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에트르타 / 프랑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 도시 세 군데를 다녀왔다. 에트르타, 옹플뢰르, 몽생미셸.
한 군데씩 정리한다.
1월 27일 오전 9시. 바르셀로나 항에 배가 정박하기 무섭게 가방을 들고 나선다. 가방을 방문 앞에 내놓으면 포터가 육지 하선장까지 안전하게 운반해 주지만 마음 급한 나는 기다릴 수가 없다. 오전 10시 반 떠나는 파리 행 기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크루즈 배 안에 인터넷이 좋지 않아 기차표 예매도 못한 상태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 역으로 간다. 무사히 바르셀로나 기차역 도착, 파리로 향하는 테제베에 앉는다. 아니, 그 긴박했던 순간을 두 줄로 써 버리다니 헛헛하다. 서울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러 가는 것도 아니고, 국경을 넘는 일이다. 그것도 타국에서. 바르셀로나에서 파리행 기차를 탄다면서 예매는 고사하고 기차 시각도 정확히 모르던 상황이다. 그냥 무모했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번갈아 이용하며 1층까지 내려가는 일은 첩보전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끊긴 층에서는 계단을 찾아 미로 같은 크루즈 복도를 헤매야 했다. 게다가 내 방은 14층이었다! 14층은 전망 좋고 식당 수영장 공연장이 가까운 로열층이었지만 짐을 운반하는 일은 다른 얘기였다. 1층 출구 앞까지 왔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방마다 하선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하선이 허락된 객실 손님들이었다. 새치기를 시도했다. 신사적으로 양해를 구하고, 파리로 가야 하니 먼저 나가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사정은 통하지 않았다. 출구 문이 아직 안 열렸던 것. 발을 동동 거리며 기다린 후,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그야말로 튀어 나갔다. 검색대를 지나 승선표를 반납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번엔 택시 승강장을 찾아 뛴다.
바르셀로나 기차역. 테제베 매표소는 자국(스페인) 기차표 매표소와 따로 운영한다. 테제베 매표소 앞까지 왔다. 왕복 티켓 살래? 프랑스 패스 사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안내해 줄까? 파리에는 며칠이나 있을 거야? 프랑스는 언제 떠날 거야? 1등석 줄까 2등석 줄까? 역무원 질문이 끝이 없다. 이러다 기차 놓치겠다. 1등석 편도로 빨리 줘! 빨리빨리!
좌석에 올라앉자 필사적으로 내달린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흐흐흐 나는 이제 파리로 간다!
파리 여행 관심 포인트는 샹젤리제 거리와 몽마르트르 언덕,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과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쇼아 기념관, 에펠탑과 세느 강변 느리게 걷기다. 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파리에서 놀다 주변 도시 몇 군데까지 욕심을 내 볼 생각이다. 내가 점찍은 도시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과 고흐가 마지막 생애 70여 일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다. 일정은 빠듯하다.
파리를 느긋하게 즐길 수는 있으나 짧은 일정에 주변도시 방문하기에는 교통상황이 좋지 않다. 나는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기로 했다. 에트르타와 옹플뢰르, 몽생미셸을 하루에 둘러보는 현지 여행사 당일치기 패키지여행팀에 합류하기로 한다. 오전 6시 출발이라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수월하게 둘러볼 수 있겠다.
한국 2017년도 드라마 ‘더 패키지’에는 몽생미셸이 구석구석 소개되어 있다. 몽마르트르 등 파리 명소도 로맨틱한 스토리와 함께 등장한다. 몽생미셸과 파리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라면 미리 찾아보고 떠나는 것도 좋겠다. 나는 더 패키지를 복습용으로 봤다.
파리에서의 나흘간 일정이다.
첫날, 짐 풀고 파리 시내에서 노닥거리기.
둘째 날, 몽생미셸, 에트르타, 옹플뢰르.
셋째 날, 샹젤리제 거리와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쇼아 기념관과 에펠탑.
