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진 이성숙 Oct 08. 2023

춤추는 유리꽃

단편 소설/ 이성숙

사랑, 그건 독이다. 왼쪽 가슴에 박혀 뽑아내지도 못한 채 고통으로 침잠하는 독. 산길을 오르는 내내 영인의 머릿속에서는 ‘사람 독’이 오토 플레이되었다.

                                                                      



춤출 줄 아세요?

 그럼요.

 막춤 말고요, 왈츠요.


 느닷없는 질문에 진수는 당황한다. 이런 종류의 농담에 익숙하지 않은 그다. 진수는 그녀의 질문을 호사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그런 답을 하고 싶지만 멋쩍게 물러서고 만다.

영인, 지구 바깥에서 날아온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여자. 엷게 쌍꺼풀진 눈에 커다란 동공을 지닌 여자다. 알맞은 키에 가느다란 몸, 옅은 혈색, 기품이 깃든 낮은 음성. 그녀가 온 후 쉼터는 조용하게 일렁이고 있다.


 진수의 답을 들으려고도 않고 그녀가 앞서 걷는다. 쉼터 기숙생은 혼자 돌아다닐 수 없다. 주변 숲에서 길을 잃기 쉽고 길을 잘못 밟아 습지로 들어서면 방울뱀을 만날 수도 있다. 숲에는 곰이나 늑대 같은 맹수도 출현한다. 볼디 산은 해발 3,0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이다. 쉼터는 아이스 하우스 협곡으로 오르는 등산길 중턱에 있다. 볼디 산의 수많은 등산로 중에서도 연중 시원하고 나무와 바람이 많은 곳이 아이스 하우스 협곡이다.


 진수가 몸을 반쯤 뒤로 돌린 채 그녀를 앞서 걷는다. 오는 사람이 많지 않은 숲에서 발길로 다져진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진수는 돌부리와 뒤엉킨 나뭇가지들을 걷어내며 길을 내고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늘은 초록이 짙어진 플라타너스 잎으로 가득 차 있다. 파도에 대양이 휩쓸리는 것처럼 바람이 나뭇잎에 휘몰아치면 숲은 제 몸을 흔들며 소리를 낸다. 사라락, 쏴아. 햇살을 비집으며 바람이 몰려온다. 바람은 그녀의 머리칼과 옷자락까지 훑어내며 기세등등하다. 그녀는 손을 이마 위로 들어 햇살을 가려보기도 하고 바람에 몸을 돌려세우기도 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그러다가 갑자기 묘사가 강렬한 리듬에 몸을 맡긴 무용수처럼 영인이 긴장한다. 이내 우람한 나무 그늘과 쫓듯이 달려드는 바람과 가녀린 몸의 여인이 하나가 되어 군무를 춘다. 도도한 햇살과 알알이 휘감아 오는 바람과 불덩이를 안은 여인의 강렬한 호흡, 숲이 달아오른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숨을 몰아쉬던 영인이 우뚝 멈춘다. 너무도 강렬한 빛이다, 절정으로 내달리던 춤을 갑자기 끝내버린 건. 그곳에 숲이 끝나 있다. 나뭇잎이 걷힌 공중에서는 햇볕이 와락 쏟아져 내린다. 진수를 향해 몸을 돌린 영인이 허약한 병사처럼 고꾸라진다. 바람이 멈춘 숲은 느닷없이 고요하다. 어두운 무대 위, 홀로 남은 댄서에게 조명이 한 갈래 떨어지듯 흰 태양이 그녀를 조준하며 발작적으로 빛을 뿜고 있다. 정신 드세요? 저 보이세요? 진수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몸을 흔든다.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흥건하다. 막 최면에서 깨어나듯 가늘게 눈을 뜬 영인은 눈앞에 진수가 있음을 보고 혼절하듯 다시 잠에 빠져든다. 얼어붙은 영인의 몸을 빠져나간 영혼이 다시 춤을 춘다. 비엔나 왈츠를 추려던 영인의 의지는 빗나가고 느리게 흐르는 ‘달 꽃’에 맞춰 그가 나타난다. 그는 영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어색한 듯 시선을 플로어로 보낸다. 베이식 스텝 후 내추럴 턴, 다시 베이식 스텝 후 방향 바꾸기. 반대 방향으로 회전할 때 그는 영인의 발을 밟지 않기 위해 플로어를 주의 깊게 걷는다. 영인이 춤을 이끌며 소리 내어 웃는다.


 7년 전이었다. 그가 댄스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날, 영인은 왈츠를 배우러 온 그를 처음 만났다. 지 선생이 그에게 몇 가지 동작을 가르친 후 영인에게 그의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지 선생은 사랑을 잃고 애달픈 곡조로 부르짖는 톰 존스의 델릴라를 멈추고 조수미의 ‘달 꽃(Moon flower)’으로 음악을 바꾸었다. ‘달 꽃’은 느린 왈츠에 잘 맞는 영인의 연습곡이었다. 그와 영인의 어설픈 춤이 시작되었다.

