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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이트 Feb 17. 2017

영화관 옆 철학카페를 읽고 한마디...

13번째로 읽게 되는 책 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부류의 책입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뭔가 2개 이상을 얻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1타 쌍피는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철학과 영화의 두마리 토끼에 관한 책입니다. 물론 사실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았는지 되물으면 사실 한마리도 제대로 잡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철학이라는 너무 빨리 달리는 토끼를 좆다보니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토끼(영화)도 놓친듯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마리를 반드시 내 손안에 놓아야 겠다는 생각을 버리니 어쩌면 두마리 전부 내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책은 총 6개의 테마에 각각 3편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 각각의 테마를 보기만 해도 왠지 '철학스럽다'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 희망을 말하면서 '안개속의 풍경, 중앙역, 잠입자'라는 영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을 '마르셀, 케에르 케고르, 칸트'를 기반으로 풀고 있습니다.

- 행복은 '인생은 아름다워, 사랑의 블랙홀, 체리의 향기'와 '마투라나, 카뮈, 리쾨르'

- 시간은 '러브 레터, 박하사탕, 솔라리스'와 '아우구스티누스, 프롬, 쉘링, 바더, 하이데거'

- 사랑은 '파니 핑크,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매그놀리아'와 '아리스토텔레스, 프롬, 마르셀, 바티이유'

- 죽은은 '나라야마 부시코, 그린 마일, 제7의 봉인'과 '사르트르, 하이데커, 엘리아데, 비트겐슈타인'

- 성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욕망의 모호한 대상,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라캉, 마르쿠제, 라이히, 크리테바'

 

구구절절히 영화와 철학자를 쓴 이유는 철학자는 쓰다보니 썼지만, 영화만은 꼭 봤음하기에 나열을 했습니다. 사실 책을 보면서 저자가 말하는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해서 영화를 본다면 어쩌면 영화의 보는 재미가 배가될 듯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의미는 저자의 생각에 단순 뒷꽁문이를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의 교집합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를 따지면서 읽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사고의 깊음에, 삶과 관련된 주제(6개)관한 인생의 고수임에,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는 큰 틀 속에서의 사고를 주입하는 방식에 등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물론 아쉬움을 말하자면 저자의 책을 쓰는 의도가 철학에 익숙치 않은 이들에게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서 성찰이라는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면 좀더 문외한들이 읽기에 쉽은 용어와 이해하기 쉬운 비유가 있었다면, 즉 '허리상학적' 이야기를 '허리하학적' 이해를 돕기위한 글이 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百聞不如一見' 했듯이 한번 보았기에 백번 들음을 넘을 수 있다는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희망의 본질은 절망,

소원이나 욕망의 동반자는 걱정과 두려움이지만 희망의 짝은 오직 절망일 뿐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유일하게 나오지 않은 것이 '희망'이랍니다. 모든 재앙이 나온 상자에서 유일하게 나오지 않은 것이 바로 '희망', 즉 희망이 바로 재앙의 마지막에 있었고 그것이 나오지 않았다는 역설... 그래서 희망의 짝이 바로 절망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소원이나 욕망으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바로 '희망' 이란 놈인 듯 합니다. 절망과 희망의 연속성, 이것이 삶이 아닌가요? 이런 말은 어떨까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절망한다'로 그리고 다시 '나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고 하네요.

 

'믿음이란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설적 성격이다. '케이르케고르는 이러한 '역설적 믿음'에는 '어떤 힘보다 강한 무력함', '모든 지혜를 초월할 수 있는 어리석음', '광기의 모습을 빌린 소망', 그리고 '사랑으로서의 자기 미움'까지 함께 들어있음을 간파했다' 위대한 역설이 희망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 바로 사실이 어쩐지 나의 피부에는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희망으로 남지 않고 절망으로 산화가 되서 내재화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알랭은 그의 <행복론>에서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해주길 기다리는 왕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눈이 글을 따라가는 속도보다 머리가 훨씬 글을 앞서가는 듯합니다. 행복을 삶의 중요한 것을 사는 사람이 아마 거의 대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우리는 스스로 '행복'이 아닌 '불행'을 만들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나는 내일의 불행을 위해서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 믿어지시나요?

