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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Sep 05. 2017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를 읽고 한마디...

60번째로 읽게되는 책 입니다.

 

읽은 책이 3권쯤 되야 뭔가의 당위성을 느낀다는 것이 언제나 처럼, 타고남의 게으름을 느끼게 됩니다. 더군다나 읽은 책이 머리속에서 차분히 정리가 되어져 저절로 자판에 글이 가지 않을 경우에는 게으름에 회피현상마져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 '동양철학 인생과 맞짱뜨다'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을 하게됩니다. 책을 읽고 머리가 횡할때 하는 방식, 컽표지와 마지막 표지 그리고 목차를 다시한번 둘러보았습니다.

 

​'깨뜨리지 않으면 설 수 없고

 막지 않으면 흐리지 않고

 멈추게 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2500년 전 공자부터 현대 중국의 리쩌허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펼쳐내는 도전과 모험의 역사'

사실 책의 제목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맞짱'이라니... 하지만 읽는 내내 저자의 방대한 지식의 양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의 진수를 보게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넘쳐야 하고, 그것이 글이 되는 구나'

 

 ​물론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지극히 옳은 말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됩니다. 경제에서는 이루어 지지  낙수효과가 지식의 전이를 만드는 책에서는 이루어 진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장이 일반화에 미치는 것은 경계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살짝하게 되는 것도 사실인듯 합니다. 


'모든 반짝이는 것이 황금이 아니듯이...'


사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보여지는 비교됨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동양이라는 이미지가 '역동적인 변화가 없는 정체된 문화' 혹은 '복종과 인내로 대변되는 문화'라는 것을, 문득 '나'라는 주체를 타인의 객관화라는 시각으로 보자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사람을 그릴때 목이 없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에는 그렇게 보일 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지식을 그것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명분으로 책이 쓰여졌다는 것이 아쉬움의 발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라는 거대한 이해속에서 철학, 종교, 정치, 문학, 역사적 배경 등의 지식을 가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깨뜨리지 않으면 설 수 없고 막지 않으면 흐리지 않고 멈추게 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다' 사실 이 '不破不立' 한지만으로도 동양철학, 혹은 문화의 이러저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순수혈통의 왕족이 봤다면 9족을 멸할 말이기도 하겠지만, 이 글을 보면서 '혁명'이라는 것이 거창함이라는 단어외에도 많은 부분에 사용될 수 있겠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삶의 이모저모에서 너무나도 많은 효용이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때문입니다. 마오쩌둥의 역사적 식감에도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지경입니다.

 

'기준이 없다면 느냥 떠벌리는 것과 주장하는 것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한가지 주장을 가지려면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사안을 주장하려면 반드시 이치를 갗추어야 한다'는 순자의 주장을 보면,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들이 많았구나 싶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다소가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기득권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순자의 말속 에 뼈는 아마도 기득권 층에 그런 부류가 많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될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조상신, 자연신, 사직신 등 여러 신들은 모두 세계를 창조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어려움과 위기를 겪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호자 역할에 불과했다. 이렇게 신들의 역할이 제한되므로 세계의 전개와 운영도 유일신이 창조와는 다르게 설명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연', '기자이, 비유사지'로 설명되었다. '기자이, 비유사지'란 세계의 틀이 원래부터 스스로 그러하고 그렇게 되도록 만든 어떤 한 것도 없다는 뜻이다.  

'자연', '기자이, 비유사지' 놀랍고 놀라운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로 부터', 금수저 논란속에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없다'는 논란, 어쩌면 다시금 이 '기자이, 비유사지'를 되뇌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파악되지 않으면 마땅히 물어서 밝히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마땅히 따져서 끝까지 파헤쳐라', '사람은 살다 보면 늘 '문제' 상황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문제를 뜻하는 'problem'의 'pro'는 앞이라는 뜻이고 'blem'은 무엇이 놓여 있다는 뜻으로, 우리 앞에 무엇가 놓여 있어서 진행을 막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은 만들어 낸다는 法古創新이 바로 저자의 이런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종 말하던 내용인, 모호함을 명백화하여 답을 찾는다는 표현으로 새롭게 표현한다면 무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Problem -> Quesion ->Answer'

​ 

'<정기가>의 서문을 보면 감옥의 비인간적인 악조건을 칠기로 표현하고 있다. 여름날의 빗물의 수기, 펄펄 끓는 땅기운의 토기, 바람 한 점 없는 태양의 일기, 밥 짓는 열기의 화기, 곡식 썩는 냄새의 미기, 함께 있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냄새의 인기, 똥우줌과 죽은 쥐에서 나는 예기가 문천상을 괴롭혔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그는 건강도 신념도 잃지 않았다. '나를 해치는 저 기운은 일곱이고 나를 지키는 기운은 하나뿐이지만 하나로 일곱을 막아내니 무슨 걱정인가?' 그 하나의 기운이 호연지기이며, 그것을 다시 하늘과 땅의 올바른 기상, 즉 '천지의 정기'라 불렀다'

문천상이란 분이 역사에서의 자리메김이 어떤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호연지기 혹은 천지의 정기라는 것에 오금이 저린듯 합니다. 일생을 살면서 단 1초라도 그 맛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탁호의 수폐전견(隨吠前犬)을 보면 다시금 한 인생을 살면서의 타산지석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나는 오십 이전에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뭔가를 보고서 '왈왈' 짖으면 나도 따라서 '왈왈' 짖었다'

페르소나에 갖혀 내가 아닌 나로 살아야 함에 진저리가 납니다. 그러나 그 진저리는 역시 그 페르소나에 다시금 꽁꽁 숨겨지게 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酒님에 의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 酒 여...

 

'명말청초를 살다간 김성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길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불역삼쾌재삼십삼칙'이다'

놀랍고 또 놀라우니 기쁨을 감출수 없는 삶의 존재이유를 정말 손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마도 삶을 어렵게 궁핍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일상의 소중함이 불가함의 그늘에서 마른 잎으로 시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새삼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가설을 세웠지만 세심하게 사실을 수집하지도 세심하게 실증을 펼치지도 못한 것이다'

가슴을 죄는 머리를 띵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거울에 비추인 모습을 보는 듯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세심한 사실의 수집과 실증'에 대해서 좀더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체크하는 삶으로의 변화가 절실한 듯 합니다.


구구절절하게 되세김을 하다보니 동양철학이 문학이 서양에 비해 어떻구 저떻구하는 유아적 사고를 한다는 것 자체에 실소를 감출수가 없어집니다. 저자의 글을 보면서 다시금 法古創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케 되며, 길을 감에 암흑에서 밝을 빛을 보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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