밤이슬 맞은 유리꽃


 온통 땀에 젖은 몸에 한기가 드는지 영인이 몸을 떤다. 진수는 자기 점퍼를 벗어 영인의 어깨에 걸친 후 그녀를 업는다. 병동을 향해 뛰는 진수의 몸에도 땀이 밴다. 얼마쯤 뛰었을 때, 영인이 진수의 어깨를 잡아 세우더니 그의 등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그녀의 흰 발이 살폿살폿 대지를 밟는다. 진수의 몸을 스치듯 회전한 영인은 리듬을 타듯 팔을 들어 올리며 진수의 손을 잡아끈다. 정지된 화면으로 연속 촬영한, 꽃잎이 피어나는 장면처럼 영인은 천천히 돌아 진수에게서 멀어졌다 돼 날아가곤 한다. 영인이 춤을 추는 동안 진수는 엉거주춤 그녀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다. 빙글빙글, 영인의 춤이 위태로워 보인다. 쉼터를 경계 지은 밭고랑을 지날 때다. 영인은 비에 젖은 담장이 무너져 내리듯 흙투성이의 치마를 펼치며 다시 풀썩 쓰러진다. 그녀를 안아 든 진수가 병동으로 뛴다. 영인을 방에 내려놓은 진수는 습관처럼 그녀의 체온을 재고 맥을 짚는다. 천적에게 쫓기다 멈춘 사슴처럼 영인은 숨을 할딱인다. 체력을 소진한 탓이다. 체온은 정상이지만 그녀의 맥박을 느끼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그녀는 힘겹게 살아 있다. 진수는 그녀에게 물을 마시도록 한 후 닥터 한에게 상황을 알린다. 영양죽과 비타민 주사가 처방된다.


 쉼터는 한쪽 구석에 숙소와 주방이 있고 주방 옆으로 작은 자쿠지가 있다. 자쿠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대개 직원들이지만 이곳 입주민들은 자쿠지를 지날 때마다, 내일은 자쿠지를 해야지, 라며 결심하듯 말하곤 한다. 12,000평의 마당은 영인이 한 바퀴 걸어 돌기에 알맞다. 마당 둘레에는 아기 손 같은 잎을 무성하게 펼쳐 든 플라타너스 몇 그루가 바깥세상과 경계를 이루고 마당 너머로는 쉼터에서 가꾸는 밭이 펼쳐진다. 밭과 쉼터 사이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적갈색 억새가 도열해 있다. 억새를 오른쪽으로 끼고 몸을 돌리면 등산로와 이어진다.


 마당을 벗어난 영인이 몽유병자처럼 산길로 향한다. 기력을 회복할 때까지 마당을 벗어나지 말라는 닥터 한의 당부가 있었지만 산 공기를 쐬는 것이 병색 가득한 마당을 걷는 것보다 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옆에서 진수가 걷고 있다. 춤을 추셨어요. 좀처럼 말을 걸지 않는 진수가 주어가 없는 문장을 건넨다. 제가요? 언제…?


 영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뭇잎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눈송이처럼 박혔다 스러져 내린다. 그녀는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시큰둥하다. 꿈을 꿨어요. … 춤을 췄던 거 같기도 하고요…. 영인은 진수가 알아듣지 못할 만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앞서 나간다. 그녀의 치마 밑으로는 흰 운동복 바지가 한 뼘쯤 내려와 있고, 어깨에는 얇은 패딩 슈트가 걸쳐져 있다. 몸이 따듯해서인지 어제보다 수월해 보이는 걸음이다. 발밑으로 도마뱀, 산토끼, 회색 청설모들이 허둥지둥 곁눈질하며 멈췄다 달아난다. 느리게 시작된 바람이 다시 세를 더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전쟁의 포격처럼 휘몰아 온다. 9월의 볼디는 바람이 진하다. 잔가지들이 사정없이 영인의 치맛자락을 낚아챈다. 잔가지를 뒤돌아보며 영인이 콧잔등을 찡그린다. 치마를 몸 쪽으로 당겨 여몄다 놓기를 반복하며 걷던 영인의 몸짓은 차츰 춤이 되어간다. 영인은 펫 어 케이크(왈츠의 한 동작)를 연기하듯 좌우로 몸을 돌리면서 하늘 속으로 날고 있다. 짧게 묶여 있던 그녀의 머리칼이 풀려 제멋대로 휘날린다.


 나뭇가지를 거칠게 휘젓던 바람이 어느 결엔가 델릴라를 연주한다. 앞서 걷던 영인이 돌연 진수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자기 앞의 댄서에 의지한 듯 몸을 뒤로 젖히며 양팔을 치켜든다. 흡사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국이다. 창백한 왈츠가 숲을 휘감아 돈다. 30여 분은 족히 춤을 춘 듯싶다. 나무 그늘은 끝나고 눈앞에는 얕은 개울이다. 뻥 뚫린 하늘에서는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갑자기 스텝이 꼬인 무용수처럼 영인이 비틀거린다. 그녀는 구조신호처럼 짧게, 피아니시모처럼 여리게, 신음을 토하며 무너진다. 쓰러진 그녀의 몸 위로 햇살이 뒤덮인다. 진수는 다급히 영인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한다. 가느다란 손목만큼이나 여린 맥이다. 호흡은 약하지만, 다행히 규칙적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 끝에 오는 강렬한 눈부심처럼 허약할 대로 허약한 영인의 몸이 갑작스러운 햇살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대지를 베고 누운 영인은 도움이 절박한 환자라기보다 비를 기다리는 유리꽃처럼 태연하게만 보인다. 물 한 모금이면 그녀는 당장에라도 투명하게 피어날 것만 같다. 초여름 언덕의 유리꽃, 그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소박한 흰 꽃잎으로 피었다가 비를 기다려 투명하게 변한다. 유리꽃은 비에 젖을수록 깨질 듯한 투명함을 발산하며 자신의 청초함을 드러내는 꽃이다.

