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여보 식사해요.
방에서는 답이 없다. 여자는 방문 앞까지 가서 노크를 하며 좀 더 큰 소리로 남자를 부른다. 여자의 목소리가 하소연하듯 애처롭다. 여보 식사해요, 병원 일찍 간다고 안 했어요?
방에서 분노에 찬 남자의 목소리가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온다. 지금이 몇 신데 밥을 먹으라 하노! 총알을 맞고도 여자는 태연하게 제 할 말을 잇는다. 당신 밥 먹고 병원 가야지.
시계 좀 봐라, 몇 시고? 남자의 호통을 한 번 더 듣고서야 여자는 시무룩해서 부엌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본다. 새벽 4시. 아이고 내 정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혼잣말을 하던 여자는 식탁과 냉장고 사이를 오가며 내놓았던 반찬을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식탁과 냉장고는 두세 걸음 거리지만 여자는 몸을 떨면서 힘겹게 발을 옮긴다. 반찬통을 느리게 운반하던 여자는 남자가 소리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갑자기 멈춰 서서 식탁 옆에 걸린 달력을 쳐다본다. 여자가 중얼거린다. 일찍 간다고 안 했던가…? 오늘이 병원 가는 날 맞는데….
여자는 음력이 병기된 절 달력을 해마다 얻어온다. 달력은 아직도 12월에 펼쳐져 있고 23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여자가 23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숫자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대곤 입엣말을 한다. 오늘이 23일인가… 이상하네….
새벽 소란에 잠이 깬 슬이 거실 중앙에 우뚝 선 채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고 있다. 슬을 본 남자는, 에이 참,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엄마…. 슬이 망연자실해 있는 여자의 팔을 당겨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12월로 남아 있는 달력 한 장을 걷어 올려 못에 끼운다. 그런 슬을 여자가 가만히 본다. 달력은 가운데 스프링을 경계로 묵은 달과 새달로 나뉜다. 달력을 넘기자 동자승이 합장한 그림이 1월을 치마처럼 늘어뜨리고 있다. 묵은 페이지가 된 달력 상부는 차곡차곡 쌓여 벽에 고정된다. 상체가 두툼한 운동선수처럼.
엄마 왜 벌써 나왔어? 슬이 여자의 손등을 쓸어내리며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평생 남자의 타박에 주눅 들어 살아온 여자다. 슬은 여자가 남자에게 못한 말을 쏟아낼 수 있도록 기다린다. 여자를 보는 슬의 눈빛에 연민이 서린다.
여자가 뭔가 기억해 내려 애쓰며 달력 앞으로 몸을 수그린다. 달력에는 화투장보다 커다랗게 빨간색으로 ‘1’ 자가 쓰여 있고 맨 아랫줄에는 신화사라는 절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지난밤 시청한 드라마를 재구성하듯 여자가 달력을 끈질기게 마주 본다. 빨간색으로 도드라지게 쓰인 1자를 응시하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아, 지금이 1월이구나. 1월 7일 자에 빨갛게 쳐진 동그라미에 여자의 시선이 가서 박힌다. 여자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슬은 그녀를 채근하지 않는다. 이내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여자가 뭔가를 기억해 낸 것처럼 보이자 슬의 몸에서도 긴장이 빠져나간다. 달력에는 여자가 삐뚤빼뚤 써 놓은 글자들이 붉은색 자수처럼 놓여 있다. 달력에서 눈을 뗀 슬이 여자에게 말을 건다. 엄마, 아빠 병원 가는 날은 7일이네? 그렇지, 내가 이리 표시를 해 두고도 몰랐구나. 지금 몇 신 줄 알아? 여자가 눈을 힐금거려 시계를 본다. 4시 25분. 이 새벽에 깨우니까 아빠가 화 안 나겠어? 슬이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남자의 행동에 주석을 단다.
넘어가도 좋을 일에 사사건건 시비 거는 남자를 설득하는 일은 슬에게도 버겁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데, 그러자면 남자의 말에 맞장구를 쳐야 한다. 집안 공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여자가 빨리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다.
남자는 여자의 행동뿐 아니라 여자의 사투리까지 지적하며 여자의 기를 죽인다. (자신이 표준어를 쓴다고 여기지만 남자도 사투리를 쓴다.)
나 젊었을 때는 머리에 물동이이고 높은 정지 문턱을 잘도 넘어 다녔다, 넘어지지도 않고. 총기 있다고 어른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여자가 잠시 맑은 정신이 되어 옛일을 그릴 때도 남자는 여지없이 타박을 놓는다. 정지가 뭐꼬? 아이고. 정기다. 부엌이라고 하든지. 똑바로 알고 좀 말을 해라.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한번 하고 말을 해야지! 남들도 다 그리 말 안 하요? 내는 들은 대로 하는 기라. 여자도 가끔, 이런 식으로 대들기는 한다.
여보, 영자가 우리 아들이 핸숨하대요, 하며 여자가 웃는다. 뭐라꼬? 잘생겼다는 말인가 봐. 여자 얼굴이 상기된다. 핸숨이 뭐고? 핸썸이다 아이고. 그러는 남자는 뉴욕을 늘 뉴뇩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중졸이다.
슬의 성장기를 우울하게 지배했던 남자의 가르침이었다. 그럴 때마다 슬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슬이, 아빠 뉴욕이야 뉴뇩이 아니고, 했을 때에 남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어린 게 뭘 안다고 아빠를 가르치는 거야?!