넷째 날, 몽마르트르 언덕, 오베르 쉬르 우아즈,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에트르타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의 작고 예쁜 중세 도시다. 연중 거의 맑은 하늘 보기가 어렵다는 노르망디다. 에트르타 가는 동안도 비 안개로 창밖이 거의 보이질 않는 지경인데 다행히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는 시각에 비가 멈춘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본능인 듯 바다를 향해 걷는다. 이 길 이름이 모파상 거리. 왼쪽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날의 시청이 있고 길 좌우로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공기가 습하다. 짙게 초록 이끼를 이고 있는 주택가 지붕들이 누적된 시간을 느끼게 한다.
시 청사를 지나 200미터쯤 걷자 오른쪽 담벼락에 아르센 루팡의 집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이 집은 본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괴도 루팡을 집필했다 한다. 그러나 괴도 루팡이 살아 있는 인물인 듯 세상을 활보하는 바람에 르블랑의 이름은 뒷전이 되고 집의 현판은 ‘루팡의 집’으로 바뀐다. 자신의 분신이 이쯤 유명세를 탄다면 내 이름이야 잊혀도 넉넉히 좋지 않을까. 하얀 울타리가 쳐진 루팡의 집 정원이 단정하다.
1) 루팡의 집 안내판과 정원을 지나 있는 정갈한 루팡의 집
2) 이끼가 짙게 앉은 에트르타 지붕들과 에트르타 해변.
에트르타 해변은 모래가 아닌 자갈해변이다. 가만가만 귀 기울이면 자갈의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
3) 모네의 시선이 닿았던 그곳. 모네가 이젤을 놓았던 곳에 이렇게 안내판이 서 있다. 코끼리 바위로 불리는 팔레스 다발이다.
4) 오른쪽의 팔레스 다몽. 팔레스 다몽 위로는 초원이다. 초원을 가로질러 단아한 성당,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교회까지 사람들이 산책할 수 있다.
5) 예술가의 마을 표지를 붙여둔 게스트 하우스
루팡의 집을 나와 오던 길로 곧장 걸으면 에트르타 해변이다. 알에서 나온 거북이 무작정 바다를 향해 기듯 일행이 다시 바다로 줄지어 이동한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나타나는 연둣빛 바다에 놀랄 새도 없이 좌우로 흰 거대한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모네를 비롯 많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바로 그 코끼리 바위다. 모네의 그림 50여 점에 에트르타가 등장한다. 모네가 이젤을 펼쳤던 지점에는 그의 그림과 함께 안내판이 붙어 있기도 하다. 이 코끼리 바위의 정식 명칭은 왼쪽 바위가 팔레스 다발, 오른쪽이 팔레스 다몽이다. 코끼리 바위라는 명칭은 모파상이 지은 것이라 한다. 모파상 거리, 모파상 작명의 바위... 모파상의 에트르타 연정도 누구 못지않음의 반증이다. 코끼리 바위 형상에 취한 모파상은 그의 소설 속 모티브로 이곳을 취한다. 구스타프 꾸르베 역시 에트르타에 반해 이곳에 이주해 살았고 르블랑은 괴도 루팡과 홈즈의 전투 장면에 에트르타를 묘사한다. 특히 19세기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알퐁스 카는 에트르타를 방문한 후 그의 기사에 에트르타를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 기록한다. 그 바람에 문학과 예술의 숨은 성지였던 에트르타는 세상에 알려지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도 이곳 에트르타이다.
팔레스 다몽 위로는 계단이 놓여 있어 산책이 가능하다. 겨울바람을 안고 숨 가쁘게 오르면 푸른 초원이 언덕을 오른 수고를 보상해 준다. 아래로는 탁 트인 에트르타 해변과 구시가지가 또 다른 뷰를 선사함은 물론이다. 멀리 은회색 코끼리 바위는 하늘과 바다와 닿아 몽환적 분위기를 낸다. 절벽 위 잘 가꾸어진 정원 끝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듯 작은 성당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