연이은 탈수와 탈진은 영인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진수는 충실한 하인처럼 그녀를 둘러업고 쉼터를 향해 뛴다. 그녀에게 생존할 기력이 남아 있기나 한 건지, 진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방 안에 들어선 진수는 쌓인 이불 위로 비스듬히 영인을 내려놓는다. 영인의 몸이 길게 이불 위에 얹힌다. 진수가 다시 본능처럼 체온계를 그녀의 겨드랑이에 밀어 넣었다 뺀다. 미열이 있다. 맥박은 다소 느리지만 정상이다. 비좁은 방문 입구에 호기심 가득한 눈들이 모여든다. 진수가 응급처치를 끝내자 한 박사가 멕시칸 남자 간호사 카를로스와 함께 방안에 들어선다. 방 안을 굽어보는 노란색 조명등이 그녀의 얼굴에 명암을 만들자 핼쑥해 보여야 할 얼굴이 오히려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수런대던 눈길들에 동요가 인다. 자신의 나약함에 도취해 버린 여자. 쉼터 사람에게는 바닷가 포말에서 태어났다는 디오네의 딸, 아프로디테보다도 그런 영인이 더 신비해 보인다.


 영인, 어쩌면 건강하게 이곳을 떠날 유일한 사람. 그녀는 죽음의 그늘이 긴 이곳에 돌연히 날아든 생명체다. 한 박사가 영인의 이마를 짚어보고 손목을 잡아보더니 영양죽을 처방하고 안심한 듯 일어선다. 심한 탈진이다. 진수도 성경책을 안고 있는 김 할머니에게 영인을 부탁하고 뒤따라 일어선다. 진수의 귀밑으로 땀이 도르르 구른다.


 초록이 가득한 산정에 빨간색 체크무늬 점퍼스커트는 산기슭 어디서나 도드라진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쉼터로 오느라 옷가지를 챙겨 오지 못한 영인은 한 달째 같은 차림이다. 가끔 흰 체육복 하의를 치마 속에 덧입는 게 전부다. 볼디의 숲은 한여름이라 해도 아침저녁으로 0도 가까이 내려간다. 볼디의 기온을 견디기 위해서는 덧입을 옷이 필요하지만, 영인은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그 차림으로 견딜 모양이다.


 깊은 마취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영인이 몇 차례 눈을 떴다 감는다. 그러다가 힘겨운 듯한 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꾸려 하자 일어서려던 진수가 그녀를 부축한다. 머리칼이 빠져 털모자를 쓴 김 할머니가 반대편 벽에 붙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 고마워요. 누구에겐지 모를 작고 낮은 영인의 목소리다. 햇살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눈을 뜰 수가 없었는데 그다음은 모르겠어요. 어떻게 된 건지…. 너무 멀리 가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또 가요, 다 보지 못했어요. 몸을 이불에 기댄 채 돌아누우며 영인은 도톰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한다. 적진에 잘못 뛰어들어 기력을 소진한, 총명함이 살아 있는 영특한 포로처럼 영인은 살아 있다. 작고 가녀린 몸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자신이 빠져나오기 위해서 자꾸만 그녀를 괴롭힌다. 다시 가야 한다는 영인의 의지를 뒷받침하려는 듯 그때 주방에서 죽을 내온다. 진수가 영인의 어깨를 받쳐 이불에 기대앉도록 돕는다. 그녀는 조금씩 쉬어가며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녀의 손이 안쓰럽게 떨린다.


 방에는 침대가 없고 한국식 요가 깔려 있다. 요 밑으로 손을 넣으면 따끈한 바닥의 온기에 닿는다. 따끈함을 몸에 대고 싶은 사람은 요를 걷고 바닥에 눕기도 한다. 백인이나 멕시칸 환자들에게도 온돌방은 인기다. 죽 그릇을 물리고 영인이 모로 눕는다. 그녀는 기댈 곳 없는 다리를 가지런히 포갠다. 모로 눕는 건 영인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자세다. 이런 자세로 다리를 걸칠 곳이 있어야 하지만…, 영인은 하는 수 없이 이불을 돌돌 말아 가슴에 안고 몸을 웅크린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지 모른다면 그건 습관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그렇게 잠들어 왔다고 생각하며 영인은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벽이 다가온다. 시큼한 페인트 냄새가 후각을 타고 폐로 몰려든다. 모로 누워 그의 종아리에 다리를 걸치고 그의 겨드랑이 살냄새를 맡던 기억에서 아직도 해방되지 않았구나.


