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쿠만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믿기 힘들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줄게.
그날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후덥지근한 초여름이었어. 할 일이 없던 서규는 합정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지. 뭐, 허세를 부리려던 건 아니야. 요즘 독서라는 취미가 힙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말이야. 서규의 자취방 천장 위는 윗집의 테라스인데, 대낮부터 그 테라스에서 파티가 벌어졌거든. 그들과 달리 파티를 함께할 친구가 없던 서규는 자취방을 나와 카페로 향했지. 책 한 권을 들고 말이야.
챙긴 책은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나름 유명한 문학상의 작품집이야. 서규가 아이스카페라떼와 함께 처음 펼친 책의 페이지는 117쪽. 왜 처음부터 안 읽었냐고? 서규는 원래 끌리는 부분부터 먼저 읽거든.
김쿠만 작가의 단편소설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작가 이름부터 신기하지 않아? 소설 제목도 ‘과학문학’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 특이함에 이끌려 서규는 117쪽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지.
소설은 판교의 게임 개발 현장에 대한 묘사로 시작돼. 게임 개발자인 ‘연우 님’과 ‘지우 님’은 꼰대 팀장 때문에 회식 자리에서 고통받지. 그러다 어느 날 지우 님은 퇴사하고, 연우 님은 혼자 남아 <프로젝트 AAA>라는 게임을 개발해. 회사가 어려워지자 대표는 인공지능 팀과 <프로젝트 AAA> 팀을 합치라는 지시를 하지. <프로젝트 AAA>에 스토리텔링 인공지능을 넣어서, 인공지능이 게임 스토리를 만들도록 하라는 거였어. 하지만 <프로젝트 AAA>는 50%만 만들어진 상태에서 개발이 중단되고 말아. 그리고 <프로젝트 AAA>의 자료는 회사 지하 4층에 있는 서버에 유폐되지.
그냥 평범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 여기서 충격적인 반전을 알려줄게. 지금까지의 내용은 모두 스토리텔링 인공지능이 들려준 이야기야. <프로젝트 AAA>에 삽입된 인공지능이 자신을 만든 개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거지. 긴 시간이 지난 뒤, 지하 4층 서버에 유폐되어 있던 <프로젝트 AAA>의 인공지능은 ‘IT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되지. 하지만 50%밖에 개발되지 않은 옛날 게임의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어. 그저 자신을 만든 개발자인 ‘연우 님’과 ‘지우 님’을 기억하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낼 뿐이었지.
서규는 소설을 다 읽은 뒤 아이스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셨어.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지. 소설 속 연우 님, 지우 님과 똑같은 모습의 사람 두 명이 옆 테이블에 앉았거든. 우연의 일치인가? 하지만 그들이 나눈 이야기에 서규의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졌어. 그 둘은 서로를 연우 님, 지우 님이라고 부르면서 게임 개발 이야기를 했거든.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어리둥절해하며 혼란에 빠진 서규 앞에 소설 속 팀장마저 나타났어. 팀장은 서규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지. “게임 오버.”
앞서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지? 서규는 사실 내가 만든 게임 캐릭터야. 나는 스토리텔링 인공지능이고. 말도 안 된다고? 더 믿기 힘든 사실을 알려줄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사실 게임 속 캐릭터야. 당신의 살고 있는 현실은 게임 속 세계지.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서규도 그랬거든.
언젠가 누군가 당신 앞에 나타나 “게임 오버.”라고 말할지도 몰라. 그때까지 즐겁게 ‘플레이’하길 바랄게.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같은 재미난 소설을 읽으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