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반합'의 노동투쟁 버전 <송곳>의 종영을 아쉬워하며
<송곳>이 종영했다
노동자인 우리는 노동에 대해, 노동의 권리에 대해 너무 모른다.
노동에 관한 법과 규정은 물론이고, 바로 우리 옆의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같은 회사,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의 고통마저도 외면하고 망각하는 것이 우리지 않는가. 얼마 전 사놓고 역시 읽지 않고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라는 책은 그런 점에서 무척 소중한 책이다. 곁에 있었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채집한 책이다. 어서 읽고 싶다. 이런 시도가 산업 각 분야의 노동 현장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종영한 JTBC <송곳>은 우리(같은 노동자들)에게 무척 귀중한 시도이고 결실이다. 드라마 <송곳>은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을 12부작의 드라마로 연출했다. 현재 웹툰은 4부가 진행 중인데 드라마는 웹툰의 스토리 전개를 고스란히 따라가다가 9회쯤 그 스토리마저 돌파해 독자적인 결말로 끝을 맺었다. 웹툰과 드라마의 결말의 차이를 음미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나는 이 드라마를 한 편도 빠뜨리지 않고 ‘정주행’했는데, <송곳> 덕분에 노동, 노동자, 일, 회사, 자본주의, 투쟁 등에 대한 관심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과로사회>란 책을 읽으며 한국의 근현대 노동투쟁사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만 하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며 다시금 공부에 대한 필요성과 욕구를 느꼈다. 일단 그런 욕구는 뒤로 하고, 지난 몇 달 노동자로서의 나의 의식과 투쟁심에 불을 지핀(물론 아직 활활 타오르진 않았지만) 이 드라마의 종영을 기념(?)해 약간의 감상평을 남기고자 한다. 아직 드라마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이라면 이 글을 읽고 다양한 ‘이견’을 게진 해주길.
우리는 이미 불편한 길을 택했다
<송곳> 10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구고신 소장과 이수인 과장이 어느 지역노조 야유회에 참석했는데, 야유회가 진행되고 있던 공원에 어느 경찰관이 불쑥 들어와 훼방을 놓았다. 늙고 병든 일용직 노동자들이 술판을 벌이는 것을 보고 배알이 꼴렸는지, 자신의 한 줌 행정권이 무슨 권력이라도 되는 양 노동자들에게 야지를 놓았다. 그런 경찰관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격분한 구 소장이 득달같이 달려가 경찰관의 모자를 벗겨 머리통을 때렸다. 분노에 찬 격렬한 협박으로 경찰관을 굴복시킨 구 소장은 당장 노동자들에게 사과하라고 그 경찰관에게 윽박질렀다. 겁에 질린 경찰은 굴욕적으로 용서를 구했다.
이를 처음부터 지켜본 이수인 과장은 사태가 수습되자 구 소장에게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안내상이 분한 구고신 소장의 그 저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영래가 짓고 전태일재단에서 발행한 <전태일 평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청년 전태일의 육성이다.
데모라는 것은 ‘보여준다’, ‘과시한다’를 뜻하는 영어 ‘데몬스트레이션’의 준말이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시위라고 번역하는데, 이 시위라는 말이 오히려 데모의 본뜻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즉, 위세·위력을 보여줌으로써 겁을 준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떨게 한다, 그리함으로써 이쪽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강박한다는 것이 데모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데모라는 것은 진정이니 호소니 청원이니 건의니 하는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 조영래, <전태일 평전>, 275쪽
구 소장은 분명 ‘선생님’ 운운하며 미소를 입에 걸고 좋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 그렇게 하나 경찰관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리고 야유회는 계속 진행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격렬한 반응과 협박에 놀란 경찰관이 서에 돌아가 상부에 알려 보복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 소장은 굳이 위험한 길, 즉 터프한 길을 택했다.