슬은 그럴 때마다 남자가 밖에서 뉴뇩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여자가 다시 남자의 방 앞으로 다가간다. 슬이 여자 팔을 잡아당겨 앞을 막아보지만 소용없다. 여보 오늘이 맞아요. 당신 밥 먹고 병원 가야 하는데…. 지금 안 일어나면 늦어요. 잠시 틈을 둔 뒤 남자의 방문이 벌컥 열린다. 식사해요. 여자는 금 간 목소리로 남자를 마주 보며 제 말을 반복한다. 여자의 눈빛이 조바심으로 흔들린다. 슬의 시선이 남자에게 닿는다. 아빠, 목소리 좀 낮춰, 새벽이야. 슬이 남자를 책망하듯 날카롭게 내뱉는다. 여자의 말을 무시하는 남자지만 슬이 하는 말은 듣는 체를 한다.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여자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자세가 된다. 여보, 지금 몇 시고? 시계 봤나? 여자도 애원하는 얼굴이 되어 말한다. 시계 봤어요. 오늘이 7일 맞지? 남자는 말이 없다.
당신 병원 가는 날이라고 내가 동그라미 쳐 두었잖아요. 일찍 간다고 안 했어요? 아까는 내가 부엌 달력을 봐서… 그걸 아직도 안 넘겨놨더라고요…. 말을 하며 여자가 부엌 달력 앞으로 가, 자신의 기억을 증명하려는 듯 동자승을 화르륵 떼 낸다. 여자의 손에서 12월이 내려갔다 올라가더니 달력이 2022년으로 바뀐다. 새 달력에도 이미 동그라미가 여러 개 그려져 있다. 1월 7일-남편 병원 가는 날, 23일-큰애 미국 가는 날.
우리 슬이 이날 미국 가는 거 맞지? 여자는 23일에 손가락을 대고 거실에 나와 서 있는 슬을 쳐다본다. 슬이 그 눈빛에 고개를 끄덕인다. 슬은 여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여자를 바라보는 슬의 동공에 그늘이 진다. 응 맞아 엄마. 근데 지금 새벽 4시 좀 넘었어. 자 밖을 좀 봐봐. 캄캄하지? 아직 아침 먹을 시간이 아니잖아, 알겠어? 그리고 엄마, 엄마가 식구들 죄다 챙길 필요 없어. 다 알아서들 잘해. 아빠도 병원 혼자 가고 식사도 혼자 하실 수 있어, 응? 여자는 멍한 표정이 되어 거실 가운데에 나무처럼 서 있다. 슬의 얘기를 듣는 동안 여자의 얼굴이 평온해진다.
아직 일곱 시가 안 됐구나.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났네. 여자는 식탁을 마저 치우고 행주까지 짜서 넌 뒤에 느리게 걸어 방으로 돌아간다.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슬의 가슴이 먹먹해 온다. 여자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잠이 든다. 여자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슬도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달그락달그락. 부엌에서 들리는 친숙한 소음이다. 잠이 덜 깬 슬은 그릇 부딪는 부드러운 음향을 즐기며 다시 잠에 빠진다. 멀어지는 노새의 방울처럼 소음이 잦아지면 이내 달콤한 음식 냄새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냄새는 여자의 음성에 실려 좀 더 진해진다. 여자는 애들이 자는 방을 돌아다니며 요 밑으로 손을 넣어 보기도 하고 머리를 쓸어주기도 한다. 슬과 동생들은 이불을 끌어다 자는 체를 하며 여자를 애먹인다. 밥 먹자, 학교 가야지. 여자의 목소리는 삼 남매의 응석을 끌어안는다.
남편까지 깨워 밥상을 차린 여자는 게으름 부리는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등교를 돕는다. 어린것들이 신이 나서 책가방을 메고 뛰쳐나간다. 남자는 여자가 닦아놓은 윤나는 구두를 신고 출근길에 나선다. 식구들을 모두 내보낸 빈집에서 여자는 방 거실 부엌을 구석구석 쓸고 닦는다.
여보 식사해요. 여자의 목소리에 피곤이 누룽지처럼 눌어붙는다. 남자는 대답 대신, 아이참, 하는 짜증을 뱉어낸다. 여자가 남자의 방문을 두드린다. 등을 옹송그린 여자는 겁먹은 듯하다. 어 알았어, 나갈게. 남자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느껴지자 여자가 허리를 펴고 부엌으로 돌아가 상을 차린다. 남자가 화장실에 들렀다 식탁 의자에 앉는 것을 보자 여자는 우유 잔을 전자레인지 안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전자레인지가 쉬이 잉~ 바람 소리를 두어 차례 낸 후 띵~ 하고 멈춘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우유 잔을 남자 앞에 갖다 놓는다. 우유가 너무 차다! 남자의 불평이다. 이상하네. 항상 똑같이 1분 20초를 데우는데. 여자는 매일 아침 우유에 냉동 블루베리를 한 숟갈씩 넣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내놓는다.
남자의 타박에 길든 여자다. 여자는 항변할 줄도 모른다. 언제나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알고 안절부절못한다. 슬에게선 짜증이 인다. 엄마, 블루베리 조금만 넣어. 냉동된 걸 많이 넣으니까 우유가 차지지. 적게 넣어 적게. 슬의 말은 얼핏 여자에게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남자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블루베리 양을 줄이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슬이 중재하는 척 이번에는 남자를 향해 말한다. 아빠, 아님 그냥 드세요. 우유는 더 데우면 위에 비닐 막 같은 게 생겨서 마실 때 입안에 들러붙고 그래. 남자의 목소리가 한풀 꺾인다. 그럼 못한다고 말을 해야지. 더 데워주겠다고 하니 하는 말이다. 슬이 여자를 향해 돌아선다. 슬의 목소리가 유리 파편처럼 차갑게 튀어 오른다. 엄마! 아빠 이제 이해했으니까 엄마 하던 대로 하면 돼, 알았지?!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전자레인지가 고장 났어, 한다. 남자가 볼멘 얼굴로 우유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남자는 우유를 다 마신 후 사과샐러드를 비운다. 남자가 샐러드 접시를 비우기까지 기다린 여자가 강황 콩 새싹을 넣은 잡곡밥과 미역국을 내온다. 전선의 기류 같은 긴장감이 아직 식탁 위에 도사리고 있다. 당신 미역국 안 좋다고 했는데…. 여자가 말끝을 흐리며 미역국을 남자 앞으로 민다. 남자가 미역국에 숟가락을 담그며 에누리 없이 한마디 한다. 싫다는 걸 왜 자꾸 주냐.
