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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새 날갯짓에 트렌치 코트깃을 올리며

알고리즘영단어:sniper, sharp, sandpiper,trench

by 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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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개봉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는 이라크 전쟁Iraq War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유명한 저격수 크리스 카일Chris Kyle에 관한 영화다. 미해군 네이비 실Navy SEAL의 저격수로서, 카일은 160번의 저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한 후, 카일은 미국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격을 가르치던 학생에게 살해당한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저격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스나이퍼sniper는 도요새sandpiper와 관계가 깊다. 도요새는 워낙 민감하고 날렵한 동물이어서 총쏘기 훈련을 위한 대상으로 많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도요새는 영어로 sandpiper이지만 그 외 유럽에서는 snipe, 혹은 이와 비슷한 형태로 명명된다. 독일어나, 스웨덴어의 형태를 살펴보면 습지에 살고 있는 생태적인 습성이 반영된 듯 sandpiper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사용된다. 말 그대로 모래sand위를 걸어다니면서 피리소리piping note를 내기 때문이다. 현재는 도요새라는 명칭으로 sandpiper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


도요새를 사격대상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한 스나이퍼sniper는 아주 정밀한 사격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sharpshooter라고 할 수도 있다. Sharp는 날카롭다는 뜻이지만, 정확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냉정하거나 지적인 인상을 풍길때도 사용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인상이 송곳같이 날카로우면, 흔히 샤프하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인상을 묘사할 때도 쓰이지만, 샤프라는 말은 아마 문구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일 것이다. 가공된 연필심이 자동으로 연장되는 펜의 종류를 샤프sharp라고 부른다. 무딘 연필에 비해서, 0.5m 샤프는 훨씬 더 뾰족하다. 그리고 항상 “일관되게 뾰족한ever-ready sharp” 연필심이 제공된다.


영어로 sharpened pencil이라고 하면, 뾰족하게 깍여 있는 상태로 판매되는 연필을 의미한다. 샤프를 지칭하는 영어단어는 mechanical pencils이다. 왠지 문구점에서 “메커니컬 펜슬 주세요” 하면 어색할 것 같다.


메커니컬 펜슬을 의미하는 샤프sharp라는 말은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회사 샤프SHARP의 이름과 같다. 축구나 다른 스포츠팀의 스폰서 문구로도 자주 등장하는 샤프라는 회사의 이름을 보면서 혹시 왜 샤프펜슬과 이름이 같은지 궁금해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기업체 샤프의 기원은 샤프펜슬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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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일본의 하야카와 토쿠지라는 사람이 한 회사를 설립한다. 그는 일본에서 최초로 메커니컬 펜슬Mechanical Pencils를 발명했는데, 곧 그 물건을 대량으로 제작해서 판매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발명한 메커니컬 펜슬에 그는 “에버-레디 샤프ever-ready sharp” 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했다. “에버-레디 샤프”는 일본에서 크게 유명해졌고, 그 유명세를 빌려 아예 회사 이름 자체를 Sharp로 작명한다.


이후, 많은 기업들이 그렇듯이, 샤프회사는 여러번의 변화와 부침을 겪는다. 컴퓨터와 카세트플레이어, 반도체, 노트북,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로 변모했다. 물론, 더 이상 샤프를 만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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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특정한 상품의 이름이 그 상품 전체의 종류를 지칭하는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스테이플러stapler라고 많이 부르지만, 얼마전까지도 호치키스Hotchkiss 라는 이름이 자주 사용되었다. 과거 일본에 수입된 여러 스테이플러 회사 중 미국의 호치키스회사 제품이 가장 괜찮았는데, 일본에서는 그것을 그냥 호치키스라고 불렀고, 한국역시 그 단어를 그대로 수입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자동차의 경적horn은 클락손Klaxon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역시 자동차용 경적을 만드는 회사가 자신의 경적에 클락손Klaxo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아마도 훌륭한 경적이었을 것이다. 클락손Klaxon은 소리지르다shriek는 의미의 그리스어 단어 klazo를 변형해서 만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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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트렌치 코트trench coat라는 말이 제 자리를 잡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바리 코트Burberry coat라는 말이 훨씬 더 흔하게 쓰였다. 트렌치 코트는 기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어쩌면 정말 초창기의 세련된 아웃도어 패션이라고 할 수 있다. 버버리의 설립자, 토마스 버버리는 19세기 말, 가바딘gabardine이라는 일종의 방수가 되는 직물을 개발해서 낚시, 등산, 사냥할 때 입는 옷을 만들어 팔았다. 버버리가 만든 의류의 아웃도어 기능이 인정받게 되면서 그는 영국 육군에 옷을 공급하게 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흔히 1차 세계대전은 트렌치 워Trench War라고도 부른다. 트렌치trench란 전쟁에서 전투를 위해 파놓은 참호를 말한다. 참호trench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야 하는 병사들에겐 활동이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의류가 필요했다. 버버리가 개발한 코트는 이런 상황에 아주 딱 맞는 의류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의 참호속에서 오랫동안 견뎌야 했던 군인들 사이에서 버버리의 코트가 유행하면서 트렌치 코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버버리의 기능성 코트는 수요가 많아서 민간인들의 패션스타일로 여전히 인기를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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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을 특별히 참호전쟁, 혹은 트렌치 워라고 부르는 이유는 참호trench와 기관총machine guns이라는 두 가지 때문에 많은 군인이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부전선Western Fron에서 더욱 심각했는데, 이러한 트렌치 워의 비인간적인 전쟁상황은 레마르크의 <서부전전 이상없다>에 잘 묘사되고 있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서부전선Western Front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양측 모두 길고 깊게 참호trench를 파고 대치중이다. 양쪽 참호trench 사이의 평평한 개활지는 “아무도 못가는 땅no man’s land”이다. 그곳은 서로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철조망barbed wire이 가득했고, 폭격을 피할수 있게 설치한 구조물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게다가 양측 모두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를 벗어나 적군의 시야에 잡히는 순간 기관총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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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고작 수 백미터에 불과한 이 땅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서로 기껏 몇 백미터를 더 갔다가, 다시 또 그만큼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개월에 걸친 이 어이없는 참호전으로 서부전선에서만 약 3백 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17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차 세계 대전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던 독일작가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Im Westen Nichts Neues>는 전쟁을 겪은 독일병사들의 트라우마를 잘 그려내고 있으며, 1930년, 1979년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22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특히 2022년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의 마지막 엔딩부분은 충격적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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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을 고작 15분 남겨두고 영토에 집착하는 독일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진격을 명령한다. 명령을 거부하면 즉결 처형이다. 병사들은 겨우 15분을 남겨두고 적진을 향해 진격한다. 어떤 병사는 휴전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 죽고, 어떤 병사는 사이렌이 울릴때까지 살아남는다. 1914년 전쟁시작 이후 191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의 이동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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