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헝그리 정신
나는 지난가을 뉴욕 기반의 스타트업 Vessel에서 경험디자이너로 일을 했었다. (경험담은 이전 글 '뉴욕 스타트업에서의 6개월' 참고) 스타트업은 처음이라 근무환경 측면에서 새로웠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업계에 종사하는 ‘근로자'로서 불편한 마음이 커졌다.
내가 합류할 당시 이 팀은 두 번의 서비스 파일럿을 시행했고 크라우드펀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회사로서의 수입은 없었다.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파운더 개인의 재정능력이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직원들은 개발자 외엔 모두 대학원 재학생 및 졸업생으로, 무급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 근무조건 역시 동일했다. 그 대신 팀에 투자하는 근무시간은 내가 원하는 만큼만 쓰면 됐고 미팅 시간 외에는 재택근무를 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무급으로 일한 건 아니었다. 직원들 중에는 미국인도 있었으니까. 이 팀이 유난히 학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본 다른 스타트업 채용공고에서 인턴은 보통 무급이었다. 미국에 열정 페이가 있다니? 스타트업 세계에선 당연한 듯 보였다. (스타트업이 아니어도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 인턴십 중에는 무급 인턴십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꽤 많았다)
이 팀에 있는 직원들은 모두 파슨스와 NYU 출신이었다. 사회에 나가면 모두 밥벌이 정도는 쉽게 할 인재가 아닌가. 대학원생이니 학교에 오기 전에도 어딘가에서 경제활동을 했을 터다. 이 팀 이외에도 급여를 받지 않고 일을 하는 인재들이 이 도시 안에 수두룩할 거란 상상을 하니, 뉴욕이란 곳이 한없이 럭셔리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환영받는 곳, 그리고 공짜 고학력 인재가 넘쳐나는 곳! 이 곳에서 뭔들 못할까.
집세 내기에도 빠듯한 뉴욕에서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놀라울 정도로 팀원들은 자기 일에 열정이 가득했다.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동료 하나는 그 프로젝트들에 흥분해 있었다. 경제적 요소가 아닌 부분이 그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것 같아 보였다. 이런 걸 뉴욕뽕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무려 뉴욕에서 혁신을 만든다는 기분. 언제 어디서나 독특한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마주칠 수 있는 게 뉴욕이다. 뉴욕을 테스트 베이스 삼으면 재밌긴 하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새로운 시도에도 관대하다. 그 결과물도 뉴욕에서 벌인 것이니 어쩐지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배고픔과 치열함이 있다. 우리 팀원들은 회사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집세 마련을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거나 더 저렴한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스타트업 소개에는 제품뿐만 아니라 팀원 소개가 필수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스토리로 주목을 끈다. 게다가 팀 규모가 작기 때문에 누가 팀에 있는지에 따라 성과가 다르게 나온다. 스타트업은 그 어느 종류의 회사보다도 팀원이 굉장히 중요하다.
Vessel은 디자이너, 개발자, 마케터, 프로젝트 매니저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구성은 서비스의 특징을 잘 살려주었다. 다만 파일럿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던 개발자 두 명은 정식 직원이 아니었는데도 팀 소개에 항상 들어가 있었는데, 그건 서비스에서 개발 부분이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회사 사정상 인건비가 비싼 개발자를 매일 직원으로 둘 순 없지만 개발자가 둘이 있다고 소개를 해야 개발 쪽이 강하다고 보였다. 디자인이 필요한 때가 아닌데도 일을 찾아 해치우며 팀을 유지하는데 공헌했는데도 표면적 중요도에서 뒤로 밀린 나는 만날 일 없는 그 개발자들이 부러웠다. 뭣이 중헌디?
웹사이트에 올라온 Vessel의 팀원들은 Developer, Designer, Project Manager 등 각자의 스킬과 역할에 맞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투자유치 자료에서 공동창업자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인턴이라고 명시해야 했다. 왜냐고 물으니 정직원이 많으면 투자자들이 “이 직원들에게 다 월급 주면서 스타트업을 하겠다는 거냐”라고 하며 투자를 꺼려하기 때문에 인턴이라고 소개해야 한다고 했다. 스타트업의 반이 인력임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에게 있어 인력은 투자 대상에 포함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야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되서 내부적으로도 인턴이 맞다고 해도, 여름 내내 풀타임으로 헌신한 동료들 역시 공짜인력 취급을 받아야 했다.
투자자들은 초기 스타트업의 인력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 인건비는 서비스가 안정화된 다음에야 회사 내부에서 배려하는 것으로 밀려나고, 사람이야말로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야 하는 주체로 인식된다.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집세에 허덕이고 틈틈이 부업을 해야 노오오오오력을 할 만큼 한 스타트업으로 인정을 받을까? 스타트업 세계는 화려한 기술혁신이라는 이름 뒤에서 "하면 된다"를 강요한다.
꾸준히 해라. 돈이 없어도 버텨라.
아이디어가 좋으면 수익이 그만큼 나올 것 아니냐.
아이디어를 내고 노력을 해서 회사를 키우는 건 분명 사람인데, 그 성장을 위해 제공되는 초기 밑거름은 너무나 보잘 것 없다.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는데도 그 기술을 만든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한다. 더 많은 능력이 요구되고, 능력향상을 위해 개인적인 투자는 늘어나지만 그 덕분에 시간적 경제적 여유는 여전히 부족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초기에 서비스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벌여 생계를 유지했었다는 에어비엔비의 창업자 이야기는 지금 그들이 성공했기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될 수 있었을 거다. 눈물젖은 빵을 먹던게 한 때의 추억이 될지 변치 않는 현실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미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당장 먹고 살기 힘들다면 어떻게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아이디어가 좋았음에도 결국 실패한 스타트업의 사례 중에는 초기에 인건비를 많이 썼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 있다. 나는 그 팀을 진심으로 존중한다. 신생 혁신기업으로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화려한 키워드에 취해 이 세계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스타트업도 결국 사람이 이끄는 회사라는 거다. 사람을 쥐어짜서 만드는 서비스는 지속가능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