나 혼자 먹을래니 미안해서 안 주요?
미안하면 주지 말아야지. 이 사람이, 참나.
…
남자가 짜증을 내며 언성을 높인다. 평행한 철길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접점이 없다. 고기 좀 먹으라고… 소고기 국이니 먹어둬요. 고기를 먹어야 기력을 차리지.
여자의 근성은 무명실처럼 질기다. 저 지경으로 싫어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한사코 남자에게 미역국을 권한다. 남자의 짜증에도 아랑곳 않고 여자가 미역국을 남자 앞으로 밀어댄다. 남자가 국그릇을 들어 옆으로 옮긴다. 미역국을 밀어내는 남자를 초조하게 바라보다 여자의 손이 다시 국그릇으로 간다. 허리를 곧추세운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타오른다. 여자의 손이 식탁 위에 멈칫멈칫 떠 있다. 아빠, 그냥 두세요. 안 드시면 되잖아. 보다 못한 슬이 남자에게 앙칼지게 눈을 흘긴다.
남자의 젓가락이 갈치구이를 향한다.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간장 종지를 남자 앞으로 민다. 남자는 생선구이를 간장에 찍어 먹는다. 이번에 여자는 네모나게 자른 묵은 달력 종이를 남자의 국그릇 옆에 갖다 놓는다. 남자가 갈치 가시를 종이 위에 뱉는다. 멀리서 본다면 병든 남자를 여자가 오히려 간호하는 것처럼 보일 광경이다.
60여 평 작은 주택은 그녀가 가꾸는 밭이다. 남자와 어린 자식들은 여자가 주는 대로 물과 양분을 받아먹는다. 식탁 옆에는 양파껍질과 여주 넣은 물주전자가 끓고 있다. 여자는 자기 밥은 뜨는 둥 마는 둥, 남자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멀리 있는 반찬을 끌어다 주기도 하고 생선 가시를 발라주기도 한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남자는 여자의 수발에 타박은 하면서도 여자가 건네주는 대로 받아먹는다. 여자는 자신의 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옥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모양처. 언젠가 여자가 슬에게 했던 말, 현모양처가 슬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초등학교 다니다 한국전쟁을 맞은 여자는 산속 피난처에서 아버지에게 한학과 유교식 예법을 배운 터다. 여자는 남자를 먹이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안다. 여자가 남자의 잔에 물을 따르고 약봉지가 수북이 담긴 플라스틱 김치 통을 남자 앞으로 민다. 남자의 약은 열 가지쯤 된다. 약 드세요.
전자레인지가 고장 났어요. 남자가 못 들은 체 약 챙겨 먹는 일에 열중한다. 약을 먹고 난 남자는 물까지 벌컥 삼키고 나서 귀찮은 기색을 보인다. 아 그럼 새로 사라 마, 누가 못 사게 하데! 남자는 여자의 전자레인지 타령이 성가시다. 식사와 약 먹기를 끝낸 남자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린다. 계산을 치르고 식당을 나서는 손님 같은 태도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남자의 문이 닫히면 거실에는 혁혁(赫赫)한 적막이 남는다. 혼자 남은 여자는 남은 반찬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 놓고 밥그릇에 쏟아 비빈다. 그러면서 구시렁거린다. 반찬을 다 닦아 먹어야지, 이렇게 남겨 두면 안 돼…. 농가의 맏딸로 태어난 여자는 밥알 버리는 것을 죄로 안다.
식사를 끝낸 여자가 자기 약통을 끌어당겨 약봉지를 하나하나 손으로 찢어가며 입에 털어 넣는다. 여자가 먹는 약은 스무 가지가 넘는다. 식탁 위에는 약국 이름을 명찰처럼 새긴 약 껍질이 무덤처럼 쌓인다. 약 먹기를 끝낸 여자가 느릿느릿 빈 접시와 약통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한다.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내부를 행주로 닦아내다 말고 여자는 또 중얼거린다. 전자레인지가 고장 났어. 이게 한 번만 누르면 1분 20초가 딱 되거든. 맨날 똑같이 하는데 요즘 자꾸 우유가 차다고 하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참…. 독백인지 방백인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말이 공중에 나부낀다.
슬이 손을 뻗어 식탁 등에 휘감긴 여자의 말을 끌어당긴다. 엄마, 전자레인지 사러 갈까? 나 미국 가기 전에 하이마트 가면 되지.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여자가 세탁 바구니를 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빨래 건조대를 펼친 여자가 휴우하고 한숨을 내쉰다. 졸음이 몰려오는 듯 여자는 눈을 내리감은 채 한참을 서 있다 다시 집게로 젖은 옷을 집어 올린다. 건조대에 여자의 속옷과 양말 세 켤레, 남자의 팬티와 속바지가 세 개씩, 그리고 남자의 검은색 양복바지가 줄줄이 널린다. 치질 수술을 한 남자는 자주 똥을 옷에 지린다. 그는 사흘에 한 번 꼴로 빨래를 한 무더기씩 만들어낸다. 똥 덩어리는 치우고 바지를 내놔야 안 하오? 세숫대야에 물을 받으며 여자가 분을 터뜨린다. 여자가 뻣뻣한 허리를 세면대에 기댄 채 남자의 바지를 주물러 빨아 세탁기에 넣으며 짐짓 큰소리를 낸다. 내가 종년인가. 똥 기저귀를 벗어내고도 미안한 줄도 모르는 망태 같으니… 어째 저토록 지만 잘난 줄 아는지, 쯧쯧.
