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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Apr 17. 2017

연을 쫓는 아이를 읽고 한마디...

29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용서란 요란한 깨달음의 팡파르와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소지품들을 모아서 짐을 꾸린 다음 한밤중에 예고 없이 조용히 빠져나갈 때 함께 싹트는 것이 아닐까?'

 

'2004년 미국도서관협외 '청소년이 읽을 만한 성인 도서'에 선정'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어렴풋이 한때 이 책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읽고 나서 보니 이 책이 2005년 6월 초판 1쇄 발행 후, 2009년 1월(중고책을 구입한 이유로)에 개정판 89쇄가 발행되었으니 대단히 많이 읽힌 책임에는 확실한 듯 합니다.

 

'1975년의 겨울로 인해 모든 것이 확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로 인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로 만들기 참 좋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조만간 이 영화를 보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의 개연성이 있다고 살짝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사전에 충분히 개연성을 일으키기 위한 작업이 너무나도 잘 되어 있기에,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연을 쫓는 아이'라는 제목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알 수 없는 부담감 혹은 초조함을 책의 제목에서 엔딩에 도달하기를 기다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연, 쫓음 그리고 아이'라는 단어에서 최악의 엔딩이 있을 수 없음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의 안도감, 어쩌면 어려운 체력장을 아슬아슬하게 넘겼을때의 '하나 또 넘겼다'라는 생각과도 유사했습니다. 고등학생인 아이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학창시절에 혹은 더 어릴적에 아버지인 내가 모르는 문제 혹은 고민으로 부터의 '용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힘들면 영화라도 같이 봐야겠다 싶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나의 어린시절, 1970년에 태어나 70년대 중, 후반의 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작가가 말하던 그 풍경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었는지... 명절을 앞둔 목욕탕이 생각이 납니다. 욕탕을 가득 채운 아이들과 아버지들, 아이들의 묵은 때를 딱어야 한다는 어머니들의 미션을 수행하곤 했던 아버지들, 가정마다 아이들이 많았던 지라 아버지의 역할을 형들이 대신하곤 하기도 했던, 뜨거운 온탕이 싫었던 기억들, 그 시절의 쥐불놀이며, 숨바꼭질, 깡통치지... 그 속에서 나 역시 아미르와 같은 용서를 구할 혹은 용서를 해야할 일들은 없었는지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해야 할 일보다는 구할 일들이 많을 것 같다는 그러나 그런 행위의 모티브가 책에서와 같이 생겨나지는 않을 듯 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같이 그저 스멀스멀 드러나지 않도록 깊은 담요밑으로 숨겨야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겨울은 참 추웠던 듯 합니다. 김장 200포기를 나르고, 광에 연탄이 차이지 않음에 불안해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손이 트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과 손등에 콧물로 밴질밴질하여진 아이들의 째잘거림이, 다마치기는 아마도 손이 트지 않기에 가장 큰 적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알령굴이에서 이기려면 혹은 삼각형에서 다마를 잃지 않으려면 손이 트는 것에 대한 많은 감수가 있어야 했던듯 합니다. 다마를 따고 딱지를 따면 모든 것이 최상이었던 시절에서 어느덧 어머니의 연탄 걱정, 쌀 걱정, 김장 걱정이 이제는 방관자가 아닌 책임자로써 자리를 변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도통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아침에 길을 나서면서 여름이 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려운 이들이 좀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시절,

어릴적 생각을 해보니 이상하게 계속 추운 겨울에 있던 일들이 더욱 많이 생각이 나게됩니다. 화장실이라 불리우는 변소, '똥이 모이는 장소' 그랬습니다. 겨울에는 변소를 치울수도 없었습니다. 한강 얼듯이 변소의 변들도 꽁꽁 얼었으니, 에베레스트 산도 어쩌면 그렇게 쌓여진 것은 아닐까 살짝 어리석은 생각도 해봅니다. 산이되면 그 산의 정리는 아버지가 하셨던 듯 싶습니다. 마당에 하나뿐이 수도를 부엌으로 새롭게 놓았을때의 어머니의 기뻐하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수돗세는 겨울에 여름보다 더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조금씩 밤새 '졸졸졸' 나오던 수돗물도 생각이 납니다.

 

아미르와 나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비교해 봅니다.

'잊고 싶은 것은 잊을 수 있다'라는 동질성, 아마도 가슴에 저이는 상처로 남았을까? 미증유의 죄책감이 가슴을 저메이는 상처일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살아도 살아갈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몇번이고 썼다가 지운 글이 바로 '그러나' 였습니다. 그러나... 업의 생성과 잊음 그리고 반복을 생각하니 '그러나' 계속 머리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미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내심으로는 '잊자. 대신 더이상 그렇게 하지는 말자' 어쩌면 이것이 사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삶의 방식'을 생각해 봅니다. '아미르, 바바, 하산, 아세프 그리고 소랍' 아미르와 하산에게 바바가, 그리고 아미르가 소랍에게 이는 삶의 지속을 위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삶의 틀 속에서 선만이 혹은 악만이 존재하지 않기에, 악에 대한 대응으로 선만이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는, 혹은 '하산-아미르, 바바-소랍'의 구조는 정반합의 구조에 맞는 것인지도 살짝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아세프는, 세상에 존재하는 아세프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궁금함이 치솟고 있습니다. 강약은 있겠지만, 그의 존재는 세상을 구성하기 위한 역할은 무엇일지? 소랍과 아프카니스탄에 남아있는 그 무수히 많은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만 보다 시야를 넓히니 모든 것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듯 합니다. 어쩌면 '연을 쫓는 아이'만 수렁에서 나올수 있다는 것인지, 여건이 혹은 운이 되는 아니만 나올수 있다는 것인지... 새삼 할 일에 대한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기성세대라 불리워 지는 이들이 '소명' 은 아닐까 비약으로 선을 넘어가게 합니다.

 

어쩌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제치하와 광복, 6.25전쟁, 군사독재 그리고 촛불집회까지... 우리에게 희망의 불꽃이 되어야 할 '소랍'이 얼마나 많은지, 혹은 우리들이 그 소랍들에게 밝은 미래를 위한 용서 '구하기와 해주기'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미르 소합구하기가 다시금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너를 위해서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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