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네이트 Mar 29. 2017

나의 레종데트르를 읽고 한마디...

24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독서만담을 읽는 중에 저자가 한번쯤 읽을 가치가 있다는 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주문을 했던 책 입니다. 사실 책을 통해서 책을 추천하는 경우는 거의 후회가 없었던 듯 합니다. 물론 이 책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 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김갑수가 누군가 했습니다. 그러다 네이버를 통해서 보니 사진이 낯이 익은 것도 사실입니다. 종종 TV패널로 나오곤 했던, 물론 TV를 잘 보지 않고, 책에 대한 패널로 보여지기 보다는 일상 사람 사는 이야기에 허접(?)한 이야기에 나온곤 했던 양반이 아닌가 싶어 책에 얼굴을 뭍기 전까지는 약간의 실망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중고책을 사길 잘 했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처음부터 사실 점점 그의 사고의 폭과 독서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점점 부러움과 존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름 책을 읽고, 읽은 것을 머리속에서 부질없이 사라짐을 저어하게 생각해 약간의 끄적임을 하고는 있지만, 같은 책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고의 차이에 한없는 부끄러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책의 양이 아니라 질적접근으로 사고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책의 제목부터 한번 생각해 보렵니다. '나의 레종테트르', '나의 존재이유'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존재이유라고 하며, 삶의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존재이유는 책을 읽는 다는 것과 그 책을 남에게 소개한다는 것으로 넓힐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문학평론가는 책을 사서 볼까(?)입니다. 책 내용중에 있는 돈은 판을 사는데 주로 사용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읽는 책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도 대단히 부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평소 주변에 그렇게도 할 수 없는 책을 이야기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기에 또한 부러움과 존경이 하나 더 더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금 나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나의 존재이유는 뭘까? 나의 레종테트르는 뭘까? 어쩌면 사람들이 그다지도 책을 쓰려하고, 강의를 하려하고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확인을 위한 작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지르르한 말주변과 소주한잔 마시는 것이 나의 존재의무는 될 수 없으니, 이제라도 그 무엇이 있는지, 혹시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출을 해서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지 정립이 필요하겠다 생각을 해봅니다. 나의 레종데트르...

 

이 책은 이랬습니다. 한권의 책을 읽었는데 대단히 많은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물론 그 읽음이 똥싸고 닦지 않음의 불쾌함은 내포하게 되지만, 적어도 내가 책을 고르기에 부담스러울때 혹은 이런 부류의 책을 읽고 싶을 때 이 책을 뒤적거리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사실 책을 읽기 위한 메모가 필요 없었습니다. 거의 다 읽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순서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고, 그에 대한 사고를 현실과의 접맥이 가능한 것인지, 그래서 또 한수 배우게 됩니다.

책의 소개에 있어서도 그의 글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궁금을 만들고, 내가 좀더 읽게 싶겠금 만드는 재주,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이런 양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다 읽지? 하는 생각에 즐거운 고민에 살짝 빠지게 됩니다.

 

책은 총 16챕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챕터1의 성교를 시작으로 해서, 시, 음악, 소설, 고전, 민족주의 그늘 까지, '쿨한 남자 김갑수의 종횡무진 독서 오디세이'라는 말을 왜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책 수록의 챕터구성은 아주 영리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고불변의 빠질 수 없는 재미요소인 성교를 시작점으로 했으니 궁금증이 발동을 만들었고, 민족주의 그늘이라는 의미심장한 마무리까지, 물론 성교로의 시작점에 약간의 허세와 풍자가 책의 가벼움을 조장할 수도 있었지만, 문학평론가의 시선으로의 세대적 비판으로의 마무리는 절대적 가벼움이 아니라는 반증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고통, 비관, 절망의 축제. 쇼펜하우어는 적어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스스로 그렇게 살았으니까. 속없이 행복해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한 게 있다. "어리석음은 삶의 '한 모서리'만을 포착하는데, 그 모서리에는 즐거움만 가득할 수도 있다... 아예 행복해질 생각을 포기하면 인생이 좀 나아진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행복 또는 욕망의 대체물로 제시하는 것이 "지성"이다.'

생각을 많이 했고 여러번 읽었던 글입니다. 특히 '한 모서리...' 그것이 어리석은 자를 살게 하는 힘인가? 문득 범부의 슬픔, 혹은 눈물이라는 것이 바로 '한 모서리의 즐거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코박고 살고 있을 인간이 도데체 얼마나 될까?

'행복 또는 욕망의 대체물로써 지성' 욕망의 대체물과 한 모서리를 한 선상에 연결을 지으려 해 보았지만, 이는 겹치기 보다는 나란히 가는 수평선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숲이 보이지 않습니다.

 

'품위있는 삶을 영위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내가 기회 닿는 대로 주장하는 것이 있다. 될수록 신문, TV를 보지 말고 저녁약속을 하지 말자는 것'

부분적으로는 공감을 부분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라 봅니다. 저녁약속이야 말로 삶의 존재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나에게의 보상이라고 생각하기에... 누구가를 만나야 하고 소주를 마셔야 하고, 사랑을 하여야 하기에... 보상이 없는 삶을, 소주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 힘들기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떤 기준으로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나뉘는지, 그런 구분이 온당한 것이기나 한지 그 어떤 선생님도 토론시켜 주지 않았다'

놀라운 인사이트라 생각했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지 못하고 산것이 벌써 몇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완용평전'의 글을 보니 더욱더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술도 여자도 모르고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고 조선 왕실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으며,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전체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 동안 사실상 독립협회를 이끌었으며 독립문의 현판조차 그의 글씨일뿐더라 이 땅에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 법제화한 인물도 그였다'

물론 누가 옳다 그리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에 대한 비틀기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을 하게됩니다.

 

책이 너무 좋습니다. 2007년에 초판이 나온 책인데 10년이 지나서 봐도 크게 무리수가 없고 책 읽음에 나침판이 역할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김갑수의 나의 레종테트르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고, 그를 위해 어떤 책을 읽었고 추천하는지 새롭게 책을 한번 내는 것은 어떨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직무분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