아침 녘 밥상에서 눈을 부라리던 남자가 생각난 듯, 여자는 똥 묻은 남자의 속옷을 빨면서 입으로는 욕을 하는데 말투에 증오 같은 것은 없다. 이내 여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녹슨 울음이 섞인다. 욕실 앞 남자의 방에서는 말이 없다. 거실 한편에서 노트북 자판기를 두드리던 슬의 손이 느려진다. 그날 이후 남자는 덩어리 진 똥만은 제 손으로 걷어내고 바지를 내놓는다.
남자는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열어 화투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시계가 오전 10시에 이르면 옷 차려입고 현관을 나선다. 여보, 나, 가. 다녀올게. 아침의 전쟁을 잊은 듯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소리 지르는 것은 촌티와 신학문 못 배운 티를 씻어 여자를 세련되게 변화시키려는 의도다. 그것이 여자를 주눅 들게 한다는 걸 남자가 모르는 게 문제다. 여자는 우울증 약을 먹은 지 이미 오래다. 네 엄마, 요양원에는 안 보낼 기다. 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옆에 둘 거야. 남자는 슬에게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한다. 남자는 이 말을 하면서 눈물까지 보인다.
전화국에서 전신주 매설 공사로 잔뼈가 굵은 남자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두고 퇴직금을 받아 명예퇴직을 한 상태다. 남자의 수중에는 돈이 조금 있다. 퇴직 후 남자는 10년째 서예동호회에 나간다. 그는 곧 팔순 기념 개인전을 열 태세다.
남자가 나간 사이, 여자는 청소를 끝내고 집게를 찾아 세탁기 안에 뒤틀려 있는 빨래를 끄집어낸다. 척추수술을 한 여자는 허리를 구부리지 못해 집게로 물건을 집고, 집게로 양말을 신고, 집게로 바지를 입는다. 오후에는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여 여자의 침대보를 털어주고 목욕을 도와주지만,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수고는 온전히 여자의 몫이다.
청소를 끝낸 여자가 힘겹게 침대에 눕는다. 여자의 침대 머리맡에는 라디오가 두 개다.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개의 라디오는 각기 다른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채널을 돌릴 줄 모르는 여자는 KBS가 듣고 싶을 땐 빨간 라디오를, MBC 방송을 듣고 싶을 때는 파란 라디오를 선택한다. 여자가 시계를 보더니 파란색 라디오를 켠다. ‘여성시대’가 진행 중이다.
중이염 수술을 세 차례나 했지만 여자의 청각은 장애 판정을 받았다. 여자는 미세하게 살아 있는 청각에 의지해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 소리가 거실에 있는 슬에게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크다. 엄마 소리 좀 줄여줘. 마감이 임박한 칼럼을 다듬고 있던 슬이 이기적인 요구를 한다. 니도 다 들리나? 미안하다. 여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초저녁 비처럼 쓸쓸한 음성이다. 여자가 라디오 볼륨을 줄이지만 양희은 서경석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실에 메아리친다.
보청기 빼고 침대에 누워 라디오 듣는 이 시간을 여자는 천국이라 여긴다. 바람 새는 듯한 보청기 잡음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보청기 잡음은 두통까지 일으킨다. 여자는 처음 듣는 샴푸를 사 달라거나 새로 나온 건강정보 등을 슬에게 가져온다. 라디오 진행자의 광고를 철석같이 믿는 여자다. 슬은 여자의 요구대로 당뇨에 좋다는 캔 제품(남자를 위해 여자가 사고 싶어 했다), 새로 나온 식용유, 통증 크림 등을 주문한다.
글쓰기를 포기한 슬이 의자를 밀고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커피의 단내가 아침의 소란을 밀어낸다. 며칠 후면 슬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남자에게 다그침 당하는 여자를 남겨두고 돌아갈 생각을 하니 슬 마음이 무겁다. 현모양처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여자, 내 어머니. 슬은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그런 마음을 여자에게 보인 적이 없다. 다혈질의 남자와 담즙질의 여자가 사는 집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이 오간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슬은 오래전 미국 남자를 만나 떠났다.
거실에는 시간을 정지시킨 사진들이 일렬로 걸려 있다. 슬과 동생들의 대학 졸업 사진, 여자와 남자가 물가에서 찍은 나들이 사진, 가족사진, 손주들 사진… 그중에 제일 큰 사진은 아들의 박사모 쓴 사진이다. 여자의 보람이고 희망인 아들이다. 여자는 딸 둘을 두고 아들을 낳는다. 아들을 낳았을 때 여자는 세상을 얻은 듯했다. 아들이 수재들만 간다는 특수 고등학교 시험에 붙었을 때는 하늘을 날 듯 기뻤고, 그 아들이 박사학위 받던 날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갈수록 아들은 여자에게서 멀어졌다.
빨리 밥 먹자.
아 엄마 늦었어. 그냥 가야 돼.
밥을 먹어야 일을 하지, 정신도 맑고.
