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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Jun 09. 2017

싸우는 인문학을 읽고 한마디...

46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사람들은 프랑스 철학은 윤리의 문제에 등 돌린 철학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이성을 불신하게 되었다면 이성의 법칙에 의존하지 않고서 윤리를 수립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푸코는 '실존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 문제에 답했다. 보편적인 법칙에 삶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획일화될 수 없는 독자적인 삶을 창안해냐는 방식이 실존 미학이다. 또 애마뉘엘 레비나스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란 화두 아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나와 윤리적 관계를 맺는 타인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단독자다. 바로 이 단독성이 타인을 윤리적으로 존중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인문학 3대 의무론에 반대한다.

 

 인문학은 반드시 알기 쉽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인문학의 소통 의무.

 인문학은 반드시 공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인문학에 대한 보호 의무.

 인문학은 다른 분야에서 토대 구실을 하거나 써먹을 수 있고 꼭 그래야 한다는 인문학의 유용성 의무.


 비평가 김현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나는 '문학' 앞에 '인(人)'자 하나를 더해 바꿔본다.


 -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인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 '


'마이클 폴라니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 늘 지식의 조건으로 전제되며, 통합하는 인격적

행위 없이 지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암묵적 지식이란 한 인격체가 성취한 지식으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성격을 띤다... 암묵적 지식은 완전히 검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전한 검증을 거친 지식 체계가 가능하다는 객관주의의 지식 이념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도 인간을 거울 같은 존재로 파악하는 잘못된 은유의 결과물인 유물론과 실재론을 전제하는 과학이 인간의 다른 활동들에 비해 특권적 지위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독을 하지 않으면 글과 의미가 한순간 증발해 버릴듯한 책이었습니다. 글은 잘 쓰여진 논문을 읽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볍지 않으면서 하려는 말을 하는 듯한 글쓰기, 아마도 글을 쓴 대부분이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인문학의 3대 의무, 즉

'인문학의 소통 의무, 인문학에 대한 보호 의무, 인문학의 유용성 의무'의 글이 더욱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책의 차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사실 '이런 주제들이 인문학인가? 혹은 이런 주제도 인문학 이구나' 싶을 정도의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에 앞서 먼저 책의 차례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차와 플로로그 에필로그만 봐도 책에서 말하는 디테일은 아니더라도 요지가 뭔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듯 하여...

특히 1부의 '팔리는 인문학'에서의 잡스 등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세련된 애플 숍에서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쌔끈한' 상품을 만지작거릴 때, 우리는 그것이 온갖 노동이 투입된 사물이라는 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지 오래이다. 그때 상품이라는 사물은 전적으로 그것을 고안하고 디자인한 인물들에게 소속된다'


 책에서 말하듯이 인문학이란 것이 우리 삶이 어떻게 사회화되는지 응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유치한

단초는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똥인지 된장인지 이제는 확실히 맛을 봐야 아는 세상이 된것은 아닌지 다시금 되뇌이게 됩니다. '아는게 힘인지, 모르는게 약인지?' 곰곰히 생각을 해봤는데, 역시

'모르는게 약?'으로가 더욱 가까운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잠시 인문학이 뭘까?라는 잡념속에 있었습니다. 소위말하는 '文史哲'이란 것을 말하는 것인가? 결국 검색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을 했습니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 스스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다름아닌 '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생겨났을까?' 그리고 나서 다시 인문학 3대 의무론 반대를 읽어봤습니다.


인문학은 반드시 알기 쉽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인문학의 소통 의무.

인문학은 반드시 공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인문학에 대한 보호 의무.

인문학은 다른 분야에서 토대 구실을 하거나 써먹을 수 있고 꼭 그래야 한다는 인문학의 유용성 의무.


이것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을지 사뭇 궁금함이 몰려 듭니다. '이기'에 앞서 '이타'를 생각한다면, '도움을 받고,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나누자'를 떠올린다면, 물론 그런 의미가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답'으로 사고를 바꾸어 봅니다.    

 

'보편적인 법칙에 삶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획일화될 수 없는 독자적인 삶을 창안해냐는 방식이 실존 미학이다.'


이 글을 다시한번 읽어보니 '위의 3대 의무의 반대' 새롭게 눈에 들어옵니다. '반대'라는 글에 갖힌 낮은 시야에 대한 자책을 하게됩니다. 누군가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만, 문득 프레임에 갖힌 사고에 숲에 대한 기억의 상실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원래의 문제로 돌아와서, '산을 왜 오릅니까? 산이 있으니...' 어쩌면 이를 벤치마킹하여

 

'인문학을 왜 연구하십니까? 궁금하니...'


'나'는 어떤지 '타'는 어떤지 무엇을 하는지, 과거는 어땠는지, 과거가 그러했으면 현재 혹은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지, 누구는 부자인데, 왜 누구는 가난한지, 이성적인 행동은 반드시 필요한지, 10개를 얻기위해서 1개는 버리는 것은 문제가 되는지...


 자연과학이 경제학이 삶의 행동의 준거가 되는 시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내말이 맞어. 왜? 성경에 있으니...' 자연과학과 경제학을 이런식으로 말하면 비약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인지는 모르겠지만, '과학과 인문'이라는 것이 다른 것인가 싶었습니다. 요지는 답을 있다가 아니라 답을 찾는 과정, 즉 답이라기 보다는 최적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궁금하니까요. 그러기에 옳다 그르다의 차원이 아닌, 다른 것이다로의 접근이 바람직해 보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책은 많이 팔리지는 않았을듯 보입니다. 섣불리 권했다가 '든척 난척'이라는 올가미를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필요성의 대중화의 요구를 원했다면 다른 방식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내가 알고 있다가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타가 알아 지속적인 타로의 전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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