그렇다. 터프한 길. 투쟁의 여정에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선택지를 만날 것이다. 온순하고 유순한 방식,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방식, 거칠고 위험천만한 방식.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하지만 이 질문을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이미 선택을 했다. 체제에 순응하고 자본에 적응하면, 비록 소박하지만 굶어 죽지는 않을 양의 밥그릇을 보존할 수 있음에도, 기어코 그 밥그릇을 내던지고 회사와 사회와 자본주의와 투쟁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는가? 그 순간 우리 삶의 자세는 이미 터프해지고 불편해진 것이다. 그리고 구 소장은 ‘적’ 경찰관을 향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주저 없이 적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기업과 신사적인 태도로 맞설 수 없다. 그 방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격렬하고 과격한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었는가?
협박과 폭행이 이어졌지만, 8시간 노동 운동은 계속됐다. 8월 7일에는 (해태제과) 껌부에서도 8시간 노동제 투쟁에 참여했다. 참여 인원은 점점 늘어나 600~7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8시간 노동 운동이 계속되자 다음 달 회사는 안양 공장의 남자 기사들 150여 명을 동원해 20여 대의 냉장고로 출입문을 막고 8시간 노동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껌부 노동자들에게 강제 노동을 강요했다. 껌부 밖으로는 수송 트럭, 자가용, 철조망으로 벽을 쌓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금했다.
- 김영선, <과로사회>, 169쪽
위에 제시된 해태제과의 노사 갈등은 불과 20여 년 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8시간 노동을 마치고 ‘칼퇴근’하는 노동자들이 회사 출입구에서 만난 것은 회사가 쳐놓은 철조망이었다. 슬픔과 분노를 넘어 웃음이 나온다. 회사는, 기업은, 고용주는, 사장은, 자본은, 그리고 인간은 왜 이리도 남이 노는 것을, 정당하게 쉬는 것을 참아주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억압하는 것일까? 잔인한 현실이다. 이 구역질 나는 사측의 태도에 노동자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대등하게 맞설 수는 있을까? 과연 온순하고 법적인 절차를 거쳐 이 거대한 악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정과 반의 합, 또 다른 오
<송곳>은 이처럼 투쟁이라는 ‘거부의 방식’이 지닐 수밖에 없는 태도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수인 과장은 그런 터프하고 불편한 투쟁에 대한 인간 본연의 거북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그 나약함의 껍질을 매회 주변의 도움과 그 자신의 용기로 계속해서 까부수며 ‘좀 더 나은 인간(혹은 투쟁자)’으로 거듭난다. 그런 점에서 <송곳>이라는 드라마는 헤겔이 말한 ‘오정반합’의 변증법적 법칙을 노동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사례에 접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정반합이라는 것은, 오(吾, ‘나’를 뜻한다)가 정(正)과 반(反)이라는 두 현상에 자꾸 맞물리고 뒤섞이며 또 다른 오로 도약하고 또다시 정과 반과 결합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헤겔은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단언했다.
이수인(을 비롯한 푸르미 노동조합원)이라는 나(吾)가 있다. 그리고 그(들)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투쟁의 방식이 있다. 이수인 과장은 그것을 실천한다(正). 하지만 사측을 비롯한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존재의 박탈에 이를 수도 있는 심각한 위협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수인은 주변 노동 현장의 다른 투쟁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리고 가장 든든한 조력자 구고신의 조언과 격려 그리고 구 소장의 삶 그 자체를 바라보며(反)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고 자신의 노동 투쟁에 대한 이론에 반영하며(合) 새로운 나로 거듭난다. 물론 단순히 구고신이 이수인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 오히려 드라마는 이 반대의 경우에 더 초점을 맞춘다. 구는 이의 투쟁을 지켜보며 자신의 지난 투쟁사를 회고하고 고민한다. 따라서 구와 이의 오정반합은 지극히 상호적이고 보완적인 작용이다.
