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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Apr 15. 2020

친애하는, 지겨운 삶

기준영, 이상한 정열

 “모든 것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은 매력적이다. “민족은 상상된 공동체에 불과하다.”, “근대소설은 근대국가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낭만적 첫사랑은 현재의 삶에서 소급적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이 문장들에 우리는 동의할 수 있으며 때로는 빠져든다. 그래서 이 문장들을 가지고 “삶은 덧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쉽게 이야기를 끝낸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라는 문장 뒤에 나올 이야기다. 모든 것이 구성된 것이고 상상된 것에 불과할지라도, 분명히 무언가는 지속된다. 삶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우리는 지겨운 것들 때문에 휘둘린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그런 지리멸렬하고 지겨운 것들에 대해 “그것들은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하는 건 옳은 일일까.

 「이상한 정열」은 젊은 시절의 무헌과 말희의 짧은 연애이야기로 시작된다. 정말로 짧게 서술되고 끝나는데, 그래서 우리는 후에 중년이 된 무헌과 말희가 다시 재회하게 되었을 때, 아직 소설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젊은 시절의 순수한 사랑이 다시 등장할 거라 기대한다. 그러나 소설은 즉각 그 기대를 배반한다. 소설은 말한다. “과거의 순수한 사랑은 단지 소급적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무헌은 말희에게 전화를 걸지만 받질 않고, 편지도 두 줄밖에 쓰지 못하고, 어떻게 다시 말희와 연락이 되었지만 종교를 가지라는 충고만 듣고 헤어지게 된다. 그야말로 지리멸렬하고 덧없는 재회와 헤어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미덕은 재회와 이별의 덧없음이 아니라 그러한 덧없음의 지속이다.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듣고도 무헌은 다시 말희에게 연락한다. 이 연락 때문에 무헌은 말희의 아들인 군도와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아이인 군도와 군도가 떠드는 이야기는 무헌-말희 관계로부터 부수적인, 골칫거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헌은 그런 군도를 따라가고 말희의 남편까지 만나 개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눈다. 후에 무헌은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말희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보라색 꾸러미를 들고 그와 한 택시에 올라탔던 소년, 가전제품과 개에 정통한 사내, 다리에 흉이 진채로 나타난 옛사랑이 살고 있는 저편”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그것들은 이미 젊은 시절의 연애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무헌의 열정은 ‘이상한 정열’이다.

 결국 이 소설은 “모든 것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라는 문장 이후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의 사랑은 무헌이 낭만적으로 구성한 것에 불과했고 무헌은 “다시 평범한 시절”과 “익숙해지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무헌은 다시 무언가를 구성하려 한다. 그는 “때로 열이 오르고 야윈 채로 갈팡질팡” 하면서 보잘것없고 지겨워 보이는 것들을 “친애”한다. 그에게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 진리는 오로지 유물론적인 위상에 있다. 그는 더 이상 낭만적 환상으로 살지 않고 지겨운 사실들로 살지만 그에게 삶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벤야민의 말처럼, 삶을 구성하는 힘은 신념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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