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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Dec 15. 2023

벌천포 해수욕장

                       

서산에서 서북 방향으로 운전하여 40분가량 더 가면 낯선 이름의 해수욕장 하나가 나온다. 벌천포다. 


끈적한 늦더위를 달래느라 집 앞 카페에 앉았다가 문득 휴대전화를 열어 ‘가까운 해수욕장’이라고 친다. 벌천포 1시간 반. 시계는 정오를 조금 지나 있다. 천안에 사는 지리적 이점 하나, 2시간이면 웬만한 곳 어디든 간다. 나는 찻잔을 비우고 카페를 나선다.    

  

자동차가 삽교천과 당진을 지나 서산에 이른다. 국도로 접어들어 초록 풍광에 빠지는 찰나 느닷없이 눈앞에 염전이 펼쳐진다. 나는 놀라 차를 세운다. 대학 때 오이도 염전을 취재한 후 나는 늘 염전이 그립다. 반짝이는 은빛 지표, 허리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뙤약볕에서 물레질하는 염전 농부. 바닷물이 모두 하늘로 솟으면 까칠하게 남아 뒹구는 하얀 돌덩이, 소금. 염전에 매료된 나는 소금수집 버릇까지 생긴 터다. 사해 소금, 히말라야 소금, 인도 소금, 이라크 소금. 나는 여기에 서산 오지리 소금을 더한다. 미국 유타 주, 솔트 레이크에 갔을 때는 소금 크림을 사 오기도 했다.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은 내 여행 버킷 리스트 상단에 올라와 있다. 머지않아 그곳에 다녀올 작정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나의 마지막 여행지는 오이도였다. 아니 그 소금밭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시화산업단지가 들어서 육지로 변해버린 볼품없는 땅이었다. 놓쳐버린 사랑처럼 그 허탈함이라니…. 그 후, 염전은 내게 연민으로 굳었다. 

    

상상으로만 남겨 둔 염전이 살아 있다니 나는 흥분한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운다. 밀애인 듯 옛사랑을 낚는다. 카메라는 어디를 향해도 신묘한 장면을 담아낸다. 사라져 가는 염전, 탈진한 그리움.    

  

염전과 회포를 나눈 나는 다시 달린다. 뜻밖의 염전을 만나서인지 여행이 경이로워진다. 눈앞에 숲이 나타난다. 길은 삼거리, 이대로 가도 되는지 의심이 들어 자동차 속도가 줄어드는데 작은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화살표와 함께 ‘벌천포 가는 길’이라 쓰여 있다. 마을 청년회라는 작은 글씨를 보면서 왼쪽으로 차를 돌린다. 해수욕장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숲길이다. 나를 앞서간 차가 돌아 나온다. 불안하게시리. 


마을 청년회 안내를 믿고 나는 용기 내어 앞으로 간다. 길은 논길이었다 덤불 사이를 지나더니 한참을 들어가서 아스팔트로 이어진다. 울퉁불퉁 느린 길이다. 바닥이 젖는가 싶더니 왈칵 바다 냄새가 달려든다. 샤워를 끝낸 사내아이가 앞으로 달려간다. 벌천포에 들어섰나 보다.    

 

바다를 마주 보며 도로가 빙 돌아간다. 길가에는 자동차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꽁무니에 텐트를 걸어두었다. 자동차들 틈에 야외용 테이블을 펼쳐 놓은 사람도 있다. 따로 캠프 그라운드가 없는 이곳 풍경이다. 소박하다. 자릿세를 내라는 사람이 없으니 편안하게 차를 세우면 그만이다. 깔끔한 화장실도 두 군데나 있다. 샤워장도 마련되어 있다. 요즘 유행이라는 차박 족에게 안성맞춤인 장소다. 취사가 금지되어 있으니 음식은 미리 준비해 온다. 그래서인지 해변은 깔끔하고 공기도 개운하다.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심호흡을 한다. 햇살이 밀려난다. 바닷물은 호수처럼 투명하고 해변은 몽돌밭이다.    

  

물놀이 장비를 챙겨 오지 않은 나는 슬리퍼를 신고 멀리 보이는 솔숲까지 걷기로 한다. 숲 가까이 오니 오른쪽으로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간조에 따라 물에 잠기기도, 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람들의 외지 출입은 물 때에 따른다. 느리게 살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나처럼 성미 급하고 역마살 돋은 인생에게는 살기 버거운 곳이다. 


벌천포 바다에 멸종 위기종인 흰발농게가 서식한다. 오른쪽 집게발이 제 몸보다 크고 유난히 희다. 인내심을 갖고 가만히 쪼그려 앉아 기다리면 흰발농게를 만날 수도 있다. 해안에는 흰발농게 모형이 조각되어 있다.      

바다를 향해 통유리를 낸 작은 나무집에 눈이 간다. 작년에 처음 개장했다는 방갈로다. 며칠 묵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룻저녁 20만 원. 성수기 요금이라 좀 비싸다. 관심을 보이는 내게 주인장이 다가온다. 눈 내리면 더 좋다고 겨울 바다를 보러 꼭 오란다. 눈 내리는 바닷가 통유리 앞이라니, 심한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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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천포에 눈 내리는 겨울을 예약한다.


벌천포 해수욕장 가는 길에 만난 오지리 염전


   오지리 염전 소금창고

                                                                                                                   

아직 사람의 발이 많이 닿지 않아 한가한 벌천포 몽돌해수욕장.     


해변 도로 끝에 있는 소나무 숲. 이곳에 방갈로가 있다.     


흰발농게 안내판 뒤로 보이는 길이 마을로 통한다. 밀물 때면 도로 위에 물이 차서 길이 막힌다. 


숲으로 갈 것만 같은 벌천포해수욕장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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