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네이트 Feb 07. 2017

흰 개를 읽고 한마디...

11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흰 개'라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이였습니다. 물론 느낌은 이외수의 '들개'와는 뭔가 틀린 느낌이였지만, 암튼 책의 제목으로 흔하지 않으면서 뭔가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한 책인듯 했습니다.

 

바트카(러시아어로 '키 작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는 뜻이라네요)는 비가 내리는 날 기르던 개 '샌디'의 초대로 집에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로맹 가리와 바트카의 우정은 시작이 되고 그 우정은 짐승에 의해서 끝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와 함께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한 짐승이 다른 짐승에게 우정을 보일 때 그 짐승의 판단은 대개 믿을 만하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좀더 사고를 넓혀 본다면, 어쩌면 짐승이 아닌 무엇인가에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도 있는듯 합니다. 인간이 짐승의 틀을 벗어난 다면... 그 우정은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부분은 로맹 가리의 와이프 진이 대하는 관계와 그 관계의 우정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인종간의 갈등, 부부 갈등, 이념의 갈등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자와 같은 시선으로 상황을 제시하지만, 로맹 가리는 기자의 역할을 훨씬 벗어나는 객관을 기반으로 한 주관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보여지기도 합니다.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많은 논조를 펴고 있으나, 그 논조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이 전혀 이루어 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류의 편승에 따른 인간형들- 책에 그려지는 대부분의 인간들-과 객관을 기반으로 한 비판적 시선의 내재화에 머무는 인간(로맹 가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을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얻어내는 인간(키스), 물론 어느 인간형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세상을 바꾸는 인간형은 무엇일까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류의 편승하는 인간형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실질과 외형을 구분해서 보면 또 다른 답이 생기겠지만... 조류의 편승형 인간이 승리를 하지만, 정작 그들이 얻는 '실질적인 득'에 대한 큰 의문이 들게 됩니다. '곰과 왕서방'의 관계가 떠오릅니다.

 

로맹 가리의 관계속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2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바로 '키스'와의 관계이고, 두번째는 프랑스의 파업노동자의 부인들과의 관계입니다. 로맹 가리는 왜 파업노동자들의 부인에게 있는 돈을 전부 주었을까? 여러가지의 갈등속에 내재화된 객관적 비판을 주된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던 그가 왜 그녀에게 있는 돈을 주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과거의 반영된 어머니의 모습에 이루어진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러시아와 유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어보이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속에서의 이데올로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만일 그 속에서 로맹 가리의 부르조아와 프로레탈리아의 관계가 인종간의 갈등으로와 같이 전이가 되었다면, 아마도 그런식의 행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키스', 흑인 행동주의자인 그의 이름을 왜 '키스'라고 했을지가 그와의 관계속에 드는 첫번째 의문입니다. 인간시장의 '장총찬'은 일반인이 가진 '권총'을 뛰어넘는 인간, 즉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할 수 밖에는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 맥락에서의 유리알 유희의 '크네이트'도, 어쩌면 흰 개인 '바트카'라는 이름도, 기성세대에 길들여져 변하지 힘든 존재임을 나태나고 있다면, '키스'에도 그 내포하는 의미가 틀림없이 있어보입니다.

일반적인 관계에서 틀별한 관계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첫번째가 바로 '키스'입니다. 그러나 그 '키스'라는 것은 관계의 전이에 있어서 선한 관계의 전이가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의 키스와의 관계는 선한 관계의 전이가 아닌, 반대의 경우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문득 '개와 함께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한 짐승이 다른 짐승에게 우정을 보일 때 그 짐승의 판단은 대개 믿을 만하다는 것 말이다' 이 글귀가 새삼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인간이다' 어쩌면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키스'가 된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

두번째는 '흰 개'의 죽음입니다.

'녀석의 눈에는 사랑의 신에게 배반당한 신자의 절대적 몰이해와 완전한 비탄이 담겨있었다. ... 나는 20분 뒤 진의 품에 안긴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의 몸에 상처의 흔적이 없었다. 녀석은 우리 문 앞에 몸을 둥글게 만 채 죽어 있었다'

'사랑의 신에게 배반당한 신자, 상처의 흔적이 없었다. 몸을 둥글게 만 채' 죽음을 둘러싼 이 3부분에 많은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원래의 바트만의 주인과 키스는 바트만을 사랑했습니다. 물론 방식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의 '신에게 배반당한 신자'로 바트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책에서 언급되는 모든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각종 니즈의 부합속에 결과를 얻지만 정작 바트만은 '배반당한 신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그러기에 상처의 흔적은 없지만 바트만의 내상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비단뱀의 세모꼴의 낯선 대응이 아닌 편안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를 해야할 지... 그러나 왜 '마지막 진의 품에 안겨있는 것인지?'

'흰 개'도 '검은 개'도 아닌 채로 로맹 가리를 물고서 어디론가 가버렸으면 좀더 이해가 쉬었을 텐데...

 

로맹 가리는 '흰 개'의 '검은 개'화를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흰 개'의 '검은 개' 화를 방관하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역시 미국인화되어 미국인의 과거사에 대한 속죄를 하려했던 것인지... 사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암튼 로맹 가리를 읽고나니 앞으로 그와의 만남이 지속될 느낌이 듭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내가 낯설다를 읽고 한마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