아들, 용이 유학을 준비할 때다. 미국 시간에 맞추려니 한국은 새벽이다. 교수님과 인터뷰가 잡혀 있던 용이 서둘고 있다. 여자는 밥 먹을 시간이 없다는 용을 기어이 잡아 앉혀 밥을 먹인다. 인터뷰는 늦었고 용은 교수님과 신뢰를 회복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는다. 여자에게는 남편과 자식을 먹이는 일보다 중요한 게 없다.
엄마~. 결혼 후 슬이 친정을 찾는다. 식탁에는 매운탕과 불고기, 각종 나물이 올라와 있다. 푸짐한 밥상이지만 슬의 젓가락은 뭔가를 찾듯 식탁 위를 맴돈다. 그때다. 여자가 김치를 내온다. 우리 슬은 김치가 있어야 밥을 먹어. 여자의 목소리가 자신감에 차 있다. 젤 먼저 김치로 손이 가지. 여자는 통에서 덜어낸 열무김치를 슬 앞으로 밀어놓고 포기김치를 손으로 찢어 그녀의 숟가락 위에 얹어 준다. 슬은 여자가 주는 대로 숟가락을 받쳤다 제 입으로 가져가곤 한다. 슬은 그때서야 안다. 자신이 김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기숙사 밥을 먹은 용에 대한 여자의 안타까움은 강박에 가깝다. 여자는 용이 대문에 들어서기 무섭게 밥부터 차린다. 여자는 용이 밥 먹는 앞에서, 그의 표정을 살피며 반찬을 하나씩 아들 앞으로 민다.
아, 엄마 그만! 내가 알아서 먹을게.
멸치는 똥까지 먹어야 진짜로 먹는 거래. 그… 그, 있잖아… 무기질이 많단다.
여자의 멸치조림에는 내장이 그대로 있다. 용은 멸치 똥이라며 먹기 싫다고 버텨보지만 소용없다. 젊은 엄마의 의지도 완강하므로. 그 후, 주말에 집에 오는 용은 밥을 먹고 들어오거나 밥 먹기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선다. 여자는 용이 집에 오는 주말이면 변함없이 밥상을 차린다. 용이 먹을지 몰라서. 용은 커피만 홀짝거리다 제 숙소로 돌아가 버리더니 결혼한 후로는 아예 본가에 발을 끊고 지낸다.
모태로부터 기인한 사랑은 때로 가학이 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여자는 아들 걱정을 멈추지 않고, 아들에게 그것은 노이로제가 된다. 여자는 아들이 먹고 싶은 것보다 아들이 먹어야 할 것들에 집요하다. 사랑이 가해가 되는 순간이다.
사진을 훑으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는 여자를 슬은 애써 모른 척한다. 용에게도 집은 떠나고 싶은 곳이었을 테니까. 너 용이하고는 가끔 통화라도 하니? 여자의 간절한 질문에 슬이 짧게 대답한다. 바쁜 애한테 전화는 왜 해, 지가 아쉬우면 전화 올 거야, 기다리지 마. 밥은 먹고 사는지 모르겠구나. 엄마 걔 연봉이 얼만데 밥 걱정을 해? 맛있는 거 먹고 다닐 거야. 강남에 살고 있는 용은 일 년이 다 가도록 전화 한 통 없다.
오래된 보청기는 라디오 안테나가 전파를 수신하기 위해 지지직대는 것처럼 종일 어수선한 소리를 낸다. 보청기 잡음에 여자의 머리는 온종일 욱신거린다. 여자는 틈만 나면 머리를 통째로 떼어 집어던지고 싶다고 말한다.
쌔근쌔근. 방 안에서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온다. 보청기를 빼낸 여자가 깊은 수면에 든 모양이다. 여자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방문 쪽으로 약간 돌린 채 누워 있다. 눈을 감느라 힘을 준 듯 속눈썹이 아래로 움푹 들어가 있다. 슬은 라디오를 끄고 여자의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문을 닫고 나온다.
시계가 정오를 향해 간다. 여자가 침대에서 기듯이 내려오더니 부엌으로 향한다. 고구마를 굽고 귤과 딸기를 씻어 낸 후 베란다에 나가서 두유를 두 개 들고 온다. 여자가 전자레인지를 쓰다듬는다. 니랑 참 오래되었다. 여자의 표정이 오래된 친구에게 말 걸듯 다정하다. 고구마 구웠네? 슬이 여자의 손을 제손바닥에 두고 지방이 빠져나가 얇은 가죽만 남은 여자의 손을 어루만진다. 너 오늘 시간 있나? 나랑 하이마트 갈래? 슬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빛이 사정조다. 엄마 뭐 사고 싶구나? 전자레인지 사러 가자, 네 아빠가 자꾸 우유가 차대잖니. 내는 맨날 똑같이 누르는 데도. 여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소리 지르고 퉁명한 이유를 전자레인지 탓으로 돌린다.
아파트로 이사한 지 여러 해가 넘었지만 여자는 먼저 살던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 집 근처에 있는 전자상가는 너무 작아서 물건이 많지 않다면서 여자는 어린이대공원 후문에 있는 하이마트에 가자고 아이처럼 보챈다. 며칠 후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슬은 그런 여자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러자, 택시 탈까 엄마? 아니다 버스가 좋아. 사람도 보고 풍경도 보고. 택시는 너무 좁아서 싫어. 사실은 길가에 서 있는 여자 앞에 택시가 서주지 않는 것에 여자는 화나 있다. 엄마, 택시 내가 잡으면 돼. 버스가 좋아, 버스가 좋대도. 슬은 여자를 바라보며 같이 걷는다. 아파트에서 내려와 버스 정류장까지는 5분 거리,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지경에는 20분이 소요된다. 몇 번 버스 타야 하는지 알아? 여자는 어린이대공원 후문까지 가는 노선버스 번호는 물론이고 동네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들이 어디로 가는지 죄다 안다.
