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해외출장을 다녀온 남편은 출장 이후 곧장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해외출장 후 자가격리를 아기가 있는 집에서 하기 불안했기에 선택한 노선이었고, 자신의 건강이 위협받는 것보다 아기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부모님으로 인해 그 결정은 환영받았다. 남편은 1주일간의 해외출장, 그리고 10일간의 자가격리 기간 동안 아기를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이 내심 아쉬웠지만, 아기의 건강을 위한 결정을 했다. 그렇게 남편은 입국 후 곧장 부모님의 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부모님 집에 몰래 가져다 둔 아내의 깜짝선물
남편은 마스크를 낀 채 부모님과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부모님도 마스크를 낀 채 그들의 아들, 남편을 맞이했다. 서로 환히 웃으며 인사와 안부를 물었겠지만, 목소리와 눈웃음으로 짐작할 뿐 활짝 웃는 입모양은 마주할 수 없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지 십여분 후 남편의 부모님은 미리 챙겨둔 듯한 짐을 들고 시골집으로 향했다. 하루 이틀만 시골집에 가 화분에 물도 주고, 시골 공기도 마실 계획이라고 했다. 남편은 밥 한 끼 함께 못하고 자리를 떠나는 부모님의 모습에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해외 입국자로 분류되어 자가격리를 하는 마당에 함께 있으면 오히려 신경이 쓰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장시간 비행에 찌든 피로를 뜨거운 샤워로 씻어내고, 미리 사둔 일회용 면도기와 칫솔세트를 꺼냈다. 입었던 옷, 입고 있는 옷, 아직 입지도 않은 옷 등 구분 없이 몽땅 세탁기에 넣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한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기 위해 오염도를 높음으로 설정하니 한 통 빠는데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빨래가 시작됐다. 가져갔던 캐리어, 가방 등 소지품을 알콜스프레이로 소독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은 할 수 있는 한 지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 시간 기다린 아내와의 통화도 잊지 않았다. 드디어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미국과 한국의 거리만큼이나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10일간의 격리기간이 끝나고 마주했을 때 얼마나 반가울까 기대도 되었다.
다음날 남편은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받고 나니 괜스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께 연락해 하루 더 주무시고 오시라 했다. 만약 양성이 나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편의 귀국편 비행기에는 유증상자가 있었고, 검사를 받고 나니 그 사실이 늦게나마 남편을 압박했다. 살짝 불안한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채 재택근무를 했고, 하루가 지나 결과를 듣게 되었다.
양성이었다.
살짝 피곤한 느낌 말고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기에 남편은 양성이라는 사실에도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의 주변인들은 달랐다. 다들 앞다투어 위로하기 시작했다. 회사도, 가족도, 친구들도 모두 남편을 걱정했고, 많이들 놀라는 눈치였다. 부담스러운 관심이 싫어서였을까 남편은 회사에도, 가족에게도, 정말 아무렇지 않고, 증상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수차례 어필했다. 다행히 무증상자로 분류되어 재택치료를 진행했고, 무료한 마음에 안부를 물을 때면 늘 걱정 섞인 한마디가 돌아왔다. 남편은 걱정으로 일관되는 대화들이 부담스러웠고, 이내 연락도 점차 줄여나갔다.
이미 양성이고, 벌어진 일이었다.
남편의 황제재택치료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부모님은 잠깐의 외출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최소한의 생필품으로 시골집 생활을 시작했고, 남편은 확진자로 분류되어 유급휴가와 함께 위로물품을 지원받았다. 치료에만 전념하라는 모두의 희생과 배려였고,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남편은 황제재택치료를 진정으로 즐기겠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을 누려본지가 오래였고, 필요한 물품은 새벽배송 등으로 얼마든지 조달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요즘은 배달음식도 자유롭게 주문이 가능하니 혼자 하는 생활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잘 먹고, 잘 자기로 했다. 그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지금의 미열이 더 높아지지 않도록, 비교적 낮은 산소포화도를 높일 수 있도록, 최적의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대놓고 황제재택치료를 하는 선택을 했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내쫓고 차지한 집은 상당히 쾌적했다. 황제재택치료에 부족함이 없었던 부모님의 집은 마당을 갖춘 1층 빌라집이었다. 집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나 마당은 나갈 수 있었고, 카페에는 가지 못하나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집이었다. 화구가 6개나 있는 가스레인지가 있었고, 남편의 집보다 조리도구가 많았다. 심지어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이미 장까지 봐 놓으신 부모님 덕에 냉장고는 식재료를 가득 품고 있었고, 콜라도 박스째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자유 아닌 자유를 누려볼게요!’
남편은 시간이 많았다. 10일간 아무런 스케줄과 숙제가 없이 그저 쉬면 되는 일정이라니, 차고 넘치는 시간에 남편은 점점 게을러졌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으며, 꼬박꼬박 낮잠도 잤다. 분명히 평소에 잠이 없는 남편이었지만, 이번 기간에는 달랐다. 막상 시간이 남으니 그간 밀린 잠을 보충하듯 꿈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어릴 적 가정주부가 꿈이었던 만큼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매 끼니 남편은 각기 다른 메뉴로 직접 요리해 먹기 시작했다. 요리하고, 먹고, 치우고, 자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고, 자고. 단조롭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고, 심심해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도 없었다. 남편은 자신이 ENFP가 맞나, 의심까지 들었다.
SNS를 즐겨하는 남편은 매 끼니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남편은 확진 판정을 받았음을 주변 몇몇에게만 알렸기에 보통은 해외입국자 자가격리로서의 황제격리를 응원했고, 잘난척하며 올리는 황제재택격리의 기록은 확진자에 대한 주변의 걱정을 잠식시키는데 효과적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장인과 장모의 동행으로 인해 비교적 편안한 육아를 하고 있었고, 어찌 보면 모두가 행복한 기간이었다. 단, 하필이면 집을 내주고 시골에 갇혀버린 남편의 부모님만 빼고.
황제재택격리는 확진 판정 이후 10일간 이뤄졌다. 출장 기간을 포함해 약 3주간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시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프지만 않았다면, 확진자만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격리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늘 이런 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내심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간간히 이뤄지는 영상통화에서 남편의 아내는 걱정 반, 안도 반의 표정으로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왔고, 우리집 작은 인간은 갑자기 입이 트고 말이 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여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이 좋지만, 가족을 안고 싶은 마음도 컸다. 격리 중인 지금도 좋지만, 격리 후가 더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은 그렇게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기대했다.
어차피 규정된 재택치료기간에 끝이 있었기에 남편은 그 기간만큼만은 별다른 생각 없이 혼자됨을 만끽했다. 나긋한 목소리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그립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반복하는 아기가 보고 싶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다행히 편안한 황제재택치료였고, 끝이 있는 격리였기 때문이다.
재택치료 끝
이 시국에 출장을 간다 선언하고, 그 선언을 지지받고, 그렇게 다녀온 해외출장의 끝에 남편은 확진 판정을 받았고, 황제재택을 누렸으며,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자리를 비워준 부모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