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수많은 자발적 노동을 위하여
우리는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논다’ 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삶과 활동에 관련된 언어가 일 (work, labor)과 놀이 (play) 두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는 것은 소모적이고, 일하는 것은 생산적이라고 여긴다. 일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고, 그렇게 돈을 벌러 다니고 있지 않으면 ‘놀고 있다’ 고 생각한다. 놀이가 좀 더 진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면 예술 ‘art’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돈을 안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 ‘자원봉사’라고 한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근 20여 년 사이에 좀 다른 차원의 ‘활동’ 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돈을 벌러 다니는 ‘일’ 도 아니며 그렇다고 ‘놀이’처럼 소모적이지도 않으며, 나와 다른 사람을 동시에 즐겁게 하는 ‘생산적인 일’ 이지만 ‘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고 ‘자원봉사’라고 하기에는 꼭 희생만 하는 것도 아니며 내게 이득이 되는 것도 많은, 그런 일들이다. 이 ‘활동’ 들은 개인들이 도구를 손에 쥐게 되면서 등장했다. 디지털과 인터넷, 값싼 테크놀로지라는 도구다.
새로운 활동의 등장
이것은 전 세계 수억의 사람들이 찾아보는 백과사전 문서를 작성하고 수정하는 일이었고(위키피디아), 거대한 무료 오픈소스 운영체제를 구축해나가는 일이기도 했다. (GNU/리눅스) 이것은 외국인 여행객을 재워주며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무료 플랫폼을 만드는 활동이기도 했고 (카우치서핑) 도구를 이웃과 무료로 서로 빌려주고 교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서비스하는 일이기도 했다. (피어바이).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해하기 쉬운 코딩 강좌와 (생활코딩) 다양한 취미와 생활에 관련한 무료 강좌를 만들어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픈튜토리얼스)
누군가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담아낸 보드게임을 만들고 (수저게임) 어떤 사람들은 양질의 해외 콘텐츠를 꾸준히 번역하고 (뉴스페퍼민트) 어떤 사람들은 유용한 무료 앱을 만들어 공유한다. 누군가는 국회의원들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정치적 플랫폼을 만들고 (박근핵닷컴, 필러버스터 미) 어떤 사람들은 기존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스로 언론이 되었다. (미디어몽구, 아이엠피터, 닷페이스, 청춘 C발아) 지식을 모으고 토론하며 사람들의 인사이트를 발전시키고, (수많은 독서 토론 모임) 기술을 해체하는 각종 실험을 하는 활동들도 존재하며, (언메이크랩) 이슈에 대한 기록과 리마인딩을 하는 수많은 다큐 작업들, 소셜 캠페인, (작은 소녀상 프로젝트, 세월호 광고) 도 존재한다. 정책에 대한 실험을 하는 일도 있으며 (기본소득실험 프로젝트) 사회를 바꿔내는 목소리를 모으고 공공 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 일도 존재한다. (청년정책네트워크)
이러한 ‘활동’ 들은 누군가 보수를 지급해서 시작되는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일도 아니다. 이윤을 창출하는 일도 아니며 돈을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 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예술, 창작을 넘어 사회, 문화, 학문, 연구, 정치의 영역까지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기업이나 관료시스템에서 지정해주지 않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사람들 안에서의 창조적 에너지로 만들어지는 그런 생산적 활동들이다.
이 ‘활동’ 들이 매우 소수들만이 기여하는, 특수한 케이스로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으로 잠시 가 보자. 텀블벅에는 근 3년 간 문화, 예술, 테크놀로지를 통틀어 3500개에 가까운 프로젝트가 올라왔고, 사람들이 글을 쓰면 후원을 해주는 스토리 펀딩에는 근 2년 간 1000여 개에 달하는 프로젝트가 올라왔다. 킥스타터에는 지금껏 약 11만 건의 창의적인 프로젝트가 올라왔다. 신춘문예 공모의 작품들은 한 해에 7000 편이 넘고, 공모전에 투척되는 영화 시나리오와 트리트먼트들은 한 해 2000편이 넘는다. 메신저 텔레그램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 무료로 공유하는 400여 개가 넘는 이모티콘 스티커가 존재하며, 네이버 웹툰 베스트 도전 코너에는 2000명이 넘는 작가들이 약 12만 개의 웹툰을 올리며 활동하고 있다. 코딩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는 스택오버플로우에는 2013년 기준으로 50만 건 이상의 질문과 답변이, 깃허브에는 코드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기여' 하는 900만 명의 액티브 유저가 존재한다. 페이스북에, 유튜브와 블로그와 브런치에 존재하는 수많은 콘텐츠는 누가 과연 얼마를 받고 만드는 것인가?