 벽에 붙은 침대 안쪽으로 그가 오른팔을 내뻗고 잔다. 영인은 반듯이 누운 그의 몸을 향해 모로 눕는다. 캄캄한 밤의 산장, 노란 전구가 바깥의 찬 기운과 대비되며 도드라진다. 그가 영인을 말아 안는다. 두 눈두덩이에 길고 따듯한 입맞춤, 눈두덩이에 닿은 그의 입술을 영인은 좋아했다. 따듯한 입김을 받으면 까끌까끌하던 안구가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마와 코를 애무한 그의 입술이 영인의 입술 위에 멎는다. 어느 여름 광장에서 솜사탕을 가만히 입에 물었던 것처럼, 그는 영인의 입술이 녹아 단맛이 흘러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벽을 보고 누운 영인이 제 몸을 만지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쓸데없는 것까지 몸에 주입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몸에 새긴 기억은 머리에 새긴 기억보다 오래간다. 몸이 이 지경으로 망가졌는데도 후각이 그의 체취를 기억한다는 것이 영인은 못마땅하다. 배신감에 떨면서도 그의 체온과 체취를 기억하고 있다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몸을 쓰다듬던 손이 왼손 약지에 돌출된 반지에서 멈춘다. 링 안쪽에 그의 영문 첫머리를 새길 뻔하다 관두었던 일을 생각하며 영인이 반지를 더듬는다. 의미를 잃은 반지는 사물일 뿐이다. 영인은 반지를 돌려보기도 하고 뺐다 끼었다 하기도 하다가 잠이 든다.


 춥다.

그치? 춥네.

춥니? 차에 가서 점퍼 가져올까?

응.


두 사람이 시차를 둬 가며 밤새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다. 한밤중의 마우이가, 할레아칼라 정상이 매우 춥다는 것. 먼지같이 많은 별이 영인의 눈에 말없이 쌓인다. 내려가자. 억누를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많은 문장을 제지하며 입을 연 건 영인이다. 지루하게 시간을 버티다 두 사람은 새벽에, 아직 달이 지지 않은 산길에 차를 몬다. 쉬이익,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흔든다. 영인이 창문을 내리자 벨벳처럼 폭신하고 유순한 공기가 차 안으로 빨려든다. 조수석에 앉은 영인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우이의 작은 공항. 그의 인천행 표는 오후 3시에, 영인이 타게 될 국내선 하와이안 에어라인은 같은 날 오전 10시 15분 출발이다. 체크인하고도 시간이 많이 빈다. 빈다… 공감대가 흐려진 사람들 사이에 놓인 시간은 흐물거리는 법이다. 이른 시간이지만 산에서 내려온 공기는 후텁지근하다. 새벽 수증기를 맞았기 때문인지 살갗에 끈적임이 묻어난다. 영인은 양손을 반대편 옆구리에 가로지른 채 공항 청사를 빈둥빈둥 기웃거린다. 한 바퀴, 다시 반대로 한 바퀴. 팔짱을 풀고 또 한 바퀴…. 시간이 그리 느리게 움직인 적이 있던가. 영인은 쉬지 않고 걷는다. 정물처럼 그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건 어쩐지 어색한 일이다. 공기를 무겁게 하는 습기가 사라지려면 태양이 솟아야 한다. 태양은 일순간 마우이의 습기를 날려버릴 것이다. 기억조차 사라져 준다면 좋을 것을. 영인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움직이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을 건다. 괜찮니?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이다. 괜찮아지기로 한다. 영인은 헤어지기로 작정한 연인 사이에는 남아 있는 수식어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안다. 그는 다만 밋밋한 시간을 어찌해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영인이 신지로이드 한 알을 입에 넣고 버섯 물을 한 컵 들이켠다. 기운을 차리려 애쓰는 중이다. 창밖으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그녀가 몸을 조금 움츠린다. 창이 닫혀 있건만 어깨로 한기가 든다. 전화기를 들자 액정에 날짜가 뜬다. 팔월이다. 쉼터에 온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다. 두 손을 엇갈려 바깥쪽 팔을 쓰다듬은 후 그녀는 테이블 위에 고소미를 쏟는다. 좌식 낮은 테이블은 밥상으로도 책상으로도 쓴다.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그녀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고소미를 배추벌레처럼 갉아먹기 시작한다. 식욕도 의욕도 형편없이 바닥이다.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작은 테이블에는 신지로이드 병과 칼슘, 비타민D가 나른하게 놓여 있다. 현실이 희미하게 살아난다. 희게 광이 나는 테이블 위로 고소미 잔해가 고운 밀가루처럼 엷게 깔린다. 누군가 올 때까지 약병과 고소미 흔적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눈에 띄는 일을 모조리 해치우는 건 무리다. 샤워까지 했으니 하루치 에너지는 이미 방전되었다.


 우리 샌드위치 하나 말까? 그의 목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며 다가온다. 달리 할 것도 없는 간이역 같은 공항에서 그녀는 그와 샌드위치를 먹는다. 샌드위치 먹자는 말을 그는 언제나 그렇게 한다. 국수를 말까, 말아먹을까 하는 것처럼. 오늘은 루스 크리스(Ruth’s Chris Steak House, 스코츠데일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가서 스테이크 말까? 저녁엔 블루 말자 같은 식이다. 우리 샌드위치 하나 말까? 환청같이 그의 목소리로 도포된 샌드위치가 쉬지 않고 귓전으로 말려들며 윙윙 소리를 낸다. 으읍! ‘샌드위치 말까, 샌드위치 말까, 샌드위치 말까….’ 그러는 동안에 참깨가 입 안에서 길을 놓친다. 고소미에 붙은 참깨 한 톨이 제대로 씹히지 못하고 어금니 앞 잇몸에 박힌다. 참깨같이 작고 단단한 씨앗을 입 안에 넣을 때는 윗니와 아랫니를 특히 신경 써서 정교합으로 씹어야 하는데 뇌가 통제력을 상실한 사이 사고가 났다. 잇몸이 욱신욱신 아파온다. 그녀는 몸을 가누며 욕실로 간다. 플라스틱 이쑤시개를 거머쥐고 꽂힌 참깨를 파낸다. 툭. 얇은 피막도 터지지 않은 통깨가 제법 깊이 박혔다가 나자빠진다. 아릿함과 개운함이 동시에 든다. 입 안에 피가 고인다. 영인은 가학적으로 치실을 한 번 더 잇몸 안으로 밀어 넣는다. 아아아, 아파…. 입 안에 고인 피를 뱉고 고개를 든다. 거울에 핏방울이 튀어 있다. 영인은 물 묻은 손으로 핏자국을 슥 문지른다. 거울 위에 투명한 분홍색 줄무늬가 진다. 줄무늬 위로 영인의 얼굴이 우렁우렁 일그러진다. 영인의 상기된 뺨 위로 눈물이 타고 내린다.


