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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Apr 27. 2017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고 한마디...

32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사회혁명은 과거가 아니라 오직 미래로부터만 그 시적 정취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과거와 관련된 모든 맹신에서 탈피하기 전에는 자체적으로 시작할 수 없다. 이전의 혁명들은 세계사의 기억에 기대왔다. 자신들의 혁명 내용에 관해 환각에 빠지기 위해서다. 자신들만의 혁명 내용을 가지기 위해서는 19세기의 혁명들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땅에 묻게 해야 한다. 그때는 표현이 내용을 앞섰다; 여기서는 내용이 표현을 앞선다.'

-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한마디의 시작을 책을 마무리하는 '결론에 즈음하여'를 시작하는 마르크스의 이야기로 시작을 해 봅니다.


'과거가 아니라 오직 미래로부터만'

'과거와 관련된 모든 맹신에서 탈피하기 전에는 자체적으로 시작할 수 없다'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땅에 묻게 해야 한다'

'내용이 표현을 앞선다'


 책은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독에 몇번의 반복을 통해도 이 책으로부터의 내재화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의 즈음하여의 마르크스 글의 인용을 보면서 파농이 하려는 말이 이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위에 글을 역으로 판단해서 보니 이해가 좀더 쉬워지는 듯 합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1.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보다는 무엇을 이야기 해야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며, 2. 과거의 청산은 과거에서 정리가 되어야 하며, 3. 그랬었고 그래왔던 일에 대한 현실의 가치판단이 필요하며, 4. 그 모든일은 미래비젼에 기초해야 한다.'


글을 읽는 내내 계속 오버랩이 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유사한 역사경험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노예'와 '식민지'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았던 파농이 만일 지금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면, 현재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대한 재평가가 있었을까? 1952년에 쓰여진 글과 2017년에 쓰여진 글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사뭇 궁금해 집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대한 니즈가 사라지고, '검은 피부'라는 만족도가 높아졌을지, 아니면 '하얀 가면'의 니즈가 지속성장을 만들고 있을지 궁금해 집니다. 세상이, 호흡을 하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 무엇이 바뀌어야만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에 대한 답답함만이 머리속에 차이고 있는듯 합니다.


파농의 '검음'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 악의 근원이란 생각이 서양의 아프리카의 수탈을 기반으로 백인과 흑인의 판단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백과 흑과의 관계가 먼 조선시대에서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하는 것을 보면, 이는 '음양, 혹은 고저' 등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이지 인간의 색에 대한 기준이 아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말하곤 하는 '검둥이'라는 이미지는 52년에 쓰여진 책과 지금 정말 겪음에 대한 경우가 적은 나에게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정작 많은 경험이 있는 사회에서는 쉽지 않겠다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영화 베트맨을 예로 들어봅니다. 검은 가면, 검은 복장을 기본으로 온갖 사회의 악을 처리하는 멋진 용사 '베트맨', 줄곧 베트맨을 검은 망토에 검은 가면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가면을 벗었을때의 진실된 모습, 즉 그는 하얀 피부입니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럼 그렇지를 외치는 것입니다. 정의의 사도 '하얀 피부' 파농에게는 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베트맨의 역의 선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자체가 우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체성과 니즈에 대한 과거의 정리가 필요하긴 해 보여집니다.


책을 읽는 내내 파송에 대한 2가지 감정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부러움과 아쉬움'입니다. 하얀 가면을 쓴 '검둥이'로써의 삶, 그것도 1950년대에,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런 글을 쓴다는 호연지기가, 또한 그 젊은 나이에 지적성숙도에 부러움이, 반면에 이 글을 누구에게 읽게하고 그로부터 원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대한 준비의 부족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물론 이를 기반으로 후대에 누군가는 이 책을 기반으로 원하려는 부분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그 당시에 대중화를 통한 좀더 시간의 단축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혼자서 하는 것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논함에 있어서는 특권의식의 발로는 아닐까 하는 살짝의 의심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원인을 알고 대책을 만들수 있고, 대책이 생기면 바로 행동이라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책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런 예를 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흔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를 프랑스인이 읽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심정은 유리왕이 애련한 피눈물을 거울로 보는 듯 하다' '길동이 아버지로 부터 호부호형을 허 받았을때와 같이 지금껏 갈구하던 바라던 것을 얻었다' 파농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병적 측면의 이야기도 그는 쉽겠지만, 독자는...


책의 사진을 보면 책은 너무도 깔끔한 디자인으로 멋지게 포장이 되어있습니다. 장미의 가시와 같은 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건 어떨지...'검은 프로레타리아, 하얀 부르조아' 이렇게 쓰니 이해와 슬픔이 함께 몰려오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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