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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May 22. 2020

숙취의 추억

저는 금방 오늘의 메스꺼움을 잊고 또 술을 마실 것입니다.

오전 7시,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의 파워 드라이 소리가 백수 아내의 단잠을 깨웁니다. 
“자기야, 대가리는 괜찮니?” 
머리를 다 말린 남편이 제 머리를 짚으며 다정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단어로 아침 인사를 건넵니다.

일주일 만에 상경한 주말부부가 어제 회포를 너무 진하게 풀었던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각 1병으로 끝내기에 조금 아쉬웠던 찰나, 갑자기 ‘게장 비빔밥’이라는 신메뉴의 등장은 약간 반칙이었거든요. 별 수 없이 소주 한 병과 게장 비빔밥을 주문했습니다. 취하면 ‘먹고 마시는 주사’를 공유하는 먹깨비 부부는 그 후로도 한참을 먹고, 마셨습니다. 

“근데 나 흰 티에서 이상한 냄새 나!” 남편이 갑자기 흰 티를 제 얼굴에 들이밀며, 살아있는 오징어 냄새로 제 코를 공격합니다.
오늘로 백수생활 한 달하고 2일 차, ‘일어나기 싫은데,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감에 겨워있는 저를 강제 기상시키는 쾨쾨한 쉰내입니다. 요즘 날이 계속 흐리고 습하더니, 귀찮아서 널어둔 빨래가 몇 차례 습기를 먹었다 뱉었다를 반복한 모양입니다. 눅눅한 빨래를 모두 걷어 세탁실로 향합니다. 어제 입은 옷이 빨래 바구니 옆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분명 바구니 안에 넣었던 것 같은데 이상합니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하는 둥 마는 둥 인사 비슷한 것을 하고,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손톱 부스러기를 발견합니다. 어젯밤, 분명 바닥에 휴지를 야무지게 깔고 깎았던 것 같은데, 바닥은 처참했습니다. 핸디 청소기를 꺼내와 전원을 켭니다. “위헤히이!!.. 이.. 잉.... 이이이....ㅇ” 무엇이든 빨아들이겠다는 듯한 결연한 소리를 10초간 내다, 곧 다 죽어가는 바람 빠진 풍선 소리를 냅니다. ‘사은품으로 받은 게 역시..’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청소를 마무리합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아이패드를 켭니다. 어제 보다 잠든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를 시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사보다 풍경의 소리가 많은 영화는 감독에 의해 반쯤 색칠된 피포 페인팅 같습니다. 나머지 색은 제가 채워서 그림을 완성해야 합니다. 불친절한 감독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것 같아 왠지 지는 기분이지만, 조만간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아직 어제 마신 술이 뇌에 가득해서, 새로운 생각을 밀어 넣을 여유가 없다고 변명하며,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합니다. 

어제 아무래도 손톱을 너무 바짝 깎은 모양입니다. 머리를 감는데, 두피에 손가락이 닿는 느낌이 생경합니다. ‘고작 1그람도 안 되는 손톱의 상실이 주는 낯섦’에 대해 생각하다가, 앞으론 술 먹고 손톱 자르는 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샴푸와 트리트먼트, 폼클렌저와 바디클렌저에서는 각각 체리향, 망고향, 곡물향, 꽃향이 납니다. 도통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오래 써왔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각각의 향이 ‘누가누가 강렬한가’ 대결하듯 앞다투어 제 코를 찌르는 것 같습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양말을 신습니다. 발톱도 야무지게 깎여있습니다. 발가락의 윗 단면이 양말에 직접 닿을 정도입니다. 걸을 때마다 가벼운 쓰라림이 느껴집니다. 앞으론 술 먹고 발톱 자르는 것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스타벅스에서 초콜릿 케이크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합니다. 이상하게 술을 마신 다음 날에는 생전 안 먹는 ‘단 음식’이 간절합니다. 크게 한 입 먹었는데, 오늘은 단 맛보다 씁쓸한 맛이 강합니다. 몇 번 포크를 휘적이다 내려놓습니다. 지방 신도시, 그리고 하나로마트 앞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는 아이들의 비명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많은 이들이 스타벅스의 장점으로 적당한 소음과 거슬리지 않는 로비 뮤직을 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광화문 스타벅스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곡 반복’을 누릅니다. ‘내 하루를 보니까 네 기분이 어떠냐는’ 적재의 ‘잘 지내’냐는 인사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왠지 좀 지겹습니다. 또 다른 ‘고막 남친’ 폴킴에게 찾아가 보지만, ‘우리 만남이’ 이내 권태로워집니다. 결국 유튜브에 ‘스타벅스 로비 뮤직 3시간’을 찾아 재생합니다. 스타벅스에 와서, 스타벅스 로비 뮤직을 이어폰으로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한참을 읽고, 또 끄적끄적 씁니다. 깜빡이는 커서보다 까슬한 얼굴, 푸석한 머리카락에 자꾸 손이 가는 걸 보니 오늘은 영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어제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 문장을 오늘 다시 보니 괜히 시시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변덕스럽나 싶다가, ‘그래 이게 다 숙취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김혼비 작가는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떠올려 봐도 명문입니다. 

‘마실 때 즐거웠으니 됐어’라고 생각하며 조금 망한 것 같은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펼쳐둔 책과 아이패드, 키보드와 핸드폰을 주섬주섬 가방에 담습니다. ‘내일부턴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해보지만, 아차,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내일은 합법적인 공휴일이니 늦게까지 죄책감 없이 자도 되고, 책도 읽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직장인으로 7년을 살았던 제가 백수가 되면서 그렇게 정했거든요.

오징어 냄새를 선물하고 출근한 남편이 해장국을 포장해서 퇴근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하나로마트에 들려 소주 두 병을 사서 집으로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아주 강한 예감이 듭니다. 집을 나올 때 제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밖은 밝은데 말입니다. 해는 어디로 갔을까요. 벌써 숙취를 '추억'이라 여기는 저는 오늘 또 얼마나 마실까요, 그리고 내일 또 얼마나 힘들까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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