‘송곳’이라는 표제는 회가 지날수록 악랄해지는 사측의 대응과 방해공작을 극적으로 이겨내며 성장하는, 즉 송곳의 뾰족한 끝 부분처럼 벼려지고 날카로워지는 푸르미 노동조합의 성장과정을 그대로 상징화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이수인이라는 신출내기 노조 간부가 현장에서 몸으로 겪는 노동 투쟁의 사례와 구고신 소장이라는 베테랑 노무사가 오랜 시간 투쟁하며 겪은 경험과 지혜 그리고 이론이 서로 팽팽하게 부딪히며 두 사람이 점점 송곳의 끝처럼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수인과 구고신은 <송곳>이라는 노동투쟁기의 양 축을 이끌어나가는 단단한 한 쌍의 송곳인 것이다.
이수인이 택한 길
이수인 과장은 노조 중앙위와의 갈등을 거치면서, 오가 정과 반을 반복하며 더 나은 오로 도약하듯 계속해서 성장한다. 이론에 매몰될 뻔했던 교조화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투쟁할 수 없다는 딜레마의 한계에서도 탈출한다. 그런 상징적인 모습은 11회와 12회에 등장한다. 그는 ‘더 많은 경험’을 내세워 해당 현장의 근무 노동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당장 내일의 한 끼를 걱정해야 할 ‘생계형 노동자’들의 형편을 무시한 채, 신자유주의 세계 자본주의에 맞선 강하고 용맹한 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푸르미 노조와 그들의 노동 현장을 이용하려고 하는 노조 위원장과 그 위 간부진들의 태도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길을 택한다.
이수인 과장은 간부만 남고 나머지 평사원은 전원 근무지에 복귀시킨다. 무력을 동원해 고객을 보이콧하는 ‘위법’ 행위를 거부한다. ‘쉽게 살자’며 회사를 향한 소송을 취하하라는 검사의 말도 묵살한다. 사실 이런 선택은, 즉 이수인이 택한 모든 투쟁의 방식은 웹툰 혹은 드라마라는 가상의 현실이기에 가능한 다소 작위적인 발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현실은 오히려 법도 조금 어기고 피도 좀 보고 살살 구슬리고 샛길로 빠지기도 하면서, 그때그때 적절한 표정으로 대처하는 ‘더 경험이 많고 더 오랜 시간 투쟁을 이끌어온’ 기성 지도자들의 ‘투쟁의 방식’이 더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수인 과장이 선택한 길을 지지하고 싶다. 비록 이수인 과장의 길이 조금 공상적이고, 그 결실 역시 재수가 좋았던 점도 없지 않아 있지만, 투쟁의 당사자들인 푸르미 현장 노동자의 처우를 먼저 헤아린 그의 선택이 옳아 보인다.
<송곳> 마지막 회에서 ‘위원장 탄핵’ 등 가시적으로 붉어진 중앙노조와 현장 노동자들의 갈등은 이처럼 중앙과 개별 현장의 투쟁의 방식과 저항의 강도의 온도 차이를 매우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세계 자본주의에 맞서 저돌적이고 용맹 과감한 투지로 돌격해 노동 혁명을 달성한다는 중앙 노조의 발상은 가상하지만, 당장 생계가 급한 현실 노동자들에겐 허무맹랑한, 무의미한 훈화 말씀처럼 들릴 뿐이다. 투쟁의 방법은 다양하다. 정답은 없다. 현장에 맞는 적절한 방법론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송곳>이라는 모의 훈련을 통해 각자의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좀 더 정교하고 적절한 투쟁 방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지현우가 동료들의 감사 메일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며 끝났는데, 이는 드라마 <송곳>이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지지를 표명한 저항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암시해주는 것 같다. 그것의 현실 가능성이나 한계 등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송곳>의 해피엔딩이 슬픈 이유
이수인 과장이라는 조금 특별한(혹은 특이한) 촉매제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무작위로 모여 있는 용액에 툭, 하고 떨어진다. 기성의 질서, 특히 부정의한 질서에 강한 반감을 일으키는 이 촉매제는 이내 핍박받는 비커 안 용액과 결합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침 노무사 고구신이라는 스푼이 비커 안으로 쑥 들어와 휘휘 촉매와 용액을 결합시킨다. 꺼질 듯 말 듯, 실험자조차 예상할 수 없었던 이 결합은 기나긴 화학 작용을 거쳐 용액은 매질이 되어 투쟁과 운동을 주변으로 전파시킨다. 그리고 투쟁은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투쟁의 일등공신 촉매제 이수인 과장은 좌천을 당하고 조용히 비커에서 증발한다. 