 방으로 돌아온 영인은 이불을 둘둘 말아 안고 눕는다. 머리는 바닥에 그대로 두고 다리에 베개를 고인 자세다. 상체는 천장을 바라보거나 발레 하듯이 허리를 약간 비틀어도 좋지만 다리는 어딘가에 올려놓아야 한다. 출출하다. 욕실에서 힘을 쓴 탓이다. 목울대 아래 있던 나비를 떼어 낸 몸은 방안을 혼자 돌아다니기에도 버겁다.


 갑상선암이었다. 기운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영인은 몸이 병든 줄도 몰랐다. 어느 날 싱크대를 붙든 채 아래로 미끄러졌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


 뭔가를 먹어야겠다. 영인은 먹고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싶지 않다면 살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벨을 눌러 사람을 부르거나 식당으로 내려가면 먹을 수는 있지만 바닥에 누워버린 몸은 도저히 들어 올려질 것 같지 않다. 물 젖은 솜처럼 눅눅해진 몸을 안고 영인은 헬 수 없는 푸르름 속으로 빠진다.


 더위를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그가 알몸으로 방으로 돌아온다. 그는 몸을 감싼 대형 수건을 영인 앞에서 풀어헤친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가 춤을 춘다. 두툼한 어깨와 가슴, 그 아래로 단단하게 뭉쳐진 근육이 좌우로 흔들린다. 시선을 차마 그곳에 두지 못한 영인이 이불을 끌어다 얼굴을 가린다. 영인은 이불속에서 키득거리고 그의 춤은 장난기를 더하며 격렬해진다. 영인이 그를 향해 팔을 벌린다. 그가 영인을 홀드 하여 방 한가운데로 이끈다. 흡흡, 두 사람이 서로의 살냄새를 마신다.


 들어가.


 영인은 그와 함께 샌드위치를 말아먹고 마른 긴 나무 의자에 몇 번을 걸터앉았다가 다시 레이를 파는 수레 앞을 서성인다. 레이를 만지작거리다 벤치로 돌아오자 그가 일어서며 한 말이다. 영인의 머릿속이 순간 실타래처럼 엉긴다. 이 밤을 떨쳐버리기 위한 마지막 인사는 무엇이 좋을까. 영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쿨하게 떠나고 싶다. 영인은 그의 앞까지 걸은 후 발을 멈추고 생각한다. 손을 내밀어 볼까. 그도 손을 내밀 것이다. 우리는 악수하고 헤어지겠지. 무심한 얼굴로 한번 쳐다봐 줄까. 그러면 배역을 마친 영화배우처럼 홀홀한 얼굴의 그를 보게 될 테다. 가만히 그이 앞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습관처럼 영인을 안을 것이다. 영인은 그를 보지 않기로 한다. 악수나 포옹 따위로 그의 체온을 안고 떠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소나기가 내려서 자신의 몸에 남은 그의 감촉들을 지워주길 바랐다. 영인은 한 손으로 가방을 받아 들고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청사로 몸을 돌려 걷는다.


 영인아! 등 뒤에서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영인을 부른다. 걸음이 잠시 느려지지만, 영인은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선다면 그의 뺨을 갈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뭣보다도 눈물이 타고 내린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건 그에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인을 태운 하와이안 에어라인이 피닉스로 향한다. 피닉스에 내려 자동차로 두 시간 더 가면 메사다. 두 사람은 단체여행객처럼 따로 도착하여 따로 떠난다. 따로따로 도착할 때만 해도 어떤 결말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를 보고 함께 식사하고 손을 잡고 걷기도 할 테니까. 그런 두 사람이 불과 사흘 만에 따로,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영인에게는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모자를 눌러쓰고 성경책을 읽던 김 할머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다. 영인, 자아? 할머니는 그녀 등 뒤로 다가앉아 영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시편을 읊는다. 영인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자 김 할머니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너무 기가 막히든지, 어이가 없든지,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사람들은 차라리 말을 삼킨다. 7년을 정리하는데, 고작 사흘이라고? 벽에 걸린 사진도 떼어야 하고, 그가 신던 슬리퍼도 버려야 하고, 옷장 안에서도 그의 것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가구에 남은 그의 지문들도 모조리 찾아내 지우고 싶다. 휴대전화에서 문득문득 튀어나올, 그와 함께 웃고 있을 자신의 사진도 지우고 싶다. 욕실에는 그가 쓰다만 샴푸가 그대로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시로 마주칠 어떤 상황에서 그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영인은 몸서리친다. 그의 차가 서 있던 빈 차고는 어떻게 눈감고 지나다닐 수 있을까. 영인의 가슴속 말들이 습기를 안고 가라앉는다. 마우이 공항엔 바람이 몹시 분다. 강풍을 이기려는 듯 인천행 표를 든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덟 시간을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인은 흐느낀다.


