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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진 이성숙 Nov 23. 2023

비 오는 날의 제천

1박2일 : 의림지, 청풍호수, 구학산 중턱 온천, 약선 정식

        

 1박2일의 제천 여행에 나선다. 산세 좋은 청풍호수와 의림지를 걷고 난 후 온천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재래시장과 시가를 둘러볼 계획이다.      


 첫날

 여행이란 우연과의 조우다. 위협적이지 않은 비는 색다른 풍광을 선물할 것이라는 기대에 마음이 달뜬다. 의림지에 도착하여 우산을 펼친다. 분수와 인공폭포가 비 오는 날씨에도 시원함을 준다. 호숫가에 드리운 버드나무에는 이끼가 두껍게 앉아 있다. 의림지 조성 연대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삼한시대로 추정된다 하니, 저 푸른 이끼는 2천 년을 한 자리에 살아남아 인걸의 부침을 보아 왔으리라. 그 극진한 노고에 머리 숙인다.

 용추폭포로 향한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용울음을 닮아 용폭포라고도 불린다는 용추폭포가 비 덕에 수량이 늘어 쩌렁한 울림을 토한다. 물살이 거칠다. 폭포 위로 걸을 수 있도록 설치된 유리 전망대에 서서 아래 내려다보기. 어떤 이에겐 짜릿한 모험, 내겐 아찔한 공포다. 결국 나는 난간을 잡고 슬금슬금 옆으로 긴다.

 의림지 둘레로 소나무가 가로수인 양 늘어서 있다. 보기 드문 풍경이라 사진에 담는다. 목책에 걸린 제천문인회원들의 시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다. 시를 음송하는 동안 나는 의림지를 감상하는 타인의 감정을 커닝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두 시간여 노닥거리니 기온이 내려간다. 반소매 차림의 나는 점퍼를 꺼내 입고 차에 오른다.      

 의림지에서 북쪽으로 30여 분 운전하여 청풍호수. 나는 모노레일을 타고 산길을 오르고 싶었으나 우천으로 운행하지 않는단다. 아쉬움이 있지만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이동한다. 코로나 시국에 비까지 내려 그런지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덕분에 몇 미터씩 줄 서는 수고는 할 필요가 없다. 케이블카가 비봉산 전망대에 나를 내려준다. 청풍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맑은 날과 달리 안개 덮인 호수는 어둑한 하늘과 하나가 되어 경계가 가늠되지 않는다.

 안개… 선명한 호수를 보려는 사람은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예까지 올 리 없다. 많은 사람이 맑음을 선호하나 보다. 흐릿한 호수에는 인적이 아예 없다. 따사로운 햇살도 사람들 소란도 끊긴 청풍호는 적이 사색적이다. 전망대 공원에도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선명하다는 것은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명백한 것일 테다. 밝음으로 인해 경계가 뚜렷하니 내 것과 네 것을 나눔에도 다툼이 없으리라. 안개는 모호함이다.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다. 구름 뒤의 태양처럼 안개 너머에도 엄연한 존재가 있다. 안개는 때를 기다려 그것을 드러낸다.

 시야가 온통 안개 밭이다. 손잡고 있지 않으면 옆 사람 찾느라 안개 속을 더듬어야 할 지경이다. 나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나아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안개가 밀리며 선명함이 도드라진다. 한 치 앞을 모른 채 걷고 또 걷는 인생과 같다. 내일을 알 수 없지만, 걷다 보면 길이 열리고 걸어야만 길이 난다. 훗날 내가 만든 발자국이 어엿한 길이 된다. 길을 내는 기쁨은 안개 속이라야 가능하다.

 안개는 티끌을 가려 주고 결정을 유보케 한다. 남의 허물을 가려주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안개만이 그 일을 한다. 성급한 결정으로 일을 그르치기도 하는 나로서는 안개 자욱한 날 걸음이 느려지고 생각이 깊어진다. 조금 성숙한 내가 된다.

 안개는 부끄러운 고백을 허용하고 알 수 없는 깊이로 시를 쓰게 한다. 보드라운 물 알갱이가 몸을 이완하고 늘어난 체표 안으로는 넉넉한 마음이 고인다. 강퍅한 마음이 해체되면서 용기가 난다. 비로소 시가 쓰인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 찻집에서 한방 족욕이 가능하다. 만 원에 족욕과 차 한 잔. 따끈한 물에 발 담그고 라떼를 음미한다. 몸이 데워진다.     


