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문학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만큼 유명한 고전이다. 1847년, 자매였던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제인에어Jane Eyre>와 같은해에 출간되었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문화적 영향은 대단했다. 어귀진 골목의 카페 이름, 식당에서 영화와 드라마의 제목으로까지 "폭풍의 언덕"은 다재다능한 문화적인 브랜드로 사용되었다. Wuthering 은 바람이 사납게 분다는 뜻이다. 원제엔 Heights로 되어있지만 번역은 언덕으로 했다. 이전 일본어 번역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최근의 한국어 번역은 영어 제목 그대로 <워더링 하이츠>로 옮겼다.
하이츠Heights는 높다는 뜻의 high 명사형 height을 이용한 단어로 고급 아파트와 같은 주택단지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하이츠라는 이름은 고급 주거시설에 종종 사용된다. 그래서 원제목인 <워더링 하이츠>를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폭풍이 몰아치는 고급저택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속에서 워더링 하이츠는 일종의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파란만장하고 격정적인 사랑의 전형으로 각인된 히스클리프Heathcliff와 캐서린Catherin의 사랑이 시작된 곳이다. 워더링 하이츠는 캐서린이 아버지와 함께 살던 언덕의 어둡고 오래된 저택이다. 어느날 캐서린의 아버지가 떠돌던 소년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세대를 뛰어넘은 파국의 운명이 시작된다.
워더링 하이츠와 대비되는 장소로서 쓰러쉬크로스 그레인지 저택이 등장한다. 어둡고, 오래되고, 야성적인 하이츠에 비해, 그레인지 저택은 밝고, 우아하고, 교양있는 문명의 장소였다. 캐서린은 우연히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순박한 감정에서 탈피하여, 세상을 자각하게 된다. 쉽게 말한다면, 철이 들었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그런 각성으로 인해 애초에 자신과는 신분상 어울리지 않았던 히스클리프를 어쩔수 없이 떠나게 된다.
히스클리프의 캐서린 가문에 대한 복수는 매우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황량한 워더링 하이츠의 분위기에 더해 히스클리프의 복수에 대한 집념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워더링 하이츠로부터 이어진 전통인지 하이츠라는 배경은 공포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사용된다. 1990년작 <퍼시픽 하이츠>역시, 저택을 배경으로 한 공포스릴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배트맨으로 유명했던 마이클 키튼이 주연을 맡았다.
훌륭한 고전은 늘 그렇듯이, 폭풍의 언덕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많다. 그 중 캐서린이 "내가 히스클리프야"라고 말하는 부분은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반복된다. 캐서린은 넬리에게 고백한다. 자신과 히스클리프의 관계는 그야말로 운명적이라고. 린튼에 대한 사랑은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변할 수 있어도, 히스클리프를 향한 사랑은 바위처럼 변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유명한 캐서린의 선언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아무렇게나 짓지 않았다. 캐서린Catherine이라는 이름은 순수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더러운 것이 정화된 순수함이다. 감정을 정화한다는 카타르시스catharsis와도 관계가 있다. 카타르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서도 언급된 매우 중요한 예술 형식의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마음의 정화를 의미하며, 관객이 비극을 볼 때, 주인공의 운명적인 상황, 비극적인 처지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심리적인 불안이나, 긴장, 쌓인 감정이 어느정도 해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용어 자체는 연극예술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사회문화예술 현상에 적용해서 사용하는 것 같다.
캐서린은 이러한 카타르시스catharsis와 어원을 공유하는 이름이다. 그리스어 카타로스katharos는 순수purity를 의미한다. 순수한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신중하게 선택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순결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는 chastity이다. 캐서린은 얼마나 순수하고 순결했던 여성이었던가. 하지만 순결을 의미하는 chastity의 어원은 카스트caste에서 왔다. 인도의 계급제도를 말할때의 그 카스트이다. 계급적 질서는 각 계급의 순수한 혈통이 지켜짐으로 인해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고유 계급이 다른 계급과 섞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캐서린은 순결한chaste 여인이었지만, 결국 그 순결함으로 인해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다.
반면 히스클리프Heathcliff는 절벽cliff 에 핀 풀heath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것도 꽃이 아닌 풀이다.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풀처럼, 히스클리프는 삶에 대한 열정과 격정이 대단했다. Heath라는 말은 버려지고 황폐한 땅을 의미한다. 위태로운 곳에서 피어난 풀의 운명인가. 격동적인 파고를 겪어야 했던 히스클리프의 운명을 환기시키는 절묘한 이름이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구스타브 플로베르Gustav Flaubert는 <보봐리 부인 Madame Bovary, 1856> 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부유한 중산층 의사와 결혼해서 풍족하지만 숨막혀 죽을 것 같은 권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여인, 마담 보봐리의 파괴적인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권태로운 삶에 환멸을 느끼던 보봐리에게 남성이 접근하며 아슬아슬한 로맨스가 시작된다. 늙고, 재미없던 남편과의 삶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보봐리는 짜릿하고 감각적인 쾌감에 몸을 맡기고, 곧 그녀의 삶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랑과 탐닉이 불륜과 애정이 혼재하는 격정속에서 보봐리는 방탕한 유한부인으로 낙인찍히며 점점 절벽의 끝을 향해 다가간다.
결국 치명적인 재정상태에 봉착한 보봐리는 도움을 얻고자 이전에 알고 지내던 남자를 찾아간다. 보봐리는 옛정에 기대어 도움을 바랐지만, 남자는 보봐리의 몸을 요구한다. 보봐리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돈을 빌리러 왔지, 몸을 팔러 온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 길로 집으로 되돌아가 비소를 한 움큼 집어삼키고 생을 마감한다.
보봐리의 결말은 방탕함에 대한 댓가였을까. 사람들은 보봐리에 대해서 때로는 동정과 연민을 때로는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다. 상반된 견해가 팽팽한 가운데, 작품을 썼던 플로베르는 어디선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샤를리 엡도Charlie Hebbo>신문사에서 15명이 사망하는 테러사건이 벌어진다. 종교 지도자를 풍자한 그림 때문이었다. 테러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언론 출판의 자유를 여전히 지지하며 연대하는 사람들은 “내가 샤를리다.” Je suis Charlie”, I am Charlie 라는 구호를 외쳤다.
“내가 히스클리프야.” “내가 보봐리다.” “내가 샤를리다.” 모두 자신이 옹호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대상과의 합일을 원하는 간절한 구호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