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영국의 한 마을.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고, 길거리는 텅 비었으며, 들리는 소리라고는 간간이 이어지는 교회의 종소리와 슬픈울음소리뿐이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풍경을 순식간에 어둠과 비탄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흑사병은 단순히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적인 사건인 것 만은 아니다. 흑사병은 이후의 사회구조와 문화, 그리고 언어에 매우 깊은 영향을 남겼다.
흑사병(Black Death)은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일으키는 전염병으로, 쥐와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주된 원인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신의 벌"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더럽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밀집해 살았던 것이 큰 이유였다. 흑사병의 증상은 무시무시하다. 갑자기 고열과 두통이 시작되고, 피부에 시커먼 종기와 같은 부푼 림프절이 생겨난다. 그래서 이름도 "흑(黑)사병"이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병에 걸리면 3일에서 일주일 내에 대부분 사망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의 원인을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 안에 허브를 태우거나 꽃다발을 들고 다니며 냄새를 막으려 했었다. 나쁜 공기를 좋은 공기로 막아보려는 의지의 발로 였을까? 직관적으로는 너무나도 공감이 가지만 과학적으로는 별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흑사병이 퍼졌던 당시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귀족들은 자신의 성안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금했다고 한다. 농민들은 어쨌거나,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팔자려니” 하고 체념했다. 의사들은 새 모양의 가면을 쓰고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지금도 할로윈에는 이러한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새부리처럼 생긴 가면 끝에는 허브와 향료를 넣었는데, 역시 나쁜 공기를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읽혀진다. 현대 마스크의 선조격이었지만, 당연히 당시에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고양이와 개가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서, 수많은 고양이와 개를 잡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양이가 사라진 곳에는 흑사병의 원인을 몰고다니는 쥐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인구의 약 30~50%가 줄었다. 영국에서만 당시 인구 약 450만 명 중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갑자기 런던에서 인구의 절반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런 충격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경제는 망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새로운 사회의 구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많은 농민들이 사망한 탓에, 농사지을 사람이 턱없이 부족해진 것이다. 당연히 살아남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농민들은 이제 땅 주인에게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으로 친다면, 취업시장에서 인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된 셈이다. 자연스럽게 여성의 노동력도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로 인해 여성들이 농업이나 상업 및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확장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흑사병은 단순히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만은 아니었고, 중세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새롭게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흑사병 이후, 사람들은 도시보다는 시골로 흩어지며 자급자족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했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구원을 약속하던 교회가 병을 막지 못하자 종교에 대한 신뢰도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농노들이 자유를 얻게 되면서 중세를 지탱하던 봉건제 중심의 경제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새로운 영어단어가 생겨나는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마치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전에 없던 말들이 생겨나는것과 비슷하다. 당시에는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상류층과 귀족층은 프랑스어를, 그리고 평민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흑사병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면서, 프랑스어를 쓰던 상류층도 또한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기존에 프랑스어가 주로 사용되던 행정과 법정, 교회 등의의 주요 언어가 영어로 대체되게 된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 유행하던 동요가 있었다. “Ring Around the Rosie”라는 노래인데,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Ring around the rosie,A pocket full of posies,Ashes, ashes,We all fall down.”
