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친코와 모순
개봉일에 맞추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러 갔다. 어린 시절 지브리 애니를 보고 자란 세대들,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만이 심야시간대에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은퇴한다고 선언했으나 곧바로 이를 번복한 남자가 만든 작품. 하도 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잔소리만 하다 끝내는 영화다- 등등의 평이 많았기에 크게 기대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자만은 했었는데.. 어릴 때부터 지브리를 좋아했기에, 이전과 비슷한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근래 독서를 많이 한 만큼 감독의 숨은 의도를 잘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무엇 하나라도 포착을 하는 게 어려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맥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고, 이렇게 끝나는 거야? 싶었을 때 정말로 영화가 끝났다. 사람들 다들 서로에게 '너 이해했어?'라는 말만 묻는 걸 듣고, 나만 이해 못 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샤워하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메시지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자기 전에 결국 나무위키를 열어 들어갔다. 그의 자전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였다. 마히토가 곧 그이고, 그가 살면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주변 캐릭터로 등장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해를 못 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본인의 생을 돌이켜보며 80대의 나이에 낸 영화인만큼, 그의 80년 생의 이야기가 2시간에 함축되어 있다. 꿈같기도, 현실 같기도, 뒤얽힌 그 시공간을 나는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자서전을 출간하는 대신 이를 영화로 낸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이해해 주길 기대하는 마음에 만든 영화 같지도 않았다. 본인의 삶을 상상과 창의의 세계에 내던져 만든 것이니, 남들의 해석은 사실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가 엄마에게 선물 받은 책의 제목이라는데, 이젠 관객들에게 이 책을 건네는 듯했다. 난 이렇게 살아왔고, 이런 경험을 해서 이런 관점을 얻게 되었지. 그대들은 그래서 어떻게 살래?의 뉘앙스다.
영화를 본 지 3일 뒤, 1년 만에 할머니를 뵈러 갔다. 정확히는 1년이 넘었는데, 그 사이에 할머니는 더 쇠약해지셨다.
견생을 이미 다 겪은 것 같았던 푸들 한 마리는 그 1년 사이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새로운 강아지가 들어와있었다. 태어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몸집은 이미 엄청나게 컸고 어린 만큼 해맑은 눈빛이 가득했다. 정신없이 놀아달라며 몸을 이리저리 던지는 강아지를 뒤로하고 할머니 옆에 앉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말했다. 앉은 모습을 보니 할머니 몸집이 이제 나보다 작아졌다면서. 분명 할머니는 내가 콩알만 했을 때부터 날 보았을 텐데, 이젠 반대로 할머니의 몸이 작아진다는 게 이상했다.
할머니는 그간 몸이 좋지 않아 계속 누워있어야 했는데, 어느 날 조금 기운이 돌아 부엌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부엌까지 겨우 걸어가 믹스커피 한 봉지를 직접 타서 먹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눈물을 그렁그렁 맺는 할머니한테 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엄마! 우리 같이 젊은 것들도 그냥 다 내려놓고 살아. 뭘 어떻게 살긴 어떻게 살아. 그냥 사는 거지. 아직 그런 생각 하는 거 보면, 엄마는 아직도 젊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20대 나의 고민과 다를 바가 없는 문장 그 자체라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생각이 주는 불안감과 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래 독서와 감사일기를 내 몸과 가까이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보다 60년을 더 산 할머니가 말한다. 60년을 더 적게 산 내가 스스로에 내뱉었던 질문을 똑같이.
동시에 이상하게도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80대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2시간의 러닝타임으로 풀어내듯, 살아온 80년을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사실 명백한 답이란 없다. 명과 복을 다 다르게 타고 태어났다고 할 만큼, 사람의 삶은 다 다르게 존재하는 것인데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미야자키의 영화처럼, 할머니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2시간에 풀어낸다면 그건 할머니만의 <어떻게 살 것인가> 작품이 된다. 이렇게 돌이켜본다면, 할머니는 수십 년간 살면서 몸에 밴 방법으로 당신만의 생을 이미 잘 헤쳐나가고 계셨을 것이다. 체득한 관성은 간직한 채, 머리에서는 끊임없이 기차가 달린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안고서.
80대의 나도 비슷할지 모른다. 커피 대신, 직접 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30대에는 결혼이라는 기로 앞에 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40대에는또 다른 이유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할 거다. 50대에도 마찬가지로, 패턴은 반복하겠지만 그때마다 이유는 다르겠지.
내가 애정 하는 소설, 양귀자의 <모순> 문장이 떠오른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스물두 살에 이 책에 푹 빠졌던 건, 그때도 대체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나름 있어서였기 때문일까.
할머니는 이미 살아가면서 탐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탐구였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을 수 있다. 생과 사의 차이가 종이 한 장도 못 되는 무게였던 전쟁을 겪은 시기에 이미 할머니는 존재했으니까. 스물두 살의 나는 책으로 삶을 이해하려 했지만, 스물두 살의 할머니는 부딪히며 삶을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