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과 바다 열차
노래: <정동진 트위스트>와 함께 감상해 주세요!
작곡 이성숙, 작사 AI, 노래 AI / 영상: 사도광탄
https://youtu.be/-fzXxkDt_Zc?si=n9czfwNvUsEcet6P
새벽 바다 은밀히 속살일 때, 정동진 파도 애절히 노래해.
시간 품은 허수아비 전봇대, 바람에 실려 온 사랑의 편지.
바람에 밀려 간 사랑의 속삭임, 파도에 떠밀려 여울만 지네.
바다를 가르는 그리운 노래, 수평선 너머로 꿈 실어 나르네.
추암역 촛대바위 운무에 싸여, 사랑의 추억 가슴에 안네.
바다에 새긴 사랑의 속삭임, 파도가 전하는 사랑의 밀어.
바다가 전하는~ 파도에 부딪쳐 별빛이 되었네.
바람의 그리움 파도에 닿아 천년 여울로 애절히 노래해.
천년 여울로 애절히 노래해.
정동진 하면 모래시계가 떠오를 만큼 정동진에는 드라마 ‘모래시계’를 추억할만한 조형물이 도처에 있다. 5.18을 소재로 제작된 모래시계는 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에겐 뜨거운 기억으로 각인된 드라마다. 주인공들은 정동진의 모래와 파도를 배경으로 그들의 시대적 삶을 천착해 나간다. 티브이를 켜면 주제가 ‘백학’과 함께 정동진의 바다가 화면 가득 물결치곤 했다. 당시 주제 음악 ‘백학’은 길거리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그 비장한 곡조는 지금 들어도 가슴에 울림이 온다.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가장 동쪽에 있는 동네가 정동진이다. 더불어 정남진으로 전남 장흥이 있고 정서진은 강화도, 정북진은 중강진이다. 위도와 경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방진이다.
태풍 힌남노 북진이 예상되는 상황이라 많이 망설이다 나선 길이다. 다행히 비는 약하게 오락가락할 뿐, 우산을 접고도 다닐 만하다.
이른 아침 5시 반. 가랑비 떨어지는 무채색 바다다. 일출을 보려는 한 무리의 젊은이와 내가 거리를 두고 앞줄에, 중년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해변에서 떨어진 둔덕에 각각 자리 잡고 서성인다. 아직 해가 오르지 않은 수평선이 자주 일그러진다. 발 앞 바위로는 흰 파도가 거세게 으르렁댄다. 태풍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다.
검은 비구름 뒤로 해가 뜨나 보다. 구름 기세에 눌린 태양은 창호지에 가려진 그림자처럼 주황 물감만 엷게 퍼뜨리는 중이다. 먹구름 낀 하늘이라 애당초 덩실 떠오르는 태양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붉게 물드는 수평선을 보자 몸이 긴장한다. 해변에는 수런대던 목소리마저 일순간 사라진다. 삼엄한 고요다. 10여 분 지났을까, 해는 모습을 드러낼 기색이 없다. 발자국 소리가 살아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해변을 빠져나간다. 나는 조금 밝아진 바다를 카메라에 담는다. 등대와 파도와 숨죽인 태양, 그리고 낙심한 이들의 뒷모습을. PD는 이때를 맞춰 ‘백학’의 볼륨을 높인다.
정동진 철길 옆으로 걷는데 낙서를 한아름 안은 전봇대가 보인다. 전봇대는 타임캡슐인 양 몸통 가득 옛사람의 사연을 안고 있다.
영미에게 남긴 한 남자의 사랑의 메시지, ‘영미야 미안해. 보고 싶다, 사랑해.’(2018.7.21.). ‘보고 싶다’ ‘사랑해’는 자음으로만 남겨져 있다. 이들은 헤어진 걸까….
‘미국에서 돌아와,’ 그는 돌아왔을까 지금은 어디서 누구와 살고 있을까…. 음음음음 흠 음음음음 흠~ 허밍으로 잦아드는 ‘백학’ 마지막 소절을 흥얼거리며 나는 여전히 전봇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하트를 사이에 두고 새겨놓은 이름도 참 많다. 동규♥미나, 국호♥상미 등. 이렇듯 긴요한 사랑의 맹세들은 현재도 유효할까. 촘촘한 낙서를 읽으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살다 보면 원망과 미움도 있겠건만 돌에 남긴 것은 한결같이 사랑이라니 그 또한 진기한 일이다.
나는 천년 후에도 전봇대가 이대로 있어 주면 좋겠다는 로망에 사로잡힌다. 후대 사람이, 어쩌면 인류 역사가 끝나버린 후 어떤 새로운 종에게 인류는 사랑의 족속이었노라 전해지면 좋겠다.
삶이 얼룩질 때 나는 바다에 간다. 바다의 포효는 거품 진 삶을 잠재우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르름은 세상 번민을 거둬간다. 종국에 내게도 한 줌 사랑의 기억만 남는다. 세례를 감행하듯 파도에 씻기운 나는 다시 살아 뭍으로 간다. (낙심한 이들이여, 구름 뒤엔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
초당순두부로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숙소로 돌아와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오전 9시 반, 한숨 자고 난 나는 정동진역에서 출발하는 바다열차를 타기 위해 서둔다. 바다열차는 강릉 -정동진 - 묵호 - 동해 - 추암 – 삼척해변에 정차하는,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열차다. 편도 1시간 10분, 바다열차에 대해 ‘별로’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판단은 편견일 뿐이므로 나는 열차표를 산다. 왕복 16000원.
열차는 식당칸과 프러포즈 칸, 특실과 일반실을 더해 모두 네 량이다. 이벤트를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널찍한 파티룸에서 특별한 추억을 담아갈 수도 있겠다. 나는 특실에 자리 잡는다. 두 줄의 좌석이 바다를 향해 있다. 유리창 가득 태수(최민수 분)와 혜린(고현정 분) 재희(이정재 분)와 우석(박상원 분)의 얼굴이 떴다 사라진다. 불꽃처럼 젊음을 사른 그들은 지금 초로의 능선을 넘고 있을 테다. 그들의 삶이 덜 숨 가쁘기를 소원하며 열차 내 안내방송에 귀 기울인다.
정차하는 역마다 안내방송이 나온다. 객실 방송으로 탑승객들 사연도 읽어주고 퀴즈 타임도 갖는다. 여행은 능동태다. 선택하고 참여해야 ‘느낄’ 수 있다. 바다와 동승객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1시간은 감쪽같이 지나버린다. 차분하나 밋밋하지 않은 여행이다. 아쉬운 건 바다열차 운행이 올 크리스마스를 마지막으로 종료한다는 사실이다. 낡은 차체를 교체해야 하는데 비용 마련이 충분치 않고 이용객이 많지 않다는 이유다. 한참이나 서서 기차를 눈에 담는다.
여기서 잠깐, 추암역 촛대바위는 애국가 영상 4절에 나올까? 궁금한 독자는 정동진 바다열차를 타보기 바란다. 나는 정답을 맞추고 바다열차 로고가 새겨진 귀여운 텀블러를 선물로 받는다.
정동진의 철길과 바다.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는 기차역이 정동진역이다. 해안을 따라 철길이 나 있다.
흐린 날씨에도 태양은 솟고. 바다열차는 2023년 크리스마스에 고별 운행 후 사라질 예정이다.
그리움을 새긴 정동진의 전봇대, 철길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