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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Sep 08. 2023

안아드릴게요, 오슈비엥침

크라쿠프 / 폴란드


오슈비엥침은 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식 발음이다. 기차 매표소 앞에서 아우슈비츠라고 하면 유리막 너머 직원이 오슈비엥침?이라며 억양을 높이면서 표를 건네준다.


첫날, 쉰들러 리스트 공장, 지하에 용이 산다는 전설을 간직한 바벨 성. 성모승천 교회

둘째 날, 오슈비엥침과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 광산).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은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기차로 15분 거리다.

2박 3일 일정의 크라쿠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은 일정에 밀려 가지 못했다. 폴란드에 다시 올 때는 비엘리치카를 보고 바르샤바로 갈 생각이다. 퀴리 부인도 만나고, 뭣보다도 우울하지 않은 폴란드를 기록하고 싶어서다.





오슈비엥침과 비르케나우 유대인 학살현장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리암 존 니슨이 주연을 맡았다. 나치 학살 시기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의 감동적인 이야기, 이 영화 배경이 크라쿠프다.

어제 체코 프라하에서 7시간 반 만에 크라쿠프 도착,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 크라쿠프 중앙역으로 나간다. 오슈비엥침에 가기 위해서다. 폴란드 여행은 폴란드가 아니라 오슈비엥침 여행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오직 그곳을 보러 왔으니까. 오슈비엥침은 오전 10시 이전에 입장하면 무료티켓이 가능하다기에 새벽부터 서두른다. 그러나 무료 티켓은 이미 매진, 영어 가이드 동행 투어 티켓을 산다. 결과적으론 독립여행을 한 것보다 잘한 일이다. 혼자 다녔다면 건물 한 동 한 동의 쓰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대한 오슈비엥침을 다 돌아보기도 어려웠을 듯하다. 가이드 덕분에 오슈비엥침을 본 후 버스를 이용해 비르케나우까지 안내받았다.

오슈비엥침 유대인 수용소에는 당시의 건물과 가스실, 주인 잃은 유품들이 처참하게도 생생히 전시되어 있다. 죽은 사람들의 안경 무덤, 신발들, 어린아이들의 신과 옷, 여행 가방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가스실에서 사망한 여자들 머리카락을 모아서 짠 카펫은 분노를 넘어 그저 슬프다. 프라하 고문실 풍경까지 겹쳐지며 부르르 몸이 떨린다. 지도자의 광기가 만들어낸 비극의 역사다.


왜 하필 오슈비엥침이었을까

왜 하필 오슈비엥침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슈비엥침은 지도 상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나치는 자신의 지배 하에 들어온 각 나라로부터 유대인을 실어 나르기 좋도록 하기 위해, 접근 용이한 그곳에 수용소를 마련한 것이란다. 유럽 물류 중심이 될 뻔한 도시 오슈비엥침이 같은 이유로 학살의 현장이 되었다니, 이 소름 끼치는 선택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가스실에 들어온 사람은 유대인뿐이 아니었다. 슬라브 민족, 집시 민족, 그 외 나치에 반대한 정치범들과 원치 않는 요소로 분리된 평범한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그중 유대인 희생자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유대인 중에서도 헝가리 유대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정식 명칭은 오슈비엥침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다. 철조망이 둘려진 수용소 시설은 나치 정예 친위대원 SS 병력이 감시했다. SS 대원은 수용소 통제와 감시탑 경계, 수감자 학살까지 담당했다.

수용소 내부는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게 낫겠다. 죽은 이들의 유품을 모아 놓은 사진은 고민 끝에 이곳에 남기지 않기로 한다. 처참함을 대하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직접 가서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다.

오슈비엥침 역 앞의 쓸쓸한 건물들


너무나 평온한 현재의 수용소 건물 입구다. 이리로 들어가면 가스실과 집단 수용시설이 늘어서 있다. 생각이 시야를 만드는 것인지 하늘조차 흐리다.


가스실의 내부와 외부와 소각장(우측 상). 저 굴뚝 위로 치솟았을 검은 연기와 비명을 상상해 볼뿐,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총살이 자행되던 죽음의 벽 앞에 꽃과 초가 놓여 있다. 벽 위에 유대인 깃발이 꽂혀 있다.