여자와 슬이 2221번 버스에 오른다. 여자는 창밖으로 지나는 건물 하나하나 위에 기억을 도포한다. 40년 가까이 산 곳이니 눈 감고도 떠오를 동네리라. 버스가 군자교를 넘자 여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여자의 입에서는 풍선 불 듯 오색 말들이 부풀어 오른다. 저건 네가 다닌 학교 아니니. 너 기억나니? 저 건물은 독서실처럼 생겼구나. 희야 독서실은 잘 되어 가는지 원. 여자의 말은 두서가 없다. 희는 여자의 둘째 딸이고 슬의 동생이다. 독서실 잘 돼 가지. 수리도 하고 그랬나 봐. 희는 슬에게도 몇 달째 연락이 없다. 여기 내리자, 아니다 아니다, 조금 더 가자. 여자와 슬은 티격태격하다 한 정거장 전에 내린다. 내가 너무 일찍 내리자 했구나. 걸어가자. 영하 9도의 도로는 냉기가 기승이다. 여자는 슬의 몸에 온기를 전할 양으로 자꾸 등을 토닥인다. 미안하다, 내가 길을 까먹었나 봐 이 추운 날 걷게 하다니, 감기 들면 어쩌냐. 슬이, 괜찮대도, 하며 암만 말해도 소용없다. 모처럼 슬과 나들이에 나선 여자는 정거장을 놓친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소풍 나온 아이처럼 들떠 있다. 슬이 여자와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여자가 슬을 올려다보며 안쓰럽게 웃는다.
졸려. 왜 이리 자꾸 졸리는지…. 슬은 최근 들어 여자가 자주 졸음을 호소한다고 생각하며 여자의 팔을 부축하여 걷는다. 여자가 눈을 반쯤 내리감고 위태롭게 걸음을 옮긴다. 바람이 없어 덜 춥네 엄마. 여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슬이 안 추운 체한다. 여자가 빙긋 웃는다.
전자상가 직원은 넘치게 친절하다. 여자가 출입문을 열어주는 젊은 남자에게 화장실부터 묻는다. 어서 오세요, 어떤 물건을 찾으세요, 하면서 얼굴에 함박웃음을 만들던 남자는 이내 얼굴을 굳히고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킨다. 슬이 여자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한다.
엄마 똥 쌌어?
응. 많이 쌌어. 아주 시원해.
슬이 웃자 여자가 슬을 마주 보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며칠이나 변비로 고생한 여자는 뱃속을 비우고 나자 홀가분해진다. 전자레인지 보러 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매장에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마중한다. 전자레인지는 이쪽입니다.
오랜만에 외출한 여자는 이것저것 둘러보며 눈 호강을 하고 싶지만 직원에게 이끌려 전자레인지 구역으로 안내되고 만다. 슬이 여자와 직원을 번갈아 보며 직원에게 말을 건다. 너무 큰 거 말고 기능 간단한 걸로 추천해 주세요. 전자레인지 진열대에는 검은색 일색에 흰색이 몇 개 섞여 있다. 왜 다 이렇게 시커메? 이쁜 색은 없어? 여자는 빨간색과 꽃무늬가 들어간 거라면 무엇이든 좋아한다. 검정 일색의 전자레인지 앞에서 여자가 볼멘소리를 한다. 빨간색 없나? … 빨간색 찾아봐라 얘야. 시커먼 건 싫어. 슬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 어부처럼 애처롭게 반짝인다. 검은색은 죽은 사람이나 쓰는 거지. 여자는 검은색 전자레인지 앞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슬이 미소를 지으며 여자를 향해 몸을 구부린다. 빨간색은 없구… 엄마 이건 어때? 중앙에 놓인 버튼이 몇 개 없는 흰색 전자레인지를 가리키며 슬이 여자를 달랜다.
전기 좀 꽂아봐 주시겠어요? 슬이 여자를 진열대 중앙으로 끌어당기며 직원에게 부탁한다. 이거 엄마가 쓰기 딱 좋겠는데. 눌러봐 봐. 여자가 전원 버튼을 누르자 전기가 통한 전자레인지에서 윙 소리가 난다. 여자는 직원의 말을 듣지도 않고 버튼을 이것저것 되는 대로 누른다.
엄마 뭐 해?
우유 데워야지. 네 아빠가 우유가 자꾸 차다고 하잖니.
여자는 슬을 쳐다보며 우유를 데운다. 엄마, 데우기는 이렇게 하면 되지. 슬은 당황한 기색 없이 여자의 우유 데우기를 돕는다. 슬은 ‘시간’이라고 쓰인 버튼에 여자의 집게손가락을 가져다 세 번 누른다. 띵 띵 띵. 한 번에 30초씩이거든? 세 번 누르면 1분 30초야. 그치? 한참 있다가 여자가 무엇이 생각난 듯 슬을 쳐다본다. 우리 거는 한 번 누르면 1분 20초잖아. 그러니까 잘 되었네 엄마. 이렇게 하면 1분 30초니까 우유가 좀 더 따듯해지겠지? 딱 세 번만 누르면 돼, 알겠어? 슬의 설명에 여자는 건성이다. 아직 불만이 남은 여자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시커먼 색은 싫다니까! 지켜보던 직원이 참견을 한다. 손님 빨간색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흰색… 슬이 눈빛으로 직원을 제지하며 여자에게 타이르듯 천천히 말한다. 그럼 그냥 갈까? 빨간색은 안 만든대. 여자의 목소리가 급기야 노기를 띤다. 그럼 우유를 어떻게 데워? 네 아빠가 우유가 차다지 않아!