 그가 사진 한 장을 내민다. 검게 변해버린 그의 간이다. 간암 말리래, 3개월 남았다더라. … … 수술은? 수술은 머, 할 필요 없을 거 같아서… 안 하기로…. 드문드문 말을 잇던 그가 마지막에 흘린 말은, 돌아가야겠어, 다. 어디로? 영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돌아가야겠다는 그의 말이다. 돌아가야겠다는 말은 지나온 시간을 지우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인지, 그의 시간은 거꾸로도 흐르는지 묻고 싶지만, 영인은 입을 다문다. 간암 말기와 돌아가야겠다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고 있으나 가능하지 않다. 병든 몸으로 영인에게 갈 수 없다는 게 그의 구실이다. 영인에게 그것은 배신일 따름이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 백화점, 여자가 쇼핑백을 들고 다가온다. 권력처럼 넓은 미간과 클레오파트라를 닮은 매부리코, 미간만큼이나 좌우로 크게 다물린 입술을 가진 여자다. 여자와 그이 사이에 낯설지 않은 눈길이 오간다고 느낄 때 그가 영인의 손을 잡아끈다. 가자. 그에게 이끌려 나오면서 영인은 고개를 뒤로 젖힌다. 그리고 아직도 이쪽을 응시하고 있던 여자의 시선과 마주친다.


 무엇이 그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 건지 영인은 알지 못한다. 그녀가 그의 아내라는 것을 안 때는 자신이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는 사실만 선명했을 뿐이다. 결혼을 원하고 아기를 갖고 싶은 영인에게 그는 자주,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것이 정지신호인 것을 알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뒤늦게 들다니…. 하긴 알았다 해도 그때의 영인은 갈 곳이 없었다. 영인의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떴다 가라앉았다. 겨우! 병이 들었다는 구실을 대며 아내에게 돌아가겠다는 그 남자 앞에서 영인은 아연했을 뿐이다. 영인은 삼류소설 같은 맥락에 놓인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쉼터 분위기는 약간 침통하고 언제나 조금 흐리다. 때 없이 누군가가 실려 나가고, 작은 희망이라도 보이길 바라는 사람들이 새로 들어온다. 그들은 새로 온 환자를 몇 개월로 부른다. 병원에서 의사가 알려 준 생명이 남은 시간이다. 흐림, 그들의 관심이 거기 머물고 있을 때다. 흐린 후 갬, 괜찮게 살았다는 안도가 들 때다. 삶의 경쟁력이 살아 있을 때만 유효한 건 아닐 거라는 믿음이 쉼터의 하늘을 갬으로 돌려놓는다. 죽음이 삶보다 선명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쉼터를 떠난 후에도 사람들 뇌리에 오랫동안 살아 있고 싶어 한다. 그들이 애써 의식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은 그렇게 작동한다. 살아 있고 싶다는 원초적 소망과 시시각각 죽음이 임박한 자의 완전한 냉정 사이에서 그들은 갈팡질팡한다. 분명한 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몸이 쓰러진다고 해서 삶을 향한 그리움조차 스러지는 건 아니다. 두 다리를 절단하고도 몸이 날마다 썩어 들어가는 교장 선생님은 자신을 간호하는 부인에게 날마다 사랑을 고백한다. 자궁암 말기인 충청도 태생 미스 조는 매일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다. 조 선생의 표피는 주삿바늘에 찔린 자국으로 울긋불긋하고, 울퉁불퉁하며 황태 껍질처럼 메말라 있다. 복수가 날마다 차오르고 그때마다 소동이 반복된다. 고통으로 몸이 뒤틀릴 때마다 단정히 빗은 머리칼은 무참히 흐트러진다. 그조차 몇 올 남아 있지 않다. 삶을 비굴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인간의 존엄을 해치게 할 수는 없다. 조 선생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서 사랑에 열중한다. 늙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느라 편지를 쓰고 일터에 있는 애인에게 부지런히 문자를 띄운다.


 마우이에서 여행자들의 조우처럼 그를 만나던 날, 그의 눈은 약간 부어 있었다. 그 눈은 먹잇감을 낚아채려고 기회를 노리는 맹금류의 눈처럼 날 서 보이기도 하고, 심리치료를 시작한 아이처럼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돌아가겠다고 말하기 위해 그가 준비한 퍼포먼스였나 보다.


 쉼터에서 1킬로미터 정도 벗어나면 발밑은 산길로 바뀐다. 등산객이 오가는 길가 둔덕에는 은검초가 칼날같이 뾰족한 잎을 내밀고 앉아 있다.

