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아직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이 우세한 것 같다. 환자 스스로 연명치료 거부나 사후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힐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미국에 비해 그 내용도 다소 허술해 보인다. 연명치료에 사용되는 의술이나 장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산소호흡기를 할 건지 말 건지, 식도에 노즐을 넣을 건지 말 건지 등등 꽤 세부적으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캘리포니아에는 2016년 6월부터 법적으로 존엄사가 허용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에 직면한 셈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존엄사, 안락사 또는 다소 자극적 적극적 의미의 조력자살이라는 표현도 쓴다. 법안은 아마도 가장 경건하고 순한 느낌을 주는 ‘존엄’을 선택한 듯하다. 따라서 용어는 객관적으로 존엄사(Death with Dignity)로 정리되었다. 존엄사법이란 의료 수준의 발달로 회생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법안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미국 사회 내에서도 여전히 논란거리이기는 하다. 법 제정 의도와 달리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가능성이 남아 있고, 환자 입장에서는 죽음을 강요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사를 결정한 남은 가족에게는 정서적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존엄사가 허용된 직후, 나는「미주크리스천헤럴드」 지면에 관련 전문가들을 모셔 놓고 존엄사에 대해 장황하게 지면 대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나는 논의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당시 나의 죽음에 대한 이해나 태도는 한심할 만큼 무지한 수준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순간 병원에서 ‘사전 의료지시서’라는 것을 준다. 내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게 되었을 순간에 가족이나 누군가가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하려는 조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갖는다는 매우 진보적 조치이나 이 사전 의료지시서를 받고 나는 며칠을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종이를 받아 들고 내용을 검토하는데 마음이 왜 이리 착잡한지, 생에 대한 집착이 이리 큰 건지, 나는 새삼 나의 이기심과 옹졸함에 놀라고 있다. 나를 망설이게 하는 질문 항목 몇 가지를 살펴본다.
‘장기를 기증할 것인가?’
망설인다.
‘어느 부위를 기증할 것인가?’
멍하다.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원하나?’
글쎄다.
이것이 현재 나의 상황이다.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질이 중요하지 연명치료는 해서 뭣하나 하며 큰소리치던 나다. 대담을 진행하던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뇌사를 했다면 장기 기증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공익과 박애적 측면에서 그렇고 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공헌하는 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나를 향해하게 되니 두려움뿐이다. 화장을 원하는가 매장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도 있다. 평소에 나는 화장이 옳다고 믿었다. 땅도 좁아드는데 양지바른 곳에 죄다 묘지를 둘 것이 뭐 있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웬걸…, 살점이 터지면서 탁탁 불꽃이 튀는 화장장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나는 일주일을 넘기며 ‘죽음 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마침내 매우 이성적인 답안지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연명치료는 필요 없고 건강한 장기를 모두 기증할 것이며 주검은 화장하라.
그렇다고 불편한 마음까지 씻어낸 건 아니다. 나는 사전 의료지시서를 제출하기 전 간호사에게 몇 번이나 물어야 했다.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고. 간호사가 나를 위로하며 답을 건넨다. 언제든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비로소 내게 안정이 온다. 의학이 쓸데없이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옛날처럼,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고 그저 앓다가 가면 좋을 것을, 이라는 까칠한 생각이 앞서는 까닭이다.
한국에 오니 부모님이, "나는 유사시에 연명치료 같은 거 하지 말라고 써 뒀다"고 큰소리를 친다. 나도 좀 더 나이 들면 저리 홀홀한 마음으로 죽음을 대할 수 있으려나. 사실 죽음이란 그리 먼 미래가 아닐지 모른다.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그것을 못 깨닫고 사는 것이지. 그래서 축복이라고들 하나보다. 사전 의료지시서를 써내고 보니 건강한 하루가 이리 새삼스러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