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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Apr 15. 2020

(비)성장을 위하여

윤이형, 쿤의 여행

 한때 ‘힐링’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나온 2010년부터 몇 년간이었던 것 같고, ‘힐링’이 유행이었던 만큼 ‘힐링’에 대한 비판과 조소 또한 유행이었다. 힐링은 IMF 이후 무한경쟁에 지쳐왔던 한국인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반영된 결과다. “남들보다 더 뛰어나라.”는 치열한 요구 앞에 나타난 “자라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는 위로는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어지는 담요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담요가 일시적인 일탈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명확했다. ‘힐링’이라는 단어의 유행이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헬조선’은 잠시의 일탈마저 꿈꿀 수 없게 된 지옥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헬조선’의 한국인들이 성장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힐링’과 ‘헬조선’은 비성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다만 힐링이 성장에 대한 위로로서 비성장을 추구했다면, 헬조선은 성장에 대한 냉소로서 비성장을 추구한다. ‘노오력’이라는 단어가 이를 보여준다. 2010년대의 한국사회는 비성장을 가치로 내세운다는 일관성이 있다. ‘쿤’은 그런 비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다. 나대신 자라주고 귀찮은 잡무들을 처리해주며 결혼까지 해준다. 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헬조선의 사회’다. 개인은 사실 별 의미는 없는, 동어반복적인 그것들에 모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유예한다.

 이와 같이 사회구조에 모든 책임을 전가한 채 자신을 그저 무고한 희생자로 인식하는 상태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선택에 유예 속에서 텅 빈 정체성을 가지고 있되, 그들 대신 책임을 떠맡는 장치, ‘쿤’이 그 텅 빈 정체성을 가려준다. 쿤을 때낸 주인공은 정체성 형성이 시작되기 전 단계인 사춘기로 돌아간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서부터 세계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는 C의 조언에 따라 아무거나 해보지만 그녀는 자라지 않는다. 쿤에서 떨어진 그녀는 순수한 공백의 상태고, 그녀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공백에 색을 칠해보려 하지만 공백에 어떤 색을 칠하든 공백은 공백이 된다.

 그랬던 그녀가 극회의 문을 연다. 극회는 과거 대학시절 가고 싶었으나 취업이라는 사회적 이유 때문에 가지 못한 곳이다. 그렇다면 극회는 그녀의 내밀한, 진정한 꿈이 아닐까. 그녀는 정말 그녀가 바라는 것, 그녀의 정체성을 찾은 것일까. 기성세대인 그녀가 자신의 낭만적인 꿈을 찾기 위해 온 그곳에서 정작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세대들은 “놀 때도 뭔가 쌓아올리는 듯 놀고 쉴 때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쉬었다.” 그녀는 “받을 해택은 다 받았는데 속에 든 건 없고, 나이 들어 여기저기 젊은 애들 있는 데나 집적거리며 친한 척”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이라 생각한 것은 그저 낭만적으로 꾸며낸 누군가의 지옥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정체성은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까.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가능하다. “무엇이든 되고 싶은 것이 그녀는 되어봐”라는 선배의 말에 그녀는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선배가 “세상에서 가장 있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려보라고 한다. 절대적 부정의 장소를 생각하면 반대편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질 수는 있는 나의 정체성이 떠오른다는 조언이다. 이 말을 듣고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알게 된 그녀가 간 곳은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원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쿤을 확인한다. 

 그녀가 정말로 있고 싶지 않은 장소는 아버지가 쿤이라는 껍데기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곳일 것이다. 그 부정의 장소의 반대편에서 그녀는 아버지 또한 “무언가를 견딜 수 없어 끝없이 쿤을 찾아다니는 불완전한 어린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쿤이라는 껍데기는 기만이지만 어쩔 수 없는 기만이다. 쿤을 때어낸 그녀가 결국 찾아낸 정체성이란 ‘쿤의 불가피성’이다. 물론 쿤에게 자신의 모든 책임을 맡기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쿤 없이 살 수 없다. 별 의미는 없는, 동어반복적인 그것이 있어야만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쿤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면, 우리의 빈 곳을 그대로 비워둔 채 살았다면 우리는 서로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평생 한 번이라도 집을 나서볼 수나 있었을까.” 힐링이나 헬조선이라는 텅 빈 틀에 우리의 일부분을 동일시해야만 우리는 사회로 나설 수 있다. 그러므로 “괜찮아요. 자라지 않아도.”라는 표현은 또다시 쿤에 의한 비성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편과 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불가피한 쿤을 통한 성장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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