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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Dec 22. 2023

선유도에 물들다 (고군산도 일주)

시 같은 카페 이름

사람이든 가게든 작명은 중요하다. 이름은 대상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유도에서처럼 한꺼번에 많은 시적인 광고판을 본 적이 없다. 섬만큼이나 ‘느낌’을 선사하는 카페 이름들은 선유도를 기억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글 제목으로 차용한 ‘선유도에 물들다’는 내가 들렀던 카페 ‘카페, 선유도에 물들다’의 이름이다. 섬 끝자락 외진 곳에서 발견한 이름씨다. 


그뿐 아니다.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에는 크고 작은 섬과 섬 주변으로 드나듦이 심한 해안으로 인해 뱃길이 복잡할 것을 염려하여 등대가 곳곳에 서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식, 등대. 섬을 거닐다 먼 시야에서 빨강 초록 노랑으로 도드라진 무엇이 보인다면 그것들이 등대다. 특히 선유도 남단 무인도에 기도하는 형상으로 앉아 있는 인어등대는 등대 사진 전문가들을 설레게 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기도하는 형상으로 두 손을 모은 인어 머리 위에 등대 불빛이 있다. 석고상처럼 강렬한 흰색이다.      



흰 몸 인어 전설

옛날, 깊은 바다에 용왕님의 사랑스런 딸 흰 몸 인어가 있었다. 흰색 몸을 한 인어는 눈에 잘 띄어 수면 위로 외출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날 흰 몸 인어는 사람들 눈을 피해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도 바다를 유영 중이었는데 그때 어디선가 슬픈 곡조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흰 몸 인어는 피리 소리를 따라갔고 그곳에서 더벅머리 총각, 덕배에게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눈부시게 하얀 인어공주에게 덕배는 반해버렸고 이들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그 바위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간 덕배가 풍랑을 만나 헤매다 다음 날에야 돌아왔다. 덕배를 기다리던 흰 몸 인어는 새벽이 지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덕배의 극진한 간호에도 흰 몸 인어는 살아나지 못했다. 덕배는 인어공주를 묻어주고 그 자리에 등대를 설치, 매년 정월 대보름에 흰 몸 인어공주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 인어공주 전설이 내 나라에도 있었다니 새로운 발견이다. 선유도 무녀도 등 고군산도는 섬 이름들에서 무속의 냄새가 물씬 난다. 그래서일까, 인어공주 등대 전설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쉴 섬선유도

오전 7시, 군산을 떠나 선유도로 차를 몬다. 바위산 선유봉(111미터) 자태가 두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 두는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 선유도. 늦장마를 몰고 온 태풍이 잠시 비껴간 일요일 이른 아침, 청명한 하늘 아래 텅 빈 도로를 질주하자니 신선이 따로 없다. 여행의 서운일 테다.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는 모두 다리로 연결되어 하루 일정으로도 다녀올 만하다. 고군산대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는 섬이 무녀도. 섬의 생김이 무당 춤추는 모습을 닮아 무녀도다.


무녀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한때 염전이 번성했던 바다가 꾸덕하게 말라 애잔한 풍경으로 사람을 맞는다. 주차장 어귀에서는 유람선, 제트보트, 세 발 오토바이 같은 탈 것을 마련해 둔 상인들이 손님을 부른다. 금돈시굴, 가마우지섬, 인어등대 등, 자동차가 닿지 않는 섬의 속살이 궁금한 나는 유람선 시간을 확인한 후 아침 식사를 위해 자리를 뜬다.


매기탕, 우럭탕, 꽃게탕… 메뉴판 앞에 서 있는데 벌써 군침이 돈다. 우럭탕으로 아침 장전. 나는 차를 몰아 선유대교를 건넌다. 천년을 부대끼며 흘렀을 몽실몽실한 자갈밭, 몽돌해변이다. 커피를 파는 작은 부스에서 라테를 사 들고 돗자리를 챙겨 해변을 걷는다. 오전 10시다. 부드러운 햇살 때문인지 맨발에 전해지는 자갈의 촉감이 따사하다. 검정색 몽돌에는 화석처럼 그림이 새겨져 있다. 하나하나 관찰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뒤로 물러난다. 그림이 그려진 몽돌은 이 지역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갯바위에는 조개를 채집하는 사람들이 몸을 아래로 옹송그린 채 어슬렁댄다. 나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돗자리를 펼치고 드러눕는다. 하늘을 이토록 온몸으로 받아 낸 적이 있던가. 몽돌을 헤치는 바다의 소음과 푸른 하늘로 수렴하는 세계. 무아의 아침이다. 몸을 일으켜 식은 커피를 들이켜는데 폐부로 빨려드는 건 오히려 바다다.      

햇살이 뜨거워질 때까지 바다와 놀다 몽돌해변을 빠져나온다. 섬 전문가들이 관광객을 위해 섬을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누었다고 한다. 쉴 섬, 맛 섬, 놀 섬, 미지의 섬, 가기 힘든 섬으로. 이쯤 되면 선유도는 쉴 섬이 되려나….     



가마우지섬

-새는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떨어진다.

선유해수욕장 끝에 가면 가마우지섬을 마주 볼 수 있다는 안내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뛴다. 가마우지섬은 로맹 가리 소설에 등장한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제목의. 페루 리마 앞바다에는 가마우지 똥으로 뒤덮인 조분석 섬이 있다. 가마우지는 육지에서 멀지 않은 섬에 살다가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육지로 날아와서 삶을 마감한다. 

가마우지섬, 새똥으로 온통 새하얀 섬은 장관이리라. 나는 기대에 잔뜩 부풀었으나 장맛비에 씻겨 나간 섬은 무심하게도 잿빛이다. 대장도 앞에 잡힐 듯 떠 있는 가마우지섬, 조분석 섬이 저기 있으니 대장도 어디쯤 후미진 해변에 가마우지의 투신처가 있을 법한데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허기진 속을 억지로 달래듯, 나는 집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만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선다.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소진하며 날아올라 급기야 공중에서 툭 떨어지는 가마우지. 페루 해변에서의 감동을 이 바다에서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던 나는 허탈하기 그지없다. 새는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떨어진다.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 가마우지의 생태, 위대하지 않은가.    

시간이 늦어 유람선을 타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노을 들기 시작하는 선유도에서 차를 돌린다. 놓쳐버린 것들을 위해서 다시 올 때는 섬 안에 숙소를 잡아야겠다.     


 (참고: 고군산도: 섬 모습이 산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 등을 포함한 63개의 섬을 통칭하는 말이며 이 중 47개는 무인도다. 고군산도의 중심이 선유도다. )

   

                                         시 같은 선유도 상점 이름들

                              


무녀도의 갯벌. 사람들은 갯벌체험을 위해서도 이곳에 온다.


선유도의 바다


가마우지 섬이 오른쪽 뒤편에 보인다. 


가마우지 섬 확대한 모습.


몽돌해수욕장. 아침햇살에 데워진 자갈의 감촉이 보드랍다.          



essayci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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