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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Jun 28. 2019

부장님의 죽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그로인해 알게된 것


호기로움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매사에 의욕과 열정이 가득한 상사와 함께 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없던 일도 만들고, 있는 일도 키우고, 이미 큰 일은 작정하고 더 키우는 타입이었다. 모두가 쫓기듯 일했고, 모두를 탈진 직전까지 몰아넣고 나서야 추을 잠시 멈추고 수고했다고 술 한잔을 사주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황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폐암. 그것도 4기. 중국 지사로 보직을 옮기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들려온 소식이었다. 잠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좋아하던 도토리 국수를 함께 먹으며 곧 돌아오겠노라고, 평소처럼 호기롭게 웃으며 악수를 나눈지는 반년이 되지 않았기에 섬뜻함마저 느껴졌다.

예고 없이 찾아온 죽음의 전조는 브레이크 없이 50여 년을 달려온 그의 인생을 한 번에 멈춰 세웠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번갈아가며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선후배들은 종종 연락을 하며 심적, 물질적 지원을 끼지 않았다.

한 번쯤 찾아뵐까 싶다가도 변변한 안부인사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작년 연말, 그룹원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건네자 그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보낸 전체 메일에 간단히 답장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이미 충분히 힘든 현실에 얹어지는 사람들의 위로는 힘이 아닌 짐이 될 것 같았다.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슬픔을 묵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그의 메일에서 분노와 무기력의 단계를 이겨낸 암환자의 투지와 결연함마저 엿보고 나서야, 그제야 겨우 몇 자 답장을 보낸 것은 '이제는 위로가 위로로서 기능할 만큼은 단단해지셨구나'라는 나름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어쭙잖은 동정이나 연민이 그를 언짢게 할까봐 몇 번이나 쓰고 지우다가를 반복했다. 거의 바로 수신 여부는 '읽음'이 되었지만, 끝내 답장은 없었다.




 장례식장의 풍경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본인상이라 조문객이 적다며 씁쓸해했고, 누군가는 평소에도 성미가 급한 줄은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급한 줄은 몰랐다며 허탈해했다. 회사에서 위로금은 얼마가 나온다더라, 형수님 일자리라도 알아봐 드려야 되는 것 아니냐, 자녀들 장학금이 지원되는 회사여야 하지 않겠느냐와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들도 꽤 여러 군데에서 들려왔다.

 영정사진은 항암 중에 찍으신 듯했다. 왜 죽음을 앞둔 사람은 한없이 말라가는 걸까. 끝을 모르는 것처럼 야위어가고 작아지는 걸까. 임종 직전, 종아리가 채 한 줌도 되지 않았던 외할아버지가 떠올라 황급히 고개를 돌려 억지로 시선을  어냈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각자 어느 날에 떠나보냈 조부모를, 부모를, 형제를, 친구를 각했다.


 생각해보면, 장례식장의 구조나 분위기는 결혼식장이나 피로연장에 비해 비슷하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의례로 떠나보냈던 다른 이에 대한 기억이 함께 떠올라 슬픔의 기억들이 뒤엉켜버리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슬픔은 기존의 슬픔과 만나 형체와 종류를 알 수 없게 뒤엉켜버리고, 점점 커지, 점점 무거워진다.


 그래서 영정사진 속의 고인을 볼 때마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유가족을 볼 때, 더 마음이 동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인 연민,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는 두려움, 과거에 겪어냈던 고통. 이 모든 감정들 또한 슬픔과 함께 뒤섞여버려서, 어떤 이들은 장례식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밝게 웃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장나버리기도 한다. 




 마침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발인인 오늘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안녕과 기원 속에 장례절차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운구를 위해 오전에 장지에 들렀다 오후에야 출근한 과장님들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지만, 이내 평소처럼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을 하고, 전화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커피를 마셨다. 슬퍼하는 시간도 따로 내야 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리라. 그것이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는 방법일까. 그것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이유일까. 누군가의 말대로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일까.


 나는 3년 전, 결혼과 동시에 이 부서로 전입을 오게 되면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일면식도 없던 내게 함께 앞으로 일하게 되어 반갑다며 축의금을 주었고, 나는 3년 만에 그것을 그에게 조의금으로 돌려주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는 말장난에 이렇게나 장난처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또 있을까. 경조사 게시판에 띄운 '경사' 한 줄로 시작된 인연이 '조사'한 줄로 끝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렇게나 갑작스럽고 빨리 끝나버릴 줄이야. 


'그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게 위해서'라는 핑계, 실은 '불편함을 외면하고 싶어서'라는 진짜 이유로 그에게 안부조차 전하지 못했던 것이 이제와서야 후회가 된다. 지금의 죄책감이 그때의 불편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생전에도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비겁하지 말라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떠났다.


 남겨진 사람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 그의 부재는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빈자리는 다른 무언가로 메워질 것이다. 그러나 불현듯 어떤 이유로 어느 날 그가 생각날 것이고,  최선을 다해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고, 그 또한 그것을 바랄 것이다.


 아픔 없는 그곳에서 생전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영원히 누리며 영면하시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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