 

'실존주의가 파악하는 한, 우리의 일상적 삶은 시지프의 형벌과 같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삶에는 아무런 고정된 의미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이 자유를 '저주받은 자유'라고 했다.... 누구든 주어진 일상적 삶에 아직 낯설지 않다면, 이는 그가 아직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이며, 아직은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존이란 무의미에 의미주기이다'

삶에서의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것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옳은 방식인듯 합니다. 내가 나를 찾기 위해서 나로부터 벗어나 나를 본다는 것, 사람이 가장 잘하는 것이 훈수임을 본다면, 훈수의 강점을 살리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며,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어리석음에 있는 것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존재에의 용기는 바로 존재 자체의 기쁨에서 나온다' 이 말을 보니 앞서말한 사르트르 말과 매치가 쉽지 않아집니다. 그렇지 않나요?

 

'프리드리히 쉘링은 인간 의식의 생성, 발달과 시간성의 생성, 발달은 병행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인간의 최초 상태를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시간의 혼합 상태로 보았는데. 이 상태에서 의식은 아직 미지성 내지 폐쇄성에 기초하고 있고, 시간성은 아직 미분화 상태에 있다. 즉 과거는 과거화되지 않고, 미래는 미래화되지 않아 현재로부터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는 여전히 과거의 지배를 받으며, 미래는 아직 기대되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성, 즉 '그랬었다'를 외치는 이유에 대한 짧은 설명이 될 듯 합니다. 인간 의식의 생성과 발달이라는 측면을 그의 말을 기반으로 본다면, 나를 과거에서 놓고 '그랬었다'에서 '그리고 있고, 그럴 것이다'로의 전환 혹은 발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그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 또는 신비주의나 주술적 종교 등등에서 얻는 '도취 현상'에 몰두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쾌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이나마 소외감을 덜고 일체감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외감에서의 일순간의 해소는 바로 '중독'이라는 단어와 연결이 된다는 것이네요. 마약 또는 신비주의나 주술적 종교대신 '책'이란 단어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매치가 훨씬 더 잘 어울려 보입니다. 중독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방향성의 유뮤만 조미료로 첨가된다면...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가 필요한 많은 분들이 있어보여서요.

'프롬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그것은 사랑을 '사랑하는 능력'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대상'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인데 다만 사랑할 또는 사랑 받을 대상을 만나는 것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왔는데,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쉽게 다가오지 않는 말인듯 합니다. '사랑하는 능력'이 왠지 사라에 대한 전략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워해야 할 악, 곧 죽음은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큐러스의 금언인 이 말에 완전 반하고 말았습니다. '악' 과 '선'을 생각해보고, '죽음'과 같은 실체없는 것들의 대안적 단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없지만 그로 부터 당하는 괴로움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쯤이면 에피큐러스적인 삶에서 호흡할 수 있을지...

'쾌락주의자로서 에피큐러스가 추구하던 것은 첫째, 감각적이고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이었으며, 둘째, 적극적인 만족에 의한 '쾌락의 증가'가 아닌 '고통의 부재'에서 오는 영혼의 평정 곧 아타락시아였다.' 에피큐러스적인 사고에서 '아니라'와 '아닌'이 아닌 '와/과'를 사용하면 안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앞과 뒤의 순환적 관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인가요? 감각적이고 순간의 쾌락의 중독성에 의한 전환이 불가능하기에, 아니라면 '순환적'이면... 왜?

 

'라캉은 프로이드가 거의 동의어처럼 구분 없이 사용하던 욕구(need)와 요구(demand) 그리고

욕망(desire)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 인간은 동물과 달리 식욕, 성욕 같은 자신의 생리적 욕구를 언어로 표현한다. 즉 인간은 그 자신이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욕구를 언어화함을써 의식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의 언어적 상징적 표현이 '요구'이다. '욕구'는 기의(記意)이고 '요구'는 기표(記表)이다. 그러나 이때 모든 '욕구'가 언어로 표현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남아 있는 욕구'가 억압되어 무의식적 '욕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결국 생리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어두운 심연에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의식적 욕망이다.' 라캉의 생각은 여러모로 사용가치가 큰 생각이라 판단이 됩니다. 문제는 이 3가지가 어떻게 구분이 되어져 판단이 될 수 있을까만 해결이 된다면, 하지만 그 판단에는 아마도 또다른 개입에 의한 판단이 있어보여 지는데... 아무튼 가슴으로는 효용가치가 크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쉽지 않기도 합니다.

 

항상 한마디를 쓰지만, 편린들을 전체의 그림으로는 책한권을 이해하기는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다 읽은 후에 혼자 떠드는 것이기에...

영화에 대한 소개 한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게다게 영화에 대한 평과 그 평을 위한 철학적 기반까지 다루고 있으니, 충분한 읽독을 권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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