렌드가 촉발되기도 했다. 이후, 여러 대학과 강좌등에서 영화를 매개로 한 철학강의, 인문학 강의, 문화강좌 등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으로 기억한다.
<매트릭스>시리즈는 3편까지 나왔지만, 아무래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1편이다. 기억에 남는 여러 장면이 있지만, 그중 인간의 운명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에피소드가 있다. 오라클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오라클oracle 이라는 단어는 어느정도 대중적으로도 알려져 있는 말이다. 흔히 신탁, 신의 계시, 혹은 신전의 제사장이나 무녀를 의미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저 평범한 프로그래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정말 구세주가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오라클을 찾아간다. 오라클은 전자오븐에서 쿠키를 굽고 있는 이웃집 할머니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라클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신성하고 영성이 가득찬 이미지를 상상한 관객이었다면 다소 실망했을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크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되 덕에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것 같다.
네오를 처음 보자마자, 오라클은 이렇게 말한다.
“화병은 신경쓰지 마” 그러자, 네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슨 화병요?” 라고 말하면서 엉거주춤 돌아보다 화병을 깨뜨린다.
그러자 오라클이 말한다. “그 화병말이야”
화병은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 없었다면 화병은 깨지지 않았을까? 운명이 작동하는 방식은 대개 그렇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결국 운명의 방향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오이디프스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오이디프스는 장차 자라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오이디프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신탁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오이디프스를 숲속에 유기한다. 하지만 오이디프스는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어 청년이 될 때까지 자라게 된다. 성인이 된 어느날, 오이디프스는 자신에 대한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되고, 신탁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길에 우연히 휘말린 싸움에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피해자는 자신의 친 아버지 라이오스였다. 그리고 그 도시의 왕으로 추대되어 라이오스의 부인, 곧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오이디프스는 자신이 신탁의 예언에서 벗어났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운명은 아주 정확하게 신탁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또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신탁은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이다. 아네테에 있는 델피의신전에서 하나의 신탁이 널리 퍼져나간다. 그것은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겸손했던 소크라테스는 델피의 신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기로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만나는 현명한 철학자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결국,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여정은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걸로 귀결된다. 신탁을 부정하기 위한 여정이 결국 신탁을 이루는 여정이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밝혀진 자신의 무지로 창피를 당했던 소피스트들은 결국 소크라테스를 모함하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잔을 마시게 된다.
오라클oracle은 입과 관계가 있는말이다. 입, 구강이라는 뜻은 oral이다. 원래 오라클은 기도하다, 간청한다는 뜻이 있다. 기도와 간청은 무엇으로 하는가? 입으로, 말로 한다. 그래서 오라클과 관련된 오라토어 orator는 웅변가, 연설가라는 뜻이 있다. orator는 orare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orare는 연설하다, 기도하다 간청한다는 뜻이 있다. orator에서 o-부분이 입을 의미하는 어원이라는 설이 있다. 생각해보면 o와 입이 연관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당연해 보인다. 흔히 동그라미 하나로 사람의 입을 표현하는 하지 않는가.
더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라클이나 오랄은 구멍과 관계가 있다. 사람의 입은 가장 중요한 구멍이다. 구멍은 쉽게 hole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orifice라는 단어가 관계된다. orifice는 상처가 벌어진 것, 사람의 입, 열린 곳을 의미한다. 사람의 입도 해당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신체의 9규(九竅)라고 할 때, 영어에서는 9orifices라고 한다.
결국, oracle은 orator를 거쳐서 oral로 관계가 형성이 된다. 당연히 신탁의 예언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는 입을 통해서 나온다. oral은 입과 관련된 형용사처럼 사용된다. 시험중에서 필기 시험은 written exam, 구두 시험은 oral exam이라고 한다. 구강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어 칫솔의 브랜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칫솔 브랜드중 하나인 Oral-B는 말 그대로 입안을 청소하는 솔이다. B는 브러쉬brush를 의미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