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만난 동기에게 '축하해'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
두려움에 휩싸인 키티는 그만 월터 페인과 결혼하고 말았다.
-서머짓 몸, 인생의 베일, 40쪽
13일의 금요일이었다. 동심이 사라진 탓인지, 비까지 축축하게 내린 13일의 금요일이었지만 괴기스럽거나 무섭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는 몇 년 만에 만나는 대학교 동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차를 갖고 온 친구를 배려해 약속 장소인 대화역에서 가깝고 큰 주차장이 딸린 대형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향했다. 결혼을 한다고 했다. 내게 청첩장을 줬다. 친구는 많이 변해 있었다.
‘親舊’의 글자 그대로의 뜻대로라면, 그와 나의 관계는 조금 어색하다.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낸 벗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집단과 학번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는 소속적 관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부러 금요일 저녁 시간을 내 나를 만나 청첩장을 건넸다. 그는 재수를 했기 때문에 나보다 한 살이 많은데, 벌써 여자를 만나 결혼을 기약하고 집까지 구해 신혼집을 차린다는 그를 보며 서른에 임박한 나의 처지와 불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혼이라는 커다란 사업을 위해 이렇게 동분서주 돌아다니며 청첩장을 건네고 결혼 준비를 하는 동기의 성실한—그러나 조금은 피곤한 수완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게 결혼이라는 것은 너무 멀어 불가능에 가깝기까지 한 요원한 일이다. 조금 좀스럽지만, ‘결혼’이라는 단어에 묻어있는 낭만과 환상을 털어내 정의 내린다면 나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한 여자(혹은 남자)를 만나 인생의 반려자로 삼고 혼인이라는 사회의 거대한 약속 혹은 법적 관계에 나를 귀속하는 일.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위할 것이라는 불가능한 약속을 많은 사람 앞에서 선서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 그리고 최소 1인의 동반자와 함께 꾸릴 ‘가족’이라는 생계 단위를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거나 갖추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일. 곧 태어날 자녀의 교육을 위해 최소한의 교양과 윤리를 습득하고, 자녀에게 교육할 삶의 태도와 방침 등을 확정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
결혼은 대화를 통해 유지된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세계를 공유하고, 그 공유하는 세계의 크기를 확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더 이상 공유하지 못한다면 파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 142쪽
이밖에도 많은 정의가 있겠지만, 굳이 더 쓰고 싶지는 않다. 이것들은 모두 ‘달성하기 어려운 삶의 과업’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밥그릇에 손대지 않고 내 밥그릇 하나 챙기는 것조차, 평범한 아들이 되는 것조차 벅찬 나다. 그런데 아내를, 자식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니 그 일은 내게 너무 아득한 나머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의 청첩장이, 그리고 봄이나 가을만 되면 다양한 방법—카카오톡 프로필이나 페이스북 담벼락 따위를 통해 들려오는 누군가의 결혼 소식이 마냥 반갑고 아름답지는 않다. 그것은 곧 다가올 사명 같은 나의 일이기에, 혹은 내게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남의 행복(혹은 불행)과 축복(혹은 저주)이기에 순간 울적해지며 한숨을 푹 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요일 저녁, 거의 5년 만에 만난 동기와 1시간 30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쉼 없이 이야기하고 거리낌 없이 대화하다’는 것이 수다의 정의라면, 아마 그날 그것은 수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겉으로 보이기에 나는 반가움과 막역함을 과시하며 ‘수다’라는 것을 떨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였고 좋은 일이라고 으레 알려진 결혼 소식을 가져온 옛 친구였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를 배웅하는 순간까지도, 그 쉬운 말 “결혼 축하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라서? 그의 행복이 내게 큰 손실을 미친다거나 그의 불행이 내게 큰 이익을 미칠 정도로 우리 사이는 그렇게 긴밀하지 않다. 아마 내가 그 말을 건네지 못한 이유는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좀스럽다.
타이틀 그림 출처: http://www.i-rince.com/m/post/2512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