가사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이 동요는 흑사병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Rosie"는 병으로 인한 붉은 반점, "Posies"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들고 다니던 꽃, "Ashes"는 병든 시체를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동요는 다양한 영화와 문학, 음악에서 인유allusions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스티븐 킹의 대표작 중 하나인, “The Stand”(1978)에서 죽음과 재앙의 순환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어 인류 대부분이 사망한 이후의 세상을 그린 작품이다.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미국의 작은 마을에 퍼지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내용으로 하는 또, 더스틴 호프만과 모건 프리먼 주연의 이 영화“Outbreak”(1995)에서도 등장한다. 군사와 의료 전문가들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긴박한 감염 확산과 인간의 윤리적 갈등은 마치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Ring Around the Rosie"는 전염병과 관련된 동요로 사용되어 흑사병과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흑사병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지만, 놀랍게도 이 재앙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권리가 신장되고, 영어가 자리 잡고, 새로운 사회경제구조가 등장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흑사병이 영어에 남긴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전에 언급된 것처럼, 1066년의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300년 넘는 기간 동안 영국에서는 프랑스어가 상류층의 언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법정, 행정, 귀족 사회에서는 프랑스어가 사용되었고, 영어는 농민 계층의 언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해 영국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면서 노동력 부족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하층민의 권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농민들의 언어인 영어도 사회적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특히, 1362년 영어 변론법(The Pleading in English Act)의 시행은 법정에서 영어 사용을 의무화하며 영어의 지위를 공식화하게 해 주었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법정 기록이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작성되었는데, 흑사병 이후에는 이 언어들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지면서 영어가 실용적인 언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되짚어 생각해 본다면, 이 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많은 농민이 법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농부나 하층계급 사람들은 법정에서 자신이 피고로 서 있는데 판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영문도 이유도 모른채, 피고석에 서있던 죄인들은 감옥에 가거나 형벌을 받게 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력 부족은 중세 영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제발 우리 땅에서 일해 달라”며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야 했고, 농민들은 이제 더 높은 임금과 자유를 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노동과 직업에 관련된 단어들이 영어에서 중요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Labor(노동):라틴어 labor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의미했다. 흑사병 이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인식하고 더 나은 대우를 요구하면서 이 단어는 노동과 권리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Wage(임금):앵글로 노르만어 wagier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노동자와 지주 간의 새로운 계약 체계를 반영하는 말이다.
지금도 노사관계는 항상 갈등이 있다. 뭔가 맞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파업을 한다. 물론, 파업Strike이라는 단어는 훨씬 나중에 등장했지만, Strike는 원래 자신이 들고 있는 연장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했다. 혹은 선원들이 배의 돛을 내리면서 항해를 거부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돛을 내리는(lowering)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가 바로 strike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strike의 원래 뜻인, 평평하게 하다, 낮게 만들다는 뜻이 개입되어 있다.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깃발이나 국기를 내린다고 할때에도 strike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무려 13세기부터 이러한 용법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파업과 비슷한 태업에서도 볼 수 있다. 태업은 사보타지sabotage라고 한다. 특히 태업은 근대에 기계가 노동자들의 노동을 대체하게 되면서 생겨난 말이다. 이때,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은 기계가 작동하는 것에 앙심을 품고 당시 신고다니던 나무로 된 신발, 즉 sabot를 기계의 톱니바퀴 속으로 집어 던진 것에서 유래한다. 당연히 나무신발을 집어삼킨 기계의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갔을리 없다. 결국 일은 지체될 수밖에 없고, 태업은 성공하게 된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진지한 어원학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흑사병이 휩쓸던 시기, 사람들은 이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결과, 전염병을 설명하거나 치료법을 논의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들도 생겨났다.
Plague(전염병):고대 프랑스어 plag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타격”이나 “재앙”을 뜻하며, 당시 사람들이 전염병을 신의 벌로 여겼던 사고방식을 반영된 말이다.
Physician(의사):고대 프랑스어 fisicien과 라틴어 physica에서 유래했으며, 흑사병 당시 의학적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안했던 치료법은 종종 양파를 피부에 문지르거나 허브를 태우는 것처럼 비과학적이었다.
또한 흑사병은 봉건제의 붕괴를 가속화하며 새로운 경제 구조를 만들어냈다. 역시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들이 생겨났다.
Tenant(세입자):고대 프랑스어 tenant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농민들이 더 나은 조건으로 토지를 임차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Guild(길드):고대 노르웨이어 gildi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와 상인들이 협동하여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을 의미한다.
흑사병은 사람들에게 신의 형벌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죄를 뉘우치고 구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증가했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언어에도 반영된다.
Penance(참회):라틴어 poenitentia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흑사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Charity(자선):라틴어 caritas에서 유래했으며, 병자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종교적 의무로 여겨지면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플라겔란트(Flagellants)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며 마을을 행진했다. 그들의 행진은 종종 큰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과 신앙이 어떻게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플라겔란트 행위는 나타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 등장하지 않을까?
헤스터 프린과 관계를 가졌던 딤즈데일 목사는 자신의 행위에 종교적인 죄의식을 통감하고 있었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자수로 주홍글씨가 새겨졌다면, 딤즈데일은 밤마다 자신의 등을 채찍질하면서 자신의 피부에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를 새기게 된다. 진정한 주홍글씨는 어느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