은검초… 마우이의 할레아칼라 정상에 오르면 은검초가 쇠줄이 둘러쳐진 안에서 관광객을 맞는다. 쇠줄에는 사람 손이 닿으면 죽는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사람 독이 무섭긴 하지. 그의 목소리다. 그가 무심하게 사람 독이라고 내뱉은 말을 영인은 주워 담을 것처럼 입속에서 중얼거린다. 사람 독…, 그가 의도해서 흘린 말은 아니지만 영인에게는 두 사람 사이의 종말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들렸다. ‘사람 독’을 곱씹으며 영인은 어린 시절 모기 물린 다리에 침을 발라주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물파스보다 먼저 침을 발라주면서 사람 침에 독이 있다고 말했었다. 엄마가 침을 바른 부위는 더 이상 부어오르지 않았다.

사랑, 그건 독이다. 왼쪽 가슴에 박혀 뽑아내지도 못한 채 고통으로 침잠하는 독. 산길을 오르는 내내 영인의 머릿속에서는 ‘사람 독’이 오토 플레이되었다.


 쉼터 사람들이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죽음이 유예된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절실히 해야 할 일이 사랑임을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은 시간을 촘촘히 사랑으로 채운다. 결국, 사랑하다 죽는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사랑을 그만둔 것과 달리. 그리하여 삶을 패배로 장식한 것과 달리. 그는 모르핀에 의지하여 예정보다 3개월을 더 살고 떠났다. 그의 이름은 6개월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에게 예고 없이 더해진 3개월은 잉여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많은 6개월 들이 꿈꾸듯 사랑에 전념했던 것과 달리. 그는 삶에도 패하고 죽음에도 패했다. 영인의 접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이다. 배신을 기억하는 일은 고통을 수반한다. 갑상선을 떼어 낸 영인의 몸은 생각을 떠올리는 일에도 쉽게 지친다. 생각도 일이라,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이 소모되는 것이다.


 시월의 볼디는 적갈색 낙엽으로 치장된다.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계곡을 끼고 세워진 식당으로 불어온다. 날씨가 흐린 날의 숲은 휘파람 같은 처연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구월에 돌아가기로 한 영인은 볼디의 낙엽 속에 좀 더 머물 작정이다. 그동안 영인은 6인실에서 독방으로 옮겼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스웨터와 누비바지를 배달받았다.

 식당이 모처럼 왁자하다. 금요일은 쉼터 사람들이 왕과 왕후가 되는 날. 주방에서는 식탁을 금테 두른 접시로 차린다. 이동이 가능한 모든 사람이 그럴듯한 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위해 둘러앉는다. 환자용 지팡이를 괴도 뤼팽의 그것처럼 날렵하게 들고 중절모를 쓰고 나타나는 사람도 있고, 구슬 박힌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식탁에 앉는 이도 있다. 영인은 분홍색 앙고라 스웨터를 입고 그들 틈에 낀다. 금요일 아침은 시간이 무겁게 흐르는 쉼터에 강세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때 그들의 마지막 끼를 뿜는다.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테라스를 길게 빼낸 식당은 꽤 운치 있다. 식탁은 산이 길러낸 것들로만 차려지고, 금테 장식의 대형 접시 옆으로는 포크와 나이프가 분홍 리본에 싸여 놓인다. 예쁜 앞치마를 입은 직원들이 갖다 주는 음식을 환자들은 앉아서 받는다. 벽면에 늘어선 음식을 대열에 끼어 받아오는 것과 달라서 모두가 이날을 기다린다. 그것이 연출된 낭만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강요된 행복으로도 통증은 완화되니까.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건 오히려 아름다운 자각이다.


 쉼터, 하루를 귀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집. 그들이 내일 할 일을 얘기한다는 게 바깥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에 살아보면 안다. 그들에게도 희망과 절망이 번갈아 찾아들며 삶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섬광처럼 나타났던 희망이 긴 절망으로 화답하는 날이 많기는 해도 그들도 바깥의 당신처럼 내일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하루를 바삐 사는 당신이 모르는 사실까지도 그들은 다 안다.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빨리 소멸해 가는지를 그들 모두는 알고 있다.


 마른 몸매에 근육이 반질거리는 카를로스가 늙은 암 환자들 틈에 둘러싸여 있다. 어젯밤 그들은 1개월 화영의 부탁으로 카를로스가 운전하여 노래방에 다녀왔다. 화영은 노래방에서도 휠체어에 기대어 죽은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고 한다. 쉼터 사람에게는 어제의 일을 끊임없이 되새김하는 버릇이 있다. 희미하게 도사리는 꺼져가는 촛불처럼 자신의 생명이 사위어 가는 것을 그렇게라도 붙잡아 보려는 걸까. 영인은 사랑을 버리고 도망치듯 떠난 그를 떠올리며 쉼터 이야기에 경외감을 느낀다.


 주요리 접시에 샐러드와 밭에서 길러낸 토마토, 감자와 밀고기, 식물성 치즈 조각이 보기 좋게 담겨 있다. 서빙을 끝낸 진수가 제 접시를 들고 영인의 테이블에 합석한다. 8인용 원탁이다. 진수가 자리에 앉자, 영인이 업혀 온 사실을 모르는 옆 병동 사람들이 진수에게 인지 영인에게 인지 모를 질문을 해대며 앞다퉈 말을 건다. 어제 산책 좋았어요? 어디까지 갔어요? 거기가 어딘지는… 진짜 좋았어요. … 또 가고 싶어요. 영인은 그들의 호기심에 일일이 답한다. 거기가 어딘지,라고 말할 때 영인은 눈을 크게 뜨고 진수를 건너다본다. 네가 대답해야 한다는 명령 같은 눈빛이다. 거기 너럭바위까지 갔어요. 숲이 끝나고 햇살이 내리쬐는 곳요. 하늘 보이는 데요…. 볼디 쉼터 사람이면 다 아는 지점이다. 너럭바위, 근력 단련을 위해 환자들을 이끌고 한 박사와 진수가 늘 가는 곳이다. 거기까지 가면 체력이 떨어진 사람은 너럭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계곡물로 세수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계곡을 따라 500미터쯤 더 오르면 빈집이 있다. 거기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직 견딜 만한 사람 몇몇을 이끌고 직원들과 한 박사가 빈집을 돌아올 때까지 너럭바위는 그들의 휴식처다.