 이튿날

 제천이 생각보다 커서 놀란다. 나는 재래시장부터 찾는다. 중앙시장, 동원시장, 내토시장 등. 중앙시장을 찍어 왔는데 와서 보니 모두 한곳에 있다. 호기심 이는 대로 기웃거리기에 좋겠다. 생필품이나 의류점이 모인 곳, 해산물 시장, 과일 야채 등 밭작물을 파는 시장, 파전 오뎅 닭강정 등 식당이 모인 시장. 영역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적당히 권역이 나뉘어 있어 보인다. 나는 막걸리 거를 때 사용할 용도로 망사 주머니 하나를 고른다, 1200원. 이런 걸 득템이라고 하나.

 모여 있기는 해도 시장을 모두 뒤적이고 나자 피로가 온다. 다리도 쉴 겸 내토시장에서 유명하다는 붉은오뎅집을 찾는다. 오뎅에 고추장 양념을 올려준다. 에고, 붉은 오뎅이 아니라 고추장 오뎅이다. 소문에 낚였다고 생각하며 1000원을 내민다. 꼬치 세 개가 내 앞에 놓인다. 비싸지는 않네.

 내토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전집이 여러 곳이다. 밀전 김치전 감자전 부추전 파전, 각 2000원 씩이다. 1만 원을 주고 다섯 장을 고루 주문하여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비도 오고, 딱이다.

 제천은 약령장으로도 유명하다. 약선떡갈비, 약선불고기 등 약초를 응용한 메뉴가 눈길을 끈다. 점심은 대보명가 약선정식이다. 한방약초와 산나물로 정갈한 한 상이 나온다. 남자와 여자에게 좋은 약재가 따로 있다며 각기 다른 밥을 지어주는데 날마다 이리 먹으면 병에서 멀어지겠다 싶은 믿음직한 식단이다.

 속을 채우고 다시 운전, 박달재를 넘는다. 박달재 고갯마루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나무속 사찰이 있다. 좀 생소한 목굴암. 자그마한 암자에 성인 세 아름은 됨직한 나무 속을 파고 그 속에 부처님을 모신 특이한 장소다. 나무 외피에는 500 나한 조각이 정교하다. 한 사람씩 들어가 한 가지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고 안내되어 있다. 소원이 많은데… 나는 가장 임박한 일을 떠올려 부처님께 소원한다. 들어주시겠지….      

 제천에도 온천이 있다. 이리 깊은 산중에 온천이 가능한가 싶으면서 한 달 전에 예약해 둔 포레스트 리솜이다. 박달재 휴양림을 지나 구학산으로 들어간다. 해발 600미터 산중, 8부 능선쯤 숲속에 개발된 목욕탕에서 느긋한 오후를 보낸다. 물놀이장에는 아이들을 태운 튜브가 꽃처럼 떠 있다. 숲속에는 작은 암석 욕조 몇 개가 꽃잎처럼 숨어 하얀 김을 지어 올린다. 왕후의 목욕이 따로 없다.

 깊은 산속 숲 냄새는 생각까지 리셋 한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무게조차 덜어지는 느낌이다. 물속 스낵코너 테이블에서 맥주 한잔하고 도넛 모양 튜브를 침대 삼아 벌렁 누워도 본다. 연 하늘빛 창공이 내려와 내게 묻는다. 오늘이 어떠하냐. 실눈 뜬 내가 오래도록 함박웃음 날려 보낸다. 오늘만 같아라.


의림지 초입의 버드나무. 세월의 더께인 듯 이끼가 두껍게 앉아 있다. 



의림지의 놀거리 중 하나인 오리배. 호수에 드리운 물 그림자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의림지인데 날씨가 흐려 차분하기만 하다.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개울을 막아 둑을 쌓았고 그후 현감 박의림이 더욱 견고하게 다듬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의림지다. 박의림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김제 벽골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다. 의림지는 맑은 날 반영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빗물이 만든 물여울도 그림 같다.



발 아래로 보이는 청풍호수 전경. 충주에서는 충주호, 제천에서는 청풍호로 불린다. 비봉산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이다. 청풍호는 월악산 비봉산 금수산 등에 둘러싸여 풍광이 빼어 나고 카약, 번지점프, 케이블카와 모노레일, 낚시 등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은 곳이다. 육지 속의 바다로 불릴 만큼 담수량도 많다. 우리나라 최대 담수는 소양호다. 



여행자들이 사랑을 새기는 곳. 비봉산 정상 하트 데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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