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4) / 포르투갈
호세 사라마고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누군가는 한 번쯤 상상해 봤을 가상현실이 소설 배경이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운전 중 횡단보도 신호 앞에서 갑자기 눈이 먼 것을 시작으로, 눈먼 병은 삽시간에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전 도시를 휩쓴다. 눈먼 사람들은 시야가 백색으로 보이고, 그래서 이 병은 백색 질병으로 명명된다. 이 중 단 한 사람만이 감염되지 않아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는 설정.
눈먼 자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의 공포도 걷잡을 수 없이 커간다. 사람들에게는 먹어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만 남아 있게 되고, 먹이를 위해서 그들이 눈 뜬 세상에서 지켜왔던 고매한 성질들은 무력하게 팽개쳐진다. 가령, 눈 뜬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의사 아내(그녀만 정상 시력을 유지하고 있다)의 살인. 음식을 구하기 위해 여자들과 아내들이 창녀로 차출되는 광경을 막지 못하는 남자들. 남자들뿐이 아니다. 여자들조차도, 생존본능 앞에서 수치심을 내던지는 인간의 실존적 선택. 극단적 상황에서도 살아 꿈틀대는 성욕. 시체를 뜯어먹는 도시의 개들. 작가는, 실존적 선택 앞에서 짐승이 되어 가는 인간의 민낯을 사실적 문장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환란 속에서도 작가는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은 듯하다. 날짐승을 잡아먹던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집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우리에 갇힌 토끼를 풀어준다.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시간을 버틴다. 아직 이성이 작동하는 사람들은 합리적 선택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평론가들은 이 소설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정의한다. 그 리얼리즘 때문인지 좀비 영화보다 더 오싹한 공포다. 다행히 눈먼 자들은 다시 하나둘 눈을 뜨게 되고 소설은 눈뜬 자들의 세계로 돌아오며 끝맺는다.
호세 사라마고는 포르투갈 작가로 1998년 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크루즈 선이 정박하는 거대한 리스본 항구(Santa Maria Maior) 앞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3층 규모의 기념관에는 사라마고의 작가로서의 영광의 순간들과 기사들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된 그의 책들과 사라마고 두상이 전시되어 있고, 한국어 번역본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도시의 배경이 어디인지, 시간적 배경은 언제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리스본의 골목을 돌면서 그 여자가 음식을 들고 나온 지하실이 있는 슈퍼마켓이 여기일까, 그들이 먹이를 찾아 벽을 더듬던 골목이 여기일까 자꾸만 고개를 뒤로 젖히게 된다.
타구스 강가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호세 사라마고 기념관이다. 건물 외관이 독특하다. 외부로 돌출된 피라미드 모양의 작은 장식은 물고기 비늘을 상징한다는데 사라마고와 관련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인터뷰 영상과 노벨상 수상 장면. 노벨상 메달을 눈에 담았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다.
호세 사라마고 기념관 외양과 사라마고(우). 이 독특한 외관은 물고기 비늘을 상징한다는 설명을 듣는다.(좌) 기념관 옆 타구스 강변에 대형 크루즈 선박이 정박해 있다.(우)
호세 사라마고(좌)와 그의 책들(우)
유리장 속에 보관되어 있는 노벨상 메달과 사라마고의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