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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Jun 02. 2019

응급실 연대기

감정적이었던 사람은 진상고객에게 화를 내던 원무과 직원밖에 없었다.


인생에서의 세 번째 응급실행이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버스를 타기 전 우걱우걱 먹은 냉장고에 이틀 보관해두었던 햄버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간접적이지만 치명적인 원인은 5월 내내 여행, 해외출장, 야근으로 혹사당한 몸이 드디어 신호를 보냈기 때문인 듯싶었다. '늙은이여, 철근도 씹어먹던 네 몸은 이제 이깟 햄버거조차 견딜 수 없다구!'


 네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오면서 두 번의 구토를 했다. 신호가 올 때마다 갓 길에, 휴게소에 버스를 세워야 했다. 기사님과 승객들에게 미안해 죽겠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나마 똥싸개로 낙인찍히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우습고 한심한 생각도 했다.


 위액까지 올려내고 나니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이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간. 집에서 자고 있던 엄마에게 SOS를 보냈다. 극심한 복통에 어린애처럼 눈물이 줄줄 났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었으므로 카카오T를 누르고, 현재 위치를 최대한 정확하게 누르고, 목적지로 'ㅇㅇ병원 응급진료센터'를 지정했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두 번의 응급실 내원 경험으로 인해, 적어도 두 발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환자들은  "비키세요!!! 응급환자입니다!!!"와 같은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대기실엔 접수 후에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사람들이 세네 명 정도 있었다. 모두 허리를 고꾸리고 눈을 감고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나 역시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할 만큼 배가 아팠지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등을 기재해야 하는  환자 등록증을 작성했다. 원무과 담당 직원은 2명. 한 명은 응대 중이었고 한 명은 통화 중이었다. 통화 중인 직원 앞에 거의 쭈그려 앉아서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직원은 "아 그럼 저희보고 어쩌라고요 XX.." 하더니 전화기가 부서져라 내려놓았다. 아마 진상고객과 통화를 한 모양이다.


떨리는 손으로 쭈그려 앉아 등록증을 제출하니 "앉아서 이름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세요" 라길래 뒤에 놓여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아니 자기가 돈 더 낸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XX.." 옆에 있던 직원에게 통화 내용 관련 내용을 얘기하는 듯했다. 잠시 후 내 이름이 불렸고, 안에는 또 환자대기실이 있었다.


 족히 10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일부는 팔에, 일부는 코에 링거를 맞고 있었다. 나 또한 사람이 많아서 침대는 없고, 여기 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옆으로라도 누워있고 싶었는데 야속하게도 의자 사이사이에는 팔걸이가 있어서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잠시 앉아있으니 진료실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언제부터 아팠냐, 어디가 아프냐, 어떻게 아프냐, 피검사하면 2시간 걸리는데 하실 거냐 등등을 물어보았다. 2시간을 그 상태로 앉아있느니, 진통제와 약만 받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기에 검사는 되었다고 했다. "어디가 탈이 난 거죠?"라고 물으니 "글쎄요, 검사를 해봐야 알겠죠"라고 대답했다. '검사를 안 하면 알 수 없나요?'라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나가서 기다리면 진정제 링거를 한 대 놔주겠다고 했다.


링거를 맞고 있으니,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온 엄마가 '보호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다. 마침 주삿바늘을 꽂아주고 있던 분께 어디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건 환자분이 검사를 안 하셨으니까 제가 모르죠." 엄마와 나는 동시에 할 말을 잃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맞는 말이어서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대기실에 놓여있는 전광판에는 응급실 혼잡도 "매우 높음"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빨간색 얼굴 이모티콘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와는 상대적으로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의료진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고, 각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매뉴얼에 맞게 해 나가는 절차만이 있었다.  공간에서 감정적이었던 사람은 진상고객에게 화를 내던 원무과 직원밖에 없었다.


나마 세 번째 방문이라 익숙했던 풍경이었다. 처음으로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비키세요!! 응급환자입니다!!"를 기대했던 때)에는 접수를 기다리며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인 대기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일을 보고 때론 농담도 하는 원무과 직원들이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10년이나 어렸을 적 일이다.)


하루에도 몇십 명, 혹은 몇 백명의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을 갖다 보면 고통에 무뎌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 통증은 전체 통증의 단계 1~10 중 2 정도에 해당하는 경미한 통증이었을 것이고, 의료진들은 그에 해당하는 타당한 조치를 해주었던 것이리라. 게다가 '객관적 수치'를 증명하는 피검사도 하지 않았는데 추측성으로 '위경련이시네요 혹은 탈장이시네요'라고 말했다가, 그것이 아니었을 때에 그로 인한 피해를 감당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 공간의 모두는 검사 결과와 데이터로만 이야기하도록 교육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큰 병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원칙임은 자명하니 말이다.


의료진에게 두통약 대신 따뜻한 차 한잔을 권하는 동화 속 약사의 친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일을 하며 '일은 일일 뿐이다'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무리 그쪽 회사 기준이 그렇고, 설령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라고 말했던 거래처 담당자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일은 일이지 뭔 놈의 섭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일은 일이어도 섭섭했겠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일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걸 내가 잊고 있었.


그리고 조금 다른 종류의 의문이 생겨났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대기실에서 열 명이 넘는 환자들이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어서 몸을 베베 꼬고 있는데도 왜 침대는 더 놓이지 않는 걸까, 왜 의자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는 걸까, 응급환자의 수는 늘 비슷한 것 같은데 왜 응급실 담당 의료진의 수는 늘지 않는 걸까. 게다가 왜 더 피곤해 보이는 걸까. 결국은 일도 사람이 한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사람이 일에 잠식되어버려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엄마에게 기대 링거를 맞으면서 많은 생각 하다 보니 30분이 지났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셔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건 안되고 입에 물고 있을 수 있도록 거즈에 물을 적셔다 주겠다던 분은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링거를 다 맞고 정리하는 데, 나와 비슷한 증상으로 내원한 듯 한 옆 환자의 피검사 결과가 나온 듯했다. "환자분 피검사 결과 특이하신 건 없으세요 정밀하게 보고 싶으면 CT 찍으셔야 하는데 찍으시겠어요?" 또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그분도 됐다며 퇴원하겠다고 짐을 꾸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를 타고 나서야 옆으로 편히 기댈 수 있었고, 30분 동안 맞은 진정제 덕인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 택시가 엄청난 총알택시여서 40분 거리를 25분 만에 왔다는 사실 또한 나중에 엄마에게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약봉지를 뜯어 따뜻한 물과 함께 갖다 주고, 이부자리를 정리해주고도 한참을 괜찮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내 방을 나갔다. 여기가 응급실이구나 하는 유치한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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