오슈비엥침 수용소 입구. 나치 학정을 고발하는 사진이 상설전시 중이다. 오른쪽은 철조망이 둘러쳐진 수용소. 건물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5번 건물에는 희생된 여자들 머리카락, 안경 더미, 짐을 쌌던 여행 가방, 신발 더미, 유대인이 기도할 때 입던 옷 등이 구겨지고 찢긴 채로 유리장 안에 들어 있다. 가장 끔찍한 범죄 증거인 여자 머리카락은 남아 있는 것만 약 2톤이라 한다. 나는 이곳에서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일행 중에는 고개를 돌리고 중간에 나가버린 사람도 있다.


카지미에슈 유대지구

오스카 쉰들러 공장. 크라쿠프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가방을 기차역 라커에 두고 오스카 쉰들러 공장으로 향한다. 공장까지는 전차로 15분 거리. 공장은 유대인 지구 카지미에슈에 있다. 쉰들러 공장을 견학하기 위한 줄이 저녁 해가 담을 넘은 시각까지도 줄지 않고 있다. 벽에는 당시에 살아남은 사람들 사진이 흑백으로 붙어 있다.


쉰들러 공장을 나와서 카지미에슈를 천천히 둘러본다. 검게 그을린 건물들, 총 자국 선명한 건물들이 거리에 우정 방치되어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 채 역사를 짊어지고 서 있는 건물들이다. 한두 채가 아니다. 집주인 이름이 쓰인 낙서가 선명한 집도 있다. 이런 건물들로 마을은 침통하고 침체된 듯 보인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면 카지미에슈는 살아 있다. 다만 마을 전체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그 흔적을 지우지 않고 있을 뿐이다. 참담했던 그 시간을 말로써는 다 설명할 수 없겠기에 말이다.

나는 카지미에슈에서 점심을 먹고 예쁜 카페에서 차도 마셨다. 나의 수집품목 1위인 ‘행운의 개구리’도 5개나 샀다.

평화롭기만 한 크라쿠프 비스와 강



저녁을 맞는 비스와 강.



바벨 왕궁과 왕궁 지하에 산다는 불을 뿜는 용. 석양을 받아 참 예쁘다. 이 용은 시간에 맞춰 우람한 소리를 내며 실제로 불을 뿜어댄다. 넋 놓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카지미에슈 유대인 마을의 현장 증언.



크라쿠프 영웅광장. 의자가 있는 광장. 수용소로 향하는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그들을 싣고 갈 기차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름이 왜 영웅광장인지는 의아할 따름이다. 통곡의 광장이 아니려나 싶은데…. 삼엄하게 놓인 의자들, 나로선 한번 앉아보기도 두려웠다. 집에서 가져온 의자에 앉아 있다가 기차가 오면 의자는 버려진 채 주인은 홀로코스트로 떠났다. 무서운 외로움의 파편인 이 청동 의자는 모두 33개. 의자 옆에 꽃을 두고 가는 이도 있다.


위 좌측 사진은 광장 한 켠의 약국이다. 독수리 약국. 위험 속에서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 약사 타데우스 판키에비츠가 운영하던 약국이다. 이 약국은 유대인을 위해 음식과 약을 조달했고 유대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오스카 쉰들러만큼이나 추앙받고 존경받는 인물이다. 억압과 공포 속에서도 ‘작동하는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홀로코스트를 최초로 외부에 알린 폴란드 군인이자 외교관, 얀 카르스키다. 유대인 묘지지구 옆에 그의 동상이 있다.


오스카 쉰들러 공장.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벽에 붙은 사진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줄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게토 벽. 머리가 둥근 것은 죽임 당한 유대인을 추모하는 의미라고 한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을 게토 지역에 모아 두고 이렇게 두꺼운 벽을 쌓았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유럽 점령국들 중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검은색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제3 국과 위성국, 회색은 점령국 또는 독일 통치 하의 지역이다. 1939년 이전의 국경이다. (사진: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역사와 현재, 한국어 안내책자에서 가져옴)




희생자 수를 밝혀 적어 둔 안내판에서 가이드가 설명하고 있다.


가스실로 가는 아이들이다. 노동력이 안 되는 아이들과 임산부, 노약자는 가스실로 보내졌다.


헝가리 유대인의 희생이 가장 컸다. 헝가리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가는 중이다.


비르케나우 제2 수용소다. 1940-1941년 사이 독일은 오슈비엥침 인근 8개 마을 주민들을 전원 게토 getto로 강제 이주 시킨다. 이들은 화학공장, 군수공장 등에 보내져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수용소 건설을 위해 인근 1천2백여 채의 가옥이 철거되었고, 수용소 관리동, SS 대원 숙소 등이 새로 지어진다.


비르케나우에는 국제추모비가 서 있다. 독일의 만행과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검게 그을린 가스실의 돌을 가져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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