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지 않고 상실되는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꽤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이 예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뿐이지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약 한두 시간 뒤의 참사를, 불과 며칠 뒤의 사고를 늘 예측하고 있다. 단지 그 예측을 애써 무시하거나 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타이밍이다. 언제 ‘싫은 소리’를 할 것인가? 사태가 더 붉어지기 전에, 작은 사고가 더 큰 사고가 되기 전에,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번지기 전에 그 말을 내뱉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오가 있었네요.” “맞아요. 이 주임님이 지적하신 게 맞는 것 같아요.” “아뇨.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제가 애초에 요청 드린 사양으로 해주세요.” 이 말을 못하면, 정확히 말하자면, 이 말을 뱉을 타이밍을 놓치면 작은 구멍이 큰 구멍이 된다. 10분이면 해결할 일을 3시간, 아니 몇 주 마음고생하며 질질 끌려다녀야 한다.
지금도 꼬꼬마지만, 직장생활 초반에 나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 모난 사람보다는 둥근 사람이, 자기가 할 말만 하는 사람보다는 할 말도 꾹꾹 눌러 삼킬 줄 아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더 잘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직장에서도 더 인정받고 유능해질 것이라고. 이 부끄러운 자기고백을 하는 까닭은 물론 이 믿음이 매우 찌질한 자기변명이었음을 이젠 깨달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특히 내세울 특별한 무기(근속년수나 업계경력, 혹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기적인 능력치)가 없는 이상 누군가에게 ‘좋은 소리’를 할 기회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가 연신 ‘좋은 소리’를 흘리고 다닌다면 그것은 미소와 여유를 가장한 날카로운 가식일 것이다. 죄송하다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번엔 똑바로 해 달라고 언성을 높일 순간마저 선한 미소 뒤에 숨어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둘 중 하나다. 아주 무능한 사람이거나 곧 회사를 그만둘 사람이거나.
약 1년 전 출판사에서 큰 행사를 맡게 되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된 행사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던 중 동료와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당시 그 행사의 진행을 도와준 동료였는데, 그는 당연히 내가 결과 보고서를 작성할 때, 혹은 다 작성하고 나서 자신에게 그 보고서를 회람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처음엔 그에게 보고서를 보여주며 언제까지 검토를 해달라고 했지만, 급한 업무를 보던 그는 약속한 시간을 넘길 때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직급도 애매한 동료에게 보고서를 검토 받는 것에 배알이 꼴려 있던 나는 차라리 잘됐다는 마음으로 동료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보고서를 상신해버렸다. 이번 행사에서 자신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던 동료는 나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 분노했고 나중에 나를 따로 불러 자신의 서운함과 분노를 설명했다.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잘못했네요, 이런 얼마나 상처가 컸나요, 따위의 말을 주억거렸다.
사실 나는 그 자리, 즉 직급도 애매한 동료에게 불려가(?) “당신은 그렇게 하면 안 됐어요”라는 소리를 30분 가까이 들었던 그 순간을 지금도 끔찍하게 기억한다. 나는 물론 보고서를 (그가 지적하고 추가하면 좋겠다고 한 사항을 반영해) 다시 기안해 올렸으며, 모든 공치사를 그에게 돌리기 바빴지만 그 이후로 그와의 관계는 겉만 멀쩡하고 속은 말라비틀어진 썩은 감처럼 되었다. 물론 성격 좋고 화끈한 그 직원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문제는 소심하고 찌질한 내게 있었다. 지금 그는 회사에 없다. 그 갈등이 벌어진 지 약 8개월여가 지나 퇴사했는데,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그와 나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단 둘이 식사조차 한 번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옹졸하고 치졸하다. 물론 지금도 연락을 나누지 않는다.
내가 만약 그때 싫은 소리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봐요, 이 업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주관하고 집행했어요. 당신은 물론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결과 보고서를 검토하고 이래라 저래라 할 위치는 아닌 것 같군요. 그러니 당신의 의견은 감사히 반영하겠지만 이 보고서는 내가 자체적으로 기안해 상신하겠어요.” 조금 싸가지 없지만 이 따위 말이라도 싸질렀다면 어땠을까. 아니, 좀 더 거칠게, 이를테면, “나는 네가 갑자기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고서에 관여하겠다고 나서는 게 이해가 안 가, 그리고 이 보고서는 그렇게 열심히 쓸 필요는 전혀 없다구! 그러니 네 일에나 신경 쓰시지!”라고 쏘아붙였으면 어땠을까. 사이가 더 틀어졌을까?
지금의 나는 어쩌면 그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그러니까 고등학생부터 지금까지의 어언 10여년의 세월을 돌아보면, 나는 어떤 위기, 갈등, 마찰, 분노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상대방 혹은 어떤 문제의 촉발자에게 쏟아내기보다는 그냥 내 안에 가득 재워놓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그 사태를 빠져나가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갈등의 문제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므로 당연히 그 당사자 역시 내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내 인간관계를 조망해보면 그런 식으로 사라져버린, 그러니까 다툼과 격돌로 인해 그가 박살나거나 내가 박살나 관계가 틀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즉 나)의 일방적인 태도로 인해 관계 자체가 사라져버린, 하루키 식으로 표현하자면 상실되어버린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그를 상실했다.
나는 나의 상대방을 적으로 돌리거나 기꺼이 내가 그의 적이 되는 방식 대신, 그저 그와 나의 관계를 ‘없음’으로 돌려놓으며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참 찌질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나의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니까 그마나 남은, 앙상한 가지 같은 관계의 선이 언젠가 가늘고 연약한 실처럼 되어 뚝뚝 끊어져버리진 않을까. 그리하여 나, 라는 존재가 영원한 고립 속에 갇혀버리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실실거리는 사람 좋은 표정과 함께.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내 안에 응축된 화가, 오랜 기간 짓눌려 있다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압력밥솥의 김처럼 누군가를 향해, 혹은 나를 향해 내뿜어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