 누군가 식당을 나서면서 영인 앞에 커피를 놓아준다. 식사를 마친 영인이 환자들과 앉아서 잡담을 나누는 걸 보면서 진수가 영인과 자신의 접시를 정리한다. 영인은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어 찔끔거리고는 곧 내려놓는다. 그녀에게는 커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식혔다 마시는 버릇이 있다. 뜨거운 것의 속성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빠르게 달아올랐다 황급히 식어버리는 사랑 같은 거 말이다. 쉼터 사람들도 영인을 따라 커피를 식혀 마신다. 여인의 기품 있는 용모와 우아한 몸짓은 때로 권력이 된다. 게다가 죽음이 비켜 갔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죽음을 예약한 사람들 앞에 놓인 영인은 말 그대로 유혹적이다. 그녀는 죽음의 아스라함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색다른 존재였으니. 그들은 영인이 어딜 가든지 따라다닌다. 게다가 체크무늬 원피스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흙 잔디와 풀과 바위를 쓸고 다닌 그녀의 체크무늬 빨간 원피스는 치마 끝자락이 누렇게 변해 무거워 보이지만 그것조차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생명이 돌아다닌 흔적이니 말이다. 볼디 쉼터는 한 생명에 열광하고 있다. 심연에 닿을 듯한 그녀의 허약한 체력마저 신화처럼 부풀려진다.


 식사를 끝낸 무리가 자기 방으로 흩어지는 동안 영인은 마당을 벗어난다. 영인은 한 남자의 중력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그걸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만든 도식 안에서만 사랑을 했고 그러다 자기가 만든 도식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영인은 자신을 오버차지 over charge 해가며 그의 도식 한 귀퉁이에 머무르려 애썼던 지난날을 생각하자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몸에 공포 같은 전율이 온다. 동시에 발밑에서 돌멩이 하나가 튕겨 일어선다. 영인의 몸은 비틀거리고 머릿속은 감전된 듯 하얘진다. 진수가 달려온다. 영인은 진수의 어깨에 기대듯 쓰러진다. 바닥에 앉은 진수가 자기 몸에 영인을 뉜다. 영인이 빳빳하게 굳은 손을 들어 진수의 코앞에 내민다. 몸에 극심한 쥐가 난 것이다. 갑상선암 수술을 한 영인이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영인의 몸은 견디지 못한다. 진수가 들고 있던 칼슘과 비타민D를 영인의 입에 밀어 넣고 물을 건넨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신 거예요! 진수가 얼결에 큰소리를 낸다. 양 손바닥으로 물병을 거머쥐고 물을 들이켜는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몸은 바스스 떨고 손가락은 작동이 멈춘 기계처럼 뻣뻣하다. 칼슘이 빠르게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자 영인의 손에 마비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삶을 책임지기라도 할 것처럼 진수는 영인을 위해 칼슘을 준비하고 다닌다.


 바닥에서 흙냄새가 끼쳐오더니 심호흡을 삼킨 영인이 젖은 눈썹을 들어 올린다. 땅 내가 영인의 폐를 깨우나 보다. 영인은 마비가 풀린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려 공중을 휘젓는다. 예고 없이 끝나버린 화면이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영인은 분절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파지직 파지직, 그녀의 춤이 시작된다. 흰 양말은 축축하다. 재빠르게 회전하는 영인의 치마가 위로 부풀었다 내려앉곤 한다. 바람의 유희다. 언뜻언뜻 듣는 햇살조차 바람에 밀려다닌다. 하늘에서는 델릴라가 볼륨을 높이며 날아든다. 바람이 그녀의 팔을 치켜든다. 영인은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바람이 이끄는 대로 공중에 나부낀다. 영인의 이마와 목덜미로 땀이 맺힌다. 눈을 감은 그녀에게 바람의 구애가 거세다. 입맞춤을 끝낸 바람은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쉼터에 온 후에 한 번도 풀린 적이 없는, 그녀의 가슴 위에 가지런히 놓인 원피스 단추가 풀려나간다. 단추는 발끝까지 이어져 있다. 탈피한 짐승은 새로 태어나는 법. 껍질이 풀려나간 영인의 몸은 더욱 가벼워져 격렬한 춤이 된다. 영인의 맨몸에서 식은땀이 솟구친다. 흰 몸뚱이가 차츰 하나의 덩어리로 변해간다. 그때다. 영인의 손가락을 벗어난 반지가 가늘고 긴 신음을 토하며 허공으로 깊숙이 사라져 간다. (끝)



계간 <동리목월> 2023 여름호








  


















작가의 이전글 2023 나의 추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