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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Jan 25. 2017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고 한마디...

8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이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란 점에서는 사실 실망스러운 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설마 그런 결말은 아니겠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결말을 볼 수 있었고, 베로니카의 등장과 몇몇 환자의 정신병원서의 벗어남에 대한 동기부여에 대한 인과관계도 납득할 수 없으며, 병원장의 딸 베로니카의 등장과 파울로 코엘료의 등장도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겠으며, 자유의지를 왜 성적인 자위행위에 포커싱이 되어야 하는지도, 에뒤아르와의 사랑이라는 부분에서도 많은 부분

인과 관계가 부족한 소설인듯 보여집니다. 그 중에서도 베로니카와 에뒤아르의 성적 교합이 이루어 지지 않는 부분은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한국에서 2001년 2월에 1판 1쇄를 한 이후에 이 책이 2004년도 산 것으로(중고책 구입 시 한권이 덤으로 온 책), 그 당시 개정판 9쇄이니 제법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혔던 책이라니 사람마다 취향이 틀리다는 생각을 잠시하게 됩니다.

 

문득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책과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도 생각이 납니다. 아직도 잭 니콜슨의 생생한 연기가 눈앞에 떠오릅니다.

'베로니카와 맥 머피'를, 그리고 '에뒤아르와 인디언 추장'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로니카는 자살을 기반으로, 맥 머피는 감옥살이가 싫어 정신병동에 들어오게 됩니다. 두 번째, 그녀는 병동이라는 사회에 철저히 동화되어 그 삶을 영유하려 합니다. 반면에 그는 병실이기에 병실이어야 하는

현실에 강한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세 번째, 그녀는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병실을 떠나게 하는

이유를 생성해 냅니다. 자살의 실패로 조만간 죽을 여자의 피아노 소리 혹은 약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그러나 사실 동기부여에 대한 혹은 인과관계는 개인적으로 잘 납득은 되질 않습니다. 반면에 맥 머피의

권력에 대한 집요한 도전과 권력의 처참한 남용은 '만연함 혹은 당연함'이라는 사회의 대중에게 권력에 대한 대항이라는 동기를 만들어 냅니다. 마지막으로 베로니카는 죽음에서 삶으로 전이를 만들어 냅니다. 단순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이는 또한 주체적인 관점의 부재에서 시작을 하게 되고 이는 어쩌면 이고르 박사라는 권력에 의해 창조되어진 회생입니다. 반면에 머피의 경우는 생, 그것도 아주 주관적인 생에서 계획된 죽음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같은 부분이라면 권력에 의한 생과 죽음의 동시에 이루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에뒤아르와 인디언 추장'을 보면 둘 다 주관적인 실행자는 아니였습니다. 방관자였고 회피자였습니다. 그러나 에뒤아르는 베로니카에게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주관적인 실행자로 만들어지고, 그것은 일종의 성장소설에서의 개인적인 깨달음이라기 보다는 교육과 같은 깨달음으로 피춰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디언 추장은 처음부터 병원을 탈출하기 전까지는 방관자에 회피자로의 역할을 수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봉기의 수준에 이르는 행동을 만들어 내는 혁명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는 이타에 이끌린 교육이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대한 행동이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권력에 대한 강한 도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의 돌을 들어 유리라는 불멸의 권력을 타파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뒤아르는 교육에 이타적인 동기부여에 의해서 병실을 나왔지만 입실했을 경우와 비교해서 부모라는 큰 벽에서 어떻게 해결할 지에 대한 강한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녀가.... 그녀가 죽었어요." 만약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가 보였다면, 그보다는 "이제 그녀를 보내고 나의 길을 가야했다. 그녀를 위해서 혹은 나를 위해서..." 등의 자기의 노력을 기반으로 한 시작이 있어야 했다. 이는 성장소설에서 보여지는 성장에 대한 니즈가 배제되어 있는 듯 보여집니다. 인디언은 떠났고 그 이후에 권력에 대항할 무리를 이끌고 올지, 권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회피를 만들지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 되었구요.

 

'죽음을 통해서 죽음으로 벗어난다'라는 묘한 매력과 동시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매력이라 함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알 수없는 힘에 이끌림이 있어서 인듯 합니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피하거나 직면하거나 도전한다는... 그러나 '마약을 통해서 마약에서 벗어난다'라는

논리를 세우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위험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책에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미쳤다는 게 뭔지 알고 있냐고 했어요"

"미쳤다는 건 자신이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해. 마치 낯선 나라에 와 있는

 것 처럼 말이지."

소통의 부재, 어쩌면 이 시대를 통째로 비난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동 세대간 혹은 세대간

우리는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라 이제는 더욱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가대 국가로 혹은 종교대 종교로 서로의 옳음에 대한 선전홍보에 집중 뿐입니다.

미쳤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대한 소통의 부재를 말했다면 법에 대한 조언도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법이 만들어진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위해서가 아니라 싸움을 한없이 연장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보니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연장이 없이 바로 해결이 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반면에 인간에 의해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법은 그렇지 않다고 하니,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연장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연장이라기 보다는 법적인 일들의 계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은 영화로도 만들어진듯 합니다. 어쩌면 책에서의 손실으로 영화를 통해서 보상받을지 한번 봐야 할 듯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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