이것은 보통 우리가 ‘일’(work)이라고 여기는 것들과 거리가 있다. 이것은 임금 노동이 아니다. 분명 이들 중 아주 소수는 충분한 수익 창출도하고 혹자는 대박도 터뜨리지만, 이는 ‘결과’ 일 뿐이지 노동을 보장하는 급여가 아니다. 이 생태계는 상금은 존재하지만 월급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이러한 활동 중 어느 것도 스스로의 생활비를 해결하고 월세를 내고 대출금을 갚고 아이를 키우거나 차를 사기 위해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라.
이 활동들의 대부분은 조건 없이 해내는 자발적인 노동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돈을 받는다는 조건이 없는데도 이러한 일들을 도대체 ‘왜’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사회의 빈틈을 발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것이 즐겁고, 의미 있고, 짜릿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뭔가를 사람들이 기쁘게 사용하는 것,
내가 만든 창작물을 사람들이 보고 감동을 받는 것,
그리고 사회의 고장 난 부분을 고치고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보는 일들은
진정 섹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활동’ 들은 생각 노동이고, 기획 노동이고, 당신과 나를 즐겁게 하기 때문에 놀이 노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노가다라 불리는 그 모든 육체노동도 종종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 들의 상당수가 실제로 과거에 기업에 의한 임노동과 같은 가치를 지닌 일들이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 광범위한 망을 채울 콘텐츠를 만들게 되면 비용이 엄청날 것이라 생각했다. [1]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은 분명 유급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스택오버플로우에 답변을 다는 유저들의 노동은 과거에는 기업들이 기술지원 직원을 고용해 했던 일들이다. 심지어 우린 네이버에서 의료, 동물 의료, 요리까지 유용한 정보들을 무료로 얻고 있다. 이는 네이버가 고용한 전문가들이 답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콘텐츠의 ‘유통’ 까지 무료로 해주고 있다. 나는 NASA의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고 공공정책도 제안하고 국회의원의 비리를 적발하는 프로젝트도 해냈다는, [2] 그 ‘집단지성’ 에도 월급을 지급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자발적 노동의 가치
이러한 ‘활동’ 들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전부 이러한 ‘활동’을 멈춰버린다고 가정해 보라. 페이스북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며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 유튜브 또한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세계는 포르노와 자극적인 상업적 영상과 주가 사기꾼들의 정보와 광고로 뒤덮일 것이다. ‘ 우리는 네이버에서 더 이상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이고 스택오버플로우에서 도움을 받아 코딩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백과사전은 업데이트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이나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공정한 언론도 사라질 것이다. 벗고 춤을 추는 아이돌의 음악 외에 다양한 색깔의 음악들을 들을 수 없을 것이며, 보수를 받지 않는 공정한 리뷰도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어떤 정보도 공평하게 ‘유통’ 되지 않을 것이다.
마케팅에 종사하는 데이터 과학자는 넘쳐나겠지만, 공공복지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살리는 데이터 과학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돈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모든 창조적 실험과 연구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신한 인디 게임들도 볼 수 없을 것이며 매니악한 음악들과 인디 영화들, 힘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전하는 다큐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가치들은 돈을 버는 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교육의 격차를 줄이거나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일, 안전을 강화하고 사람을 보호하는 일들이 그렇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고 세상을 고치는 일들처럼 유익이 사회 전체에 고르게 분배되는 일일수록 구매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구매자가 존재하지 않는 일들은 시장에 존재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을 기꺼이 하는 이들과 이를 후원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러한 가치들이 가까스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돈을 받아야만 뭔가를 하는 세상이라면,
세상은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돈을 대가로만 뭔가를 한다면,
세상은 진정 비참해질 것이다.
생계의 딜레마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지대, 투기, 고리대금업, 이윤배당, 차익 실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허용되지만 ‘돈이 되지 않는 생산적 활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자본 - 노동 - 생산 - 판매 - 소비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는 ‘활동’ 들은 사회에서 ‘생산적인 일’ 로 인정받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도 보호막도 존재하지 않는다.
임금노동 이외의 비영리 활동들에 여력을 주기 위해 각종 지원사업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청년창업 지원사업이나 각종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경험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공공 지원사업이란 것은 마치 단 한 푼도 생계나, 월세를 내거나, 집 대출금이나 학자금을 갚는 데는 쓰일 수 없도록 짜여 있다. 즉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또 다른 임금 노동을 하거나 영리 목적의 일을 하게끔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장사하기로 마음먹지 않고 생산적인 뭔가를 창조하고 싶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렇게 협소하다. 대부분 돈이 되는 일을 해서 남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여 ‘생산적 활동’을 한다.
