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노 / 체코
여행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조금 힘들고 많이 아쉽다.
빈에서 프라하로 가기 전 브르노에 하루 머물기로 했다. 브르노에서 약 1시간 거리의 모라비안 카르스트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환선굴을 본 이후 나는 석회동의 신비에 빠져 있다. 미국에서는 뉴멕시코의 칼스바드에 가보려 애를 썼고(결국 못 갔다), 이번 브르노 여행의 목적 역시 석회동 모라비안 카르스트였지만...
빈에서 프라하로 가는 체코 국영 기차, 레지오 제트를 타고 나는 브르노에 내린다. 모라비안 카르스트를 보는 것 외에 큰 욕심이 없어서 마음이 한가롭다. 역내를 두리번거리며 나가는 곳을 찾는다. 중앙역사 안에 출구표시를 못 찾아서 상당한 시간을 지체한 후 택시 승강장까지 나온다. 긴 줄을 기다려 택시 트렁크에 짐을 실으려는데 이런, 배낭이 없다. 기차 선반에 올려두고 그냥 내린 것이다!
비상이다. 여권은 다행히 내 손에 있지만 기념품 몇 개와 상당한 현금, 신용카드가 들어 있다. 소매치기 유명한 유럽이라 늘 가방을 끌어안고 다녔는데 아예 놓고 내려 버리다니, 찾을 수 있을까.
레지오 제트 내부도 특이하다. 복도가 길게 나 있고 좌석이 있는 객실은 문이 달려 있다. 오래된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나 보던 열차칸 모습이다. 열차를 타면 음료를 무료로 준다. 생수 한 병과 커피, 티 등을 주문할 수 있다. 간단한 식사나 주류를 판매하기도 하는데 시중 가격의 1/10만 받는다. 나는 민트티를 주문했다. 민트 잎을 띠운 차가 내 자리로 배달된다. 열차 내 서비스로는 최상이다.
잃어버린 가방 찾기
브르노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하는 수 없지. 레지오제트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찾는다. 손이 전화번호를 검색하느라 바쁜 동안 머리엔 부정적 생각이 들어찬다. 가방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어. 헛수고하는 걸 텐데… 그나저나 어디로 전화를 하지?, 남은 돈이 얼마나 되었었지?, 고객센터 직원과 말은 통할까? 등등. 다행히 고객센터에는 영어 안내가 있다. 몇 단계의 자동응답기를 거친 후 겨우 직원과 연결된다. 상황을 설명하자 직원이 내 기차 예약번호를 받아 적는다. 엑센트가 심해 알아듣기 어렵지만 다행히 영어가 통한다. 나는 그의 직통번호 하나를 받는다. 가방을 찾으면 전화 주겠다는 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으나 두 시간이 지나도 무소식이다. 초조해진 나는 다시 전화를 건다. 직통전화라고 했는데 다른 직원이 받는다. 나는 긴 설명을 반복한다. 좀 더 애절하게 절박한 심정이 되어 가방 속에 돈과 신용카드가 있노라 얘기한다. 먼저 직원보다 좀 더 친절하게 느껴지는 직원이 전화를 대기상태로 둔 채 여기저기 연락을 취한다. 과연 가방이 돌아올까. 한참 후에 수화기로 돌아온 직원이 파란색 백팩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방은 이미 프라하까지 가버렸다. 그는 프라하에서 빈으로 가는 저녁기차 편명과 시간을 알려준다. 빈으로 가기 전 브르노에서 잠시 정차하는 기차를 마중 나오라는 얘기다. 긴 통화가 종료한다. 기차 시간까지 아직 다섯 시간 이상 남았지만 나는 브르노 역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녁 6시 45분, 빈에서 프라하로 향하는 열차가 브르노에 정차하고 열차에서 내린 승무원이 가방을 전해준다. 작전 종료. 기차는 고맙단 말을 할 새도 없이 플랫폼을 빠져나간다. 소매치기 들끓는 유럽에서 잃어버린 가방을 찾다니!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해프닝이지만 훈훈한 기억을 남긴 일이다. 내 얘길 들은 지인들 반응은 한결같이 ‘글감’이라며 놀라워한다.
