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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Mar 14. 2017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을 읽고 한마디

19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이라는 책 제목과 '커다란 생각의 사소한 이야기'라는 원제와의 비교를 해봅니다. 책을 읽다보면 사실 커다란 생각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라는 원제보다는 오히려 출판사에서 정한 제목, 즉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이 훨씬 책에서 말하려는 내용에 부합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나열된 일상주변의 것들에 역사와 혹는 보는 관점 기반에 철학을 가미한 이야기의 흐름, 자연스럽게 저자의 깊음과 넓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책이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책은 쉽지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름 철학이라는 주제에 대한 약간의 읽음과 관심으로 가벼운 걸음으로 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한것도 사실였지만, 이 걸음이 가볍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대해서 살짝 말하자면, 먼저 책과의 거리를 유지할때의 최악의 상황 - 즉 눈은 글을 읽지만 머리는 이해가 되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 - 이 종종 발생하여, 읽었던 글을 다시 보는 일이 여러번 발생하게 될 정도로 집중이 떨어져도 대략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글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너무나 강한 사유가 있었기에 내가 완전히 저자로의 전이가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이해도가 너무나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고에 대한 사유는 사유하는 자의 몫이기에 그 사유를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고, 사실 책을 통해 사유의 개인화에 앞서 저자의 의도파악에 진위여부에 좀더 많은 수고가 따르지 않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세번째는 역시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해도의 떨어지는 현상였습니다. 강신주가 말하면 그와 같은 지역이나 같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사계절을 느껴서인지 어느정도 그의 사유를 개인의 사유화로 전이가 종종 이루어지고, 만족을 하곤 하였으나 문화의 차이로 쓰고픈 유혹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사실은 지식의 얇음으로 인한것임을 부정이 힘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늘 역자의 책의 단점으로 생각하는 필터링의 문제입니다. 번역에 있어서 사전적인 용어들이 많아 진정으로 말하려는 부분 파악이 쉽지 않았습니다. 2011년에 나온 책인데, 약간의 아쉬움이 있기 했습니다.

 

물론 저에게 읽기가 버겁긴 했지만, 책에 깊이 즉 저자의 사유의 깊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식의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유를 통한 무게감을 느끼는 것도 세상을 보는 또다른 관점이 되겠다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책은 알파벳으로 시작해서 DNA로 마무리가 되어집니다. 문득 머리속에서 알파벳이 떠나질 않습니다. 저자의 의도가 이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즉 알파벳이라는 문자를 통해서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갖혀 놓았던 것,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소크라테스가 왜 문자화 되는 것을 질색했는지 살짝 이해할 수도 있어보입니다. 무한의 세상, 무한의 사고, 무한의 생물, 무한의 무생물... 사실 정의가 되어지지 않는 것을 문자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의하고 드러나게 한다는 사실, 어쩌면 이 자체가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니 알파벳으로 시작해서 DNA로의 마무리가 혹시 알파벳이라는 신에 대한 도전의 틀(Frame)이 였다면, DNA는 도전의 결과물을 나타낸다고 보면 너무 비약이 큰 것일까요?

 

책에는 제법 많은 포스트잇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빠트리고 가서 여러부분 사용을 놓친 곳도 있었습니다. 대략 그 내용을 공유하자면, 삼포세대에 오포세, n포세대로의 극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르바이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만 하더라도 손에 흙이나 물을 묻히는 아르바이트, 곧 노동은 욕된 것이었다. 중세의 표준 독일어 '아레바이트'가 정확하게는 '없는 자의 비참함'이라는 뜻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없는 자의 비참함 -> 아이들의 사회 경험 ->직업의 대안' 이런 식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계에 관한 내용도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흘러가버림, 혹은 일종의 추상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의 특성은 시계라는 형상으로 압축되었다... 시계가 머릿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 문화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제로 가정에 독재자가 등장할 가능성을 부인하기가 힘들다' 시간이 시계로 압축되어진다는 사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기계가 된다는 사실... 알파벳이 신에 대한 도전이라면 시계와 톱니바퀴는 지배를 위한 수단이 아닌가 싶네요.

 

'상상력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바울이 본 신은 '아무것도 없음'이다. 신은 곧 순전한 무(無)다! ' 이 부분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누구인지 모르는 1인으로 그에 대한 앎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임을 예견하게 하는듯 합니다. 기독교도를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맞는 장면과 사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인용, 4번째의 '아무것도 없음'이 바로 신은 곧 순전한 無라니... 논란이 많아 보여서 이정도로

 

'3에서 3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0이 있다고? 없는 것이 있다니' 없는 것은 0이아니네요, 그런데 3에서 3을 빼면 분명이 없는데 우리는 0이라고 하면서 살고 있네요. 생각이 너무나 많아지네요...

 

'루소가 자연인의 적대자로 보는 '사회적 인간은 노예로 세상을 살다가 노예로 죽는다'. 이는 사회가 인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기계가 작동하기 위한 하나의 부품으로서 시민 혹은 종복이 스스로를 희생하기를 강요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억압과 굴복만이 지배한다. 사회 동물이 사회라는 기계안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인간다움에서 멀어지는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다. 이로써 인간은 이중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루소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저의 내용을 모르고 그저 자연으로 가라는 루소만 외었던 중고교 시절이... 문제는 자연으로의 회귀 역시도 그 자체의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 집니다.

 

대략 책의 내용 중에 일부를 소개했습니다. 보여지는 것과 같이 많은 논의거리와 생각거리가 차려진 밥상이라 보시면 됩니다. 책에서 말했듯이 찬을 먹는 순서는 그다지 필요치 않아보이기도 합니다. 밤에 잡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분들, 이 책은 절대로 금지 입니다. 훨씬 더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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