그렇게 사회의 제도적 체계는 이러한 일들을 취미나 이벤트성의 보조적인 생산활동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활동’ 들을 기업과 소비자로 이루어진 임금노동의 세계 한 켠에 처박힌 채 취미나 창작 활동 정도로 무시되기엔, 이 활동들은 너무나 필요해졌고, 거대해졌다.
돈이 되는 일과 생산적인 일은 다르다.
이처럼 돈이 되지 않지만 생산적인 일이 있는 반면, 돈이 되지만 가치를 파괴하는 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심 없이 올리는 리뷰는 돈을 받고 올리는 리뷰보다 정보로써의 가치가 있지만, GDP에 반영되는 건 후자다.
페이스북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은 광고이지만, 페이스북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유저들의 콘텐츠다. 생산적인 활동들은 돈으로 교환되지 않지만, 이용자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돈을 벌어다 준다.
국내 이동통신사 3사가 2015년에 쓴 마케팅 비용은 약 7조 8000억 원으로, 같은 해 인프라 투자 비용보다 2조 가량 많은 예산이다. 반면 1인당 매출은 그대로이거나 조금씩 오르고 있다. 그들이 서로의 고객을 빼앗아오기 위한 전쟁에 들이는 비용은 고스란히 이용자가 부담한다. [3]
한 대기업에서 정치권에 로비를 하는 200명 가까운 직원들의 연봉은 1억에 달한다. 미국에서는 한 해 35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이 기업들이 정치권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로비에 쓰이고, 이를 위한 자금은 물론 더 많다. [4] 택시 앱 우버는 기업가치 상승으로 확보한 엄청난 투자금의 대부분을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쏟아붓는다. [5] 현대 사회에서는 '돈을 버는 일' 중 상당수가 경쟁사의 고객을 뺏고 독점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데 쓰인다.
많은 돈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에 쓰이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그 일들을 한다.
광고와 마케팅이 우리의 정신과 시공간을 점령해가고 금융이 생산 없이 돈을 불리는 동안, 우린 우리가 목숨 걸고 키우고자 하는 GDP 안에서 정녕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생산적인 일’ 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들여다본 적이 없다.
웹툰 작품들의 히트작이 얼마를 벌어들였고 웹툰 시장이 얼마나 되는지 연일 보도되지만, 2000여 명의 무명작가와 12만 개의 웹툰들에 쏟아지는 열정과 에너지, 시간과 노동의 가치는 그림자 속에 남아 있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올라온 5000개 가까운 프로젝트들에 담긴 사람들의 노력과 에너지를 측정한 그 어떤 지표도 나는 본 적이 없다. 백억이 넘는 누적 후원액을 보도하며, 크라우드펀딩으로 대박을 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뉴스들은 강조하지만 이것이 사람들의 ‘자발적 노동’과 ‘후원’으로 만들어진 가치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이 ‘돈과 보상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가치라는 사실을 말이다.
작게는 고양이 동영상에서 음식점, 책 리뷰, 크게는 콘텐츠 창작과 무료 소프트웨어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디지털 플랫폼을 만드는 일 까지, 그 모든 생산적 활동들의 가치를 간과하는 이유는, 우리가 시장 가치로 측정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의 언어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힘
우리는 이러한 ‘돈이 되지 않지만 생산적인 활동’에 대한 언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다. 도처에 존재하는, 세상의 빈틈을 메꾸고 사회를 조금 더 낫게 만들고, 새로운 풍요를 창출하며 스스로와 모두를 즐겁게 하는 일이지만 노동에 대한 보수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일들 말이다.