두 사람의 대화는 논리를 상실해 가는 중이다. 직원은 모녀의 대화를 듣고만 있다. 그는 자신이 끼어들 틈이 언젠지 알려달라는 듯 너그러운 수도자 같은 자세로 서 있다가 슬과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이렇게 하자 엄마, 이거 사 갖고 가서 내가 빨갛게 껍질 씌워줄게. 그럼 좋겠지? 그때서야 여자의 얼굴색이 맑아지며 호기심이 어린다.
여자의 시간은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빨리 흐른다. 아침 식탁에서 남자와 말다툼을 할 때만 해도 여자는 정신 줄을 아예 놓아버리지는 않았다. 여자는 남자와 슬을 알아볼 수 있었고, 식탁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며 남자의 성마른 화통에 대꾸할 수도 있었다.
전자레인지를 고르고 모녀는 다시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다. 똥이 나온 거 같아. 여자가 황망한 얼굴로 슬을 바라본다. 하이마트 다시 갈까? 요 앞이니까. 아니다, 그냥 가자, 너 바빠, 슬이 바빠. 엄마 화장실 갔다 집에 가도 나 괜찮아. 안 바쁘다니까 그러네. 슬은 딸 눈치 보느라 쩔쩔매는 여자를 마음 놓이게 해 주고 싶지만 여자의 고집이 완강하다. 슬이 문장 하나를 삼킨다. 엄마 미안해. 내가 맨날 엄마한테 바쁘다고만 했었나 봐. 나 안 바쁘대도….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 눕는다. 힘겹게 참아 온 졸음을 더는 이기지 못한 듯하다. 저녁이 되어도 여자는 깨어나지 않는다. 슬이 방문을 열고 여자에게 다가간다. 엄마, 엄마? 여자는 잠꼬대처럼 끙끙거릴 뿐 대답이 없고, 여자의 옆에서 구린내가 번져온다. 슬이 여자의 엉덩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엄마 똥 쌌어? … 냄새나네? 여자는 죽은 듯 말이 없다. 슬이 여자를 옆으로 밀치고 바지를 내려 들여다본다. 똥은 반건조 오징어 상태쯤으로 말라서 여자의 엉덩이를 감싸고 있다. 옷 속에 갇혀 있던 구린내가 빠르게 빠져나와 슬을 덮친다. 앙? 이게 뭐야! 엄마!
몇 시간째 여자의 팬티에 말라붙어 있던 똥은 색이 바래 하얗게 변해 있다. 슬이 여자를 뒤척이며 바지를 벗긴다. 잠에서 깬 여자가 자기의 하얀 똥을 보며 웃는다. 우습지? 슬은 여자의 똥 묻은 팬티와 바지, 똥물이 스며든 이부자리를 거둬 손으로 비빈 후 표백제 푼 물에 담근다.
슬이 저녁밥을 안치고 고등어를 굽고, 마른 멸치를 식탁에 올린다. 빈 간장 종지가 눈에 들어온다. 슬이 여자 대신 남자의 식탁을 준비하고 있다. 쪽파를 썰고 다진 마늘을 꺼내 종지에 담고 진간장과 고추장을 약간 덜어 넣은 후 맛이 나도록 섞어둔다. 남자는 간장이나 고추장이 있어야 식사를 한다. 수저를 차리고 밥을 퍼 놓은 슬이 남자의 방을 향해 목을 뺀다. 아빠, 저녁 준비됐어요. 남자가 태연한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온다. 슬은 다시 세탁실로 가서 표백제에 담긴 여자의 바지와 속옷과 이부자리를 헹궈 내서 세탁기에 넣는다.
슬이 윤이 나는 빨간색 시트지를 사 왔다. 전자레인지 크기에 맞춰 종이를 잘라 붙이고 있는데 여자가 곁으로 다가온다. 니 뭐 하니? 엄마 전자레인지 빨간색으로 바꿔주려 그러지. 빨간색을 내놓으라며 실랑이 벌이던 사실을 말끔하게 잊은 여자는 슬이 가위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그걸 왜 바꿔? 내가 언제 바꿔 달랬어? 여자의 말에 슬이 빙그레 웃는다. 마감을 마친 전자레인지는 이제 붉은색이다. 어때, 맘에 들어? … 나 치매 걸리면 어쩌니? 여자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여자는 치매가 이미 자신을 덮쳤음을 알지 못한다. 치매는 그렇게 여자의 전두엽을 갉아먹는 중이다.
나두 자주 잊어버리고 그래. 맨날 핸드폰 찾아다니잖아. 슬이 시치미를 떼며 장난기 섞어 대구 한다. 여자의 얼굴에 천진함이 배었다고 생각하며 슬이 심중을 드러낸다. 엄마, 간병인 선생님, 매일 오시라고 할까? 나는 미국 갈 거고, 아빠도 맨날 집에 있을 수는 없으니 어때? 누구 오는 거 싫어. 혼자 있는 게 좋지. 허리를 못 쓰니 사람 오라 하는 거지, 나 괜찮아. 집안일을 기어이 혼자 하겠다는 여자다. 엄마 이 집도 어떻게 해야지. 갑자기 덜컥 엄마 정신 놓으면 어떻게 해? 병원비도 걱정이잖아. 나 죽으면 니들이 알아서 해. 엄마가 서명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상미네는 집을 자식 명의로 해 줬더니 그 담부터 한 놈도 안 들여다본다더라.
여자는 집을 생명처럼 잡고 있다. 슬은 여자의 불안을 안다. 여자의 자식들 중 누구 하나 살가운 놈이 없잖은가. 어쩌다 통화하는 자신은 맨날 팩팩대고, 그나마 멀리 있어 보고 싶을 때 볼 수도 없다. 혼자 사는 둘째는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나 되어야 얼굴을 내밀고, 아들 며느리는 제사 때도 전화를 받고서야 겨우 손님처럼 다녀간다.