요동치던 매질은 각자 현실에 복귀해 언제 그런 파장이 있었냐는 듯 다시 용액이 되어 아무렇지 않게 현실에 적응한다.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다시 복직되었고 일부 복지 조건도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인사 상무의 말처럼 투쟁은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투쟁의 선봉은 좌천을 당했으며, 얼마 뒤 노동자들은 그를 잊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의 더 큰 부당한 조치가 내려지면, 이수인 과장 같은 모난 돌이 회사에 기적적으로 또다시 등장하지 않는 이상 노동자의 삶은 한 단계 낮아지고 누군가의 삶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송곳>의 해피엔딩이 슬픈 이유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기에 드라마 PD나 작가를 탓할 수 없다.
<미생> 바로 직후 방영된 <송곳> 역시, <미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이지만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있었고 개선의 의지조차 표명하지 않았던 우리 삶의 가장 결정적인 현장, 즉 노동과 일의 현장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을 친근하고 일상적인 캐릭터, 그리고 어제도 오늘도 일어났던 평범한 사건들, 불행들을 중심으로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포착해냈다는 훈장을 얻었다. 두 작품을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아마 이런 점을 가장 높게 평가할 것이다. <미생>이 어떤 중견기업에서 벌어지는 화이트칼라들의 일과 사람 관계, 회사생활에 대한 철학과 고뇌를 담았다면 <송곳>은 조금 더 시선을 아래로 낮춰 대형마트 정규직, 비정규직, 파견직, 단순계약직 근로자들의 노동과 권리 그리고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았다. 어쩌면 이 두 작품은 제도권 교육 현장에서 배우는 사회, 도덕 교과서보다 학생들에게 훨씬 더 많은 자극과 영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단 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 주부, 노동자 등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성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게 깊은 자극을 준 이 드라마의 종영에 아쉬움을 표하며 감상평을 마친다.
추기
1. <송곳>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주제별로 구분해 좀 더 세부적으로 써보고 싶다.
2. 배우들의 연기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김희원의 '보통의 악인' 연기도 훌륭했고, 오랜만에 TV에서 본 정원중의 묵직한 연기도 반가웠다. 아이돌 가수 출신 예성과 박시환의 연기도 미흡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함께 읽으면 좋을 글
1. 진보와 진일보 사이에서('ㅍㅍㅅㅅ', 이선옥, 2015년 9월 17일): http://ppss.kr/archives/56793
2. 나무위키(웹툰 <송곳>): https://namu.wiki/w/%EC%86%A1%EA%B3%B3(%EC%9B%B9%ED%88%B0)
3. 한겨레 기획연재 - <송곳>으로 보는 노동개편 쟁점: http://www.hani.co.kr/arti/SERIES/739/
4. 웹툰에서 배우는,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 http://ddungsang.tistory.com/694
사진 출처
1. http://www.scoopnest.com/kr/user/ppsskr/644415021921906688
2. http://ddungsang.tistory.com/694
3. http://www.fmkorea.com/248843691
4.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070714
5. http://www.huffingtonpost.kr/seonok-lee/story_b_8429782.html
6. http://www.huffingtonpost.kr/2015/10/21/story_n_8345574.html
7. http://acomics.co.kr/archives/daily-best/201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