동굴 구경은 물 건너갔다. 기차로 모라비안 역에 내린 후 택시를 타든지 걸어야 하는데 가방을 찾느라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난 시간은 오후 3시다. 종일 부슬비를 뿌리는 하늘도 초조한 마음에 부담을 준다. 동굴 가까이는 모름지기 거친 길일 테고 자칫 늦기라도 하면 종일 수고한 일이 허사가 될 수도 있다. 하루를 더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이곳에 다시 올 이유를 남겨두기로 한다.
브르노 역사 주변
브르노는 프라하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체코 제2의 도시다. 젊은 도시, 대학도시로도 불린다. 제2의 도시라고는 하나 브르노의 첫인상은 약간 어둡다. 도시의 규모가 워낙 방대하고 화려한 서울이나 부산을 떠올린 여행자라면 브르노의 첫 느낌이 당혹스러울지 모른다. 건물은 먼지 더께로 꾀죄죄하고 상점 주인들은 영어를 거의 못 하고 퉁명하기조차 하다. 도시 중심을 벗어난 숙소 주변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날씨 탓인지 노란색 외벽이 무겁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이 과거 공산 체제 국가였다는 깨달음이 든다. 폐쇄 사회 흔적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서도 느껴진다. 사람들은 모두 꼿꼿하게 서서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처럼. (나는 한국을 경직된 사회로 느낀다. 미국 유럽 등을 여행하다 보면 그런 생각은 더욱 견고해진다)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길을 건너던 서유럽과 대조되는 풍경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조금 무뚝뚝하다. 얼굴이 마주쳐도 웃어주는 이가 없다. 물가는 확실히 싸다.
모라비안 카르스트를 보는 것 외에 별 관심이 없던 브르노인데 슈필베르크 성과 173개의 계단을 올라 브르노 시내를 전망할 수 있는 시청사, 핑크 탱크 등 볼거리가 의외로 많다. 하루를 더 머무른대도 아쉬움은 여전할 터, 예정대로 떠나기로 한 나는 브르노 역 주변과 역에서 멀지 않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을 둘러보기로 한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당
베드로와 바오로 두 성인의 이름을 묶어서 성당 이름을 삼은 배경을 궁금해하며 페트로프 언덕을 오른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당은 체코가 자랑하는 국가 기념물이자 브르노 시민의 자부심인 건물이다. 외부는 84미터나 되는 고딕 리바이벌 풍 첨탑이 장식하고 있고,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진 로마 가톨릭 성당, 이 성당은 정오가 아닌 오전 11시에 타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야기는 30년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웨덴 군이 보헤미아 지역을 침공한다. 이때 스웨덴 장군이 정오까지 브르노를 점령하지 못하면 도시를 떠나겠다고 공언한다. 꾀를 낸 브르노 시민들은 한 시간 전인 오전 11시에 종을 친다. 여기에 속은 스웨덴 군이 공격을 멈추고 도시를 떠났다는 이야기. 전쟁으로 인한 타격보다 적군을 물리친 브르노인의 재치가 크게 느껴져 이솝우화를 읽은 듯하다. 30년 전쟁 동안 스웨덴 군을 물리친 유일한 도시가 브르노다.
성당 밖으로 나와 이끼 낀 돌벽을 따라 걷다가 전망대에 이른다. 한산한 브르노 거리가 내려다보인다. 레지오제트 직원들과 브르노의 옛사람들, 그러고 보니 숙소 주인도 현관을 들락거릴 때마다 말을 걸어 준다. 무겁게만 보이던 브르노가 따듯한 색조를 띤다. 비 젖은 성당을 누비는 동안 날이 저문다. 성당 이름 내력은 끝내 알아내지 못하고 나는 브르노를 떠난다.
브르노 기차역
민트 티. 레지오 제트를 타면 음료를 무료로 제공받는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당. 군데군데 보수한 돌벽은 세월의 흔적인가 보다. 이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오전 11시에 일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거리에서 커피와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