언어를 갖게 되면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된다. ‘여성 혐오(misoginy)’라는 언어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마자 우린 이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헬조선’ ‘흙수저’라는 단어만큼 계급의 존재를 머릿속에 선명히 가르쳐준 언어도 없었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라는 언어는 그 언어의 존재만으로도 기본소득을 가로막는 강력한 개념이 되었다. ‘정보 비만’ ‘가짜 뉴스’라는 언어가 부상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도처에 널려있는 해로운 것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언어를 갖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다루고 활용하고 측정하고 줄이거나 키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생산적인 ‘활동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이름들은, 취미, 덕질, 잉여 짓, ‘하고 싶은 일’ ‘작업’ 정도이며, 조금 우아해지면 ‘재능기부’, ‘자원봉사’‘프로젝트’ ‘지원사업’ 같은 추상적인 이름들로만 떠다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뭔가 간단한 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자유 생산 free work
자발적 노동 free labor
자발적 기여 contribution
자발적 생산 voluntary producing
생산적 활동 productive activity
비시장 경제 non - market economy
참고로 영미권에서 누군가 명명한 플레이버 (놀이 노동) (playbor = play + labor)라는 언어도 꽤 맘에 든다.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언어가 있다면 누군가 ‘뭐 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백수예요’라고 대답하는 대신 ‘자발적 노동자’입니다.라고 대답할게 될 수도 있다. 언어를 갖게 되면 이러한 ‘활동’에 대한 담론이 생기고, 양과 질을 측정하게 될 수도 있다. 잉여와 덕후들의 권익 보호와 투쟁을 위한 ‘전국 자발적 생산자연합’ 같은 게 생길 수도 있다. ‘돈 안 되는 일하는 잉여 연합’ 같은 이름 대신 말이다. 행여 ‘자발적 노동부’ 혹은 ‘생산적 활동부’ 같은 게 생겨서 이를 위한 보호막과 사회 시스템을 설계하게 될 수도 있다. ‘실업률’과 ‘일자리 창출’에 매달리는 대신 자, 안전망을 확충하여 ‘생산적 활동’을 더 키워 보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돈이 되지 않는 일을 지속할 권리
공짜 돈을 주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들은, 돈을 주지 않는데도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일을 스스로 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공무원들이 사회의 빈틈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면 공무원 일자리를 늘리면 되지만, 일반인들이 사회의 빈틈을 더 빨리 발견한다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더 낫다. 돈이 되는 일들이 정녕 생산적인 일이라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낫지만, 만약 돈이 되는 일들보다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이 사회적 가치를 더 많이 생산한다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더 낫다. 기본소득이 이 모든 ‘자발적 노동과 생산적 활동’들에 대한 선불 급여라고 생각하면 왜 안 되는가?
기본소득은 이 모든 ‘생산적인 활동’ 들과 근사하게 매칭 되는 시스템이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라 생각해보자. [6] 우린 공유할수록 부가 증가하는 엄청난 지식자산과 디지털 공유재에 대하여, 광고로 공정함을 흐리고 이용자를 불편하게 만들며, 사용을 제한하는 대신, 다른 보상 시스템을 왜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생산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상금이나 지원금 따위가 아닌, 실제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보상 시스템을 왜 꿈꾸면 안 되는가?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일(work)을 멈출 수도 있다. 돈을 벌러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놀지도(play) 않을 것이다. 시간을 그냥 소모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과 놀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활동(activity)을 할 자유를 얻을 것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일의 수행자가 아니라 일의 창조자가 될 것이다. 단언컨대 수많은 사람들이 고장 난 세상을 고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경쟁사의 고객을 뺏거나 사람들의 시간을 광고로 점령하는 일을 멈추고, 나와 내 이웃에게 진짜 쓸모 있는 뭔가를 할 것이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 대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활동에 시간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 돈으로 평판을 사고파는 일을 멈추고, 공정한 기사를 더 많이 생산할 것이다. 적어도 돈을 버는 일 중에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을 선택권을 갖게 될 것이다. 시장의 가치로부터 벗어난 그 모든 활동을 할 권리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생산적인 일은 반드시 돈을 버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 유료화로 접근을 막지도 않고 광고를 달기도 거부한 디지털 공공재들이 세상에 존재할 자격을 얻을 것이다. 우린 포화된 돈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비루한 전쟁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을 자유를 얻을 것이다.
[1] 90년대 초반,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들은 신문과 방송의 경쟁력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넷 망은 너무 광범위하고 그 망을 채울 콘텐츠를 만들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업을 할 수 있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인에비터블/ 케빈 켈리> 에서
[2] NASA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콘테스트 커뮤니티 '탑코더' 에는 63만 명의 데이터 과학자, 연구자, 개발자,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20개가 넘는 국가에서 수천 개의 다양한 제안서가 제출되었다. - <공유경제의 시대 / 로빈 체이스 / 신밧드 프레스>에서
2009년 영국에선 국회의원들의 세비 조사와 감시를 위해 대규모 크라우드 소싱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이 프로젝트에는 2만여 명의 참가자가 전자 문서 17만여 개를 분석해, 의원들의 비리와 남용을 찾아냈다- <누구나 게임을 한다/ 제인 맥고니걸 / 알에이치코리아>에서
[3] '이통사 투자 6년 전 수준으로 회귀' 서울파이낸스 http://m.seoulfn.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613
'2015 -2016 이통 3사 마케팅 비용 추이 ' /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02/0200000000AKR20170202032000017.HTML
[4] 로버트 라이시의 다큐멘터리, <모두를 위한 불평등>
[5] 예브게니 모로조프, <우버, 정부의 무능력을 비추는 거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6년 3월
[6] '사회 전체가 공장'이라는 말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전복의 정치학]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정보통신혁명에 따라 노동과 착취의 영역이 공장의 담을 뛰어넘어 유통과 함께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양상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