오후 5시. 음식만큼은 여자를 따라올 손이 없다고 믿는 남자가 이때쯤 돌아온다. 여자의 하루가 훈련된 강아지처럼 충직하다면 남자의 하루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이다. 틱. 틱. 틱. 현관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남자를 보자마자 우유 타령이다. 아침에 우유도 안 먹고 어디 갔다 와요? 남자가 기막힌 표정으로 여자 뒤에 서 있는 슬을 건너다본다.
식사했어요?
아니, 먹어야지.
엄마…. 슬이 처연히 여자를 부른다. 여자의 생애가 가파르게 엔딩을 향해 가고 있다.
나 집에 가야겠다. 여자가 베란다에 놓여 있는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더니 현관을 나선다. 어딜 간다고 그래. 여기가 엄마 집인데. 쓰레기는 왜 들고나가? 내가 나가면서 버릴라 카지. 니는 왜 자꾸 나를 잡는 게야. 네 형부 저녁 늦으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 나 누구야? 너? 큰딸이지. 큰딸 이름 뭐야? … 나 집에 가야 해. 엄마 자고 갈래? 나랑 같이 자자. 응? 집에 가야 해. 느그 아빠 밥은 어쩌고?
어디서 힘이 솟구치는 것인지 여자의 힘을 당하기 쉽지 않다. 막무가내 현관으로 나가는 여자를 슬과 남자가 진땀을 흘리며 막아선다. 마침내 슬이 여자를 이끌어 안방으로 들어간다. 남자가 울면서 여자의 손에서 쓰레기 봉지를 낚아챈다. 집에 갈 수 없게 된 여자는 화가 나서 얼굴이 뾰로통하다. 여자가 찾는 집은 어디쯤 있는 걸까. 구의동 그 집에 가려는 것일까. 여자는 마당에 감나무가 열리는, 이미 팔아버린 구의동 주택을 몹시도 좋아했다. 그 집에 이사한 후 모든 것이 잘 풀렸다고 믿는 여자다.
구의동 집에서 아들은 박사학위를 받았고, 두 딸을 결혼시켰으며 남자는 지위가 높아져 어딜 가도 남자의 아내로 대접받았다. 집을 늘리느라 조금씩 늘어나던 빚도 구의동 집에 사는 동안 모두 청산했다. 어린이대공원이 옆에 있어 공기 좋고, 산책하기 좋고, 주변에 대학이 많아 길에 다니는 사람 모두 양반이라고, 슈퍼에 다녀온 여자는 그 속에 사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는 어디 있어?
응? 엄마? 아빠 불러올까?
아니 괜찮아. 근데 아버지는 왜 나를 데리러 안 와? 내가 안 그랬다고 했잖아. 아버지 오면 다 말할 거야. … 니는 누꼬?
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여자는 자신의 유년으로 돌아가 있다. 뭔가 누명을 썼던가 보다. 여자의 아버지는 다섯 남매 중에 맏딸로 태어난 여자를 ‘살림 밑천’이라며 표 나게 예뻐하고 아낀다. 한결같이 여자의 편이 되어주던 아버지가 계신 곳, 삶의 끈을 놓아버린 여자는 아버지 품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꿈꾸듯, 여자가 혼잣말을 해댄다. 아버지는 잘 있어? 왜 날 보러는 안 오고?
여자의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다. 남자가 결혼한 신부를 두고 입대해 버리자 여자는 혼자 아이를 낳았다. 남자에게는 배다른 형이 있었다. 남자의 형수는 여자에게 물건을 훔친다 하고, 물건이 발견되면 ‘새 동서가 숨겨 놨다 내놓은 것’이라며 또 떠들고 다녔다. 계집아이를 낳은 여자는 아들 못 낳은 죄인이라 동서에게 대거리도 못했다. 여자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 나 데려가.
여자의 기억이 어디쯤 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억울함이 풀린 것인지 돌아누운 여자의 얼굴이 평온해진다. 여자의 잠꼬대가 잦아든다. 살얼음판 같은 밤이 지나고 있다.
엄마 왜 일어나? 아직 새벽 별이 지지 않은 시간, 여자가 잠에서 깬다. 밥 해야지. 무슨 밥을 지금 해? 밥때가 되면 밥을 해야지. 애들도 학교 보내야 하고. 당신도 우유 먹어야지?
엄마….
여보….
남자가 말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식탁 앞에 앉는다. 그는 슬을 건너다보며, 밥은 네 엄마 밥상이 최고다, 한다. 남자 목소리에 풀이 죽었다. 그는 울고 있다.
부화한 새끼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자살적 모성의 벨벳거미, 여자는 벨벳거미다. 여자는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와중에도 밥 하러 일어난다. 기계처럼 한평생 부엌을 지킨 여자, 밖에서 뭘 잘못 먹지는 않는가 싶어 새끼의 똥을 들춰 보던 여자다. ‘밥 하기’는 여자의 진액을 내어주는 일. 여자의 밥으로 남자와 아이들은 살이 올랐다.
눈물을 닦아내어 말갛게 된 슬의 얼굴이 여자의 동선을 따라 비틀비틀 움직인다. 밥 하려고 부엌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엔 군더더기가 없다. 자신의 꽃밭에 심긴 것을 돌보느라 60년을 투신한 여자, 그녀는 아버지 집에 도달할 때까지 밥 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밥상이 차려진다. 남자와 슬이 식탁에 앉아 밥그릇을 비운다. 새벽 4시